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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태조왕건과 삼한 (56)
濟世安民 bagtur khan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 7 내용이다. (1039년 06월 29일 (음)) 고려시대 사료 DBHOI kr_053r_0010_0020_0020_0040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 7 내용이다.靖宗五年六月戊子 西北路大雨, 鴨江水漲, 漂失兵船七十餘艘.정종 5년(1039) 6월 무자 서북로(西北路)에 큰 비가 내려 압록강[鴨江](고려사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 넘쳐서 병선 70여 척이 떠내려갔다.서북로(西北路)에 큰 비가 내려 압록강[鴨江](고려사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 넘쳐서 병선 70여 척이 떠내려갔다(漂失兵船七十餘艘)라고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으로 ..
이전에 올려드린 '두 개의 고구려, 다물(多勿), 기자조선, 우북평'의 글 일부를 좀 더 보충해서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글도 보충해서 올렸습니다. 고려사와 중국의 사서들을 보면 주몽이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기 이전 이미 지금의 중국 조양시 부근엔 고구려(高句驪)라는 세력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조양시 부근에 있었던 고구려(高句驪)는 위만조선에 부속된 세력이었다고 해석됩니다.그리고 그 조양시 부근의 고구려(高句驪)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와 한자 표기도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는 사서에 高句麗로 한자표기했고 주몽 이전에 조양시 부근에 있던 고구려(高句驪)는 한자로 高句驪로 표기했습니다.그리고 중국 조양시 부근에 있었던 고구려(高句驪)는 중국 진나라(秦)와 한..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고려시대 사료 DB貞明四年 三月 唐商客王昌瑾, 忽於市中, 見一人, 狀貌瓌偉, 鬚髮皓白, 頭戴古冠, 被居士服, 左手持三隻梡, 右手擎一面古鏡方一尺許.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以二斗米買之. 鏡主將米沿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원문과 번역이다.“‘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者, 靑木松也, 謂松嶽郡人, 以龍爲名者之子孫, 可以爲君主也. 王侍中, 有王侯之相, 豈謂是歟? 黑金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初盛於此, 殆終滅於此乎! 先操雞,..
이전에 올려드린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8'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했기 때문에 공지드립니다. 기존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한 이유는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지금의 개원시(開原市)와 철령시(鐵嶺市) 동쪽 어느 지점에서 지금의 영안시(宁安市)와 접한 남쪽지역까지 선을 그은 후 그 선의 남쪽이 고려의 영토라고 보기 때문에 이전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했습니다. 또한 길주(吉州)의 위치에 대한 제 견해도 바뀌었기 때문에 수정했습니다(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선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에서 백두산 사이의 어느 지역에 고려가 세운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봤었는데 지금은 흑룡강성 수분하시[绥芬河市] 남쪽에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봅니다). 고려가 동여진(東女眞) 내지 동번(東蕃)과 전투를 벌여 확보..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인지 의구심이 든다.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를 거란 때의 동경(東京)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까지 올린 글에서도 그렇게 기술했지만,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지금의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은 아니며 동경(東京)에서 관할하던 동경(東京)의 속현이었고 아마도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관할하던 학야현(鶴野縣)과 그 주변이며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의 국경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학야현(鶴野縣) 주변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거란의 중요 도시..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熙復奏曰, “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成宗曰, “久不修聘, 恐有後患.” 遂遣之. 轉平章事.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十二年, 契丹來侵, 熙爲中軍使, 與侍中朴良柔·門下侍郞崔亮, 軍于北界備之. 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實恐我也...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고려시대 사료 DB遼史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대군(大軍)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tóngzhōu]에 주둔하였다.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와 조선의 학자들이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 두 나라가 충돌한 지역과 날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그 한 예로 강조(康肇)와 거란군이 전투한 지역과 날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