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거란의 동경(東京), 래원성(來遠城)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거란의 동경(東京), 래원성(來遠城)

박지원( baghatur khan) 2024. 4. 14. 12:13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인지 의구심이 든다.

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를 거란 때의 동경(東京)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까지 올린 글에서도 그렇게 기술했지만,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지금의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은 아니며 동경(東京)에서 관할하던 동경(東京)의 속현이었고 아마도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관할하던 학야현(鶴野縣) 주변이며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와 국경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학야현(鶴野縣) 주변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거란의 중요 도시 중 하나인 동경(東京)을 국경 가까이에 둔다는 것은 의문이다.

적어도 큰 강이 동경(東京)을 보호하는 방어선 역할을 해야 계요적여진이나 고려의 군사적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고려시대 사료 DB

九月 遣太僕少卿金先錫如遼, 乞罷榷場. 表曰, “三瀆靡從, 雖懼冒煩之非禮, 一方所願, 豈當緘黙以不言? 况昔者, 投匭上書, 萬姓悉通於窮告, 呌閽檛鼓, 四聰勿閡於登聞. 幸遭宸鑑之至公, 盍寫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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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臣伏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甫叅於禹會. 獎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위의 고려사에 기재된 고려선종이 거란의 황제에게 밝힌 내용을 보면 고려와 거란은 거란의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때 국경을 정했으며 고려와 거란의 경계엔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란 명칭은 요동(遼東)에 거주하던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이 학(鶴)이 되어 요동(遼東)의 성(城)에 앉아있었다는 화표주(華表柱) 전설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요동(遼東)에 있는 성(城)임을 알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 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後爲渤海大氏所有. 大氏始保挹婁之東牟山. 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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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鶴野縣. 本漢居就縣地, 渤海爲雞山縣. 昔丁令威家此, 去家千年, 化鶴來歸, 集於華表柱, 以咮畫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塚纍纍.’ 戶一千二百.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가 계산현(雞山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위(丁令威)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서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화표주에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를 보면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학야현(鶴野縣)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야현(鶴野縣)은 '학(鶴)의 들판(野)'이라는 뜻이며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에서도 이 지역의 유래를 설명할 때 정령위(丁令威)와 화표주(華表柱)에 관한 전설을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관할이며 화표주(華表柱) 전설을 지닌 학야현(鶴野縣)과 같은 화표주(華表柱)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고려와 거란의 국경 주변에 있는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당시 이 전설이 전해지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본다.

즉, 지금의 요양시(遼陽) 근처에 학야현(鶴野縣)이 있었고 학야현(鶴野縣) 부근에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 있는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도 지금의 요양시(遼陽)를 언급하는 과정에 화표주(華表柱)를 언급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아직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지 못해 정확한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아래는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 구글지도이다.

 

랴오양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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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관할인 학야현(鶴野縣)이 있는 지역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부근에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 있다고 하니 구글지도의 빨간색 점선과 접한 곳에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화표주(華表柱) 전설이 있던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에서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까지 선을 그은 후, 선의 왼쪽은 요동반도에 거주하던 계요적여진의 영역이었고 선의 오른쪽은 고려영토였다고 본다.

요사(遼史)와 고려사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에 대한 기술이 다르다고 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서 말씀드렸다.

아래는 요사(遼史)와 고려사에 기재된 '고려 거란 제2차 전쟁'을 도표로 만든 것이다.

첫번 째 전투가 벌어진 날짜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요사(遼史)에선 강조(康肇)와의 전쟁을 첫번 째 전투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사는 양규(楊規)의 흥화진(興化鎭) 전투를 첫번 째 전투로 기술한다.

요사(遼史)에 기재된 고려와의 제2차 전쟁
고려사에 기재된 거란과의 제2차 전쟁
1010년 11월 10일(음)
거란이 압록강(鴨淥江, 지금의 요하[遼河]라고 본다)을 건너 고려의 강조(康肇)와 전투를 치렀고 강조는 패퇴한 후 동주(銅州, 강조가 패퇴한 지역과 날짜가 고려사 기록과 다르다)에 주둔했다.
1010년 11월 11일(음)
거란이 강조(康肇)와 부장(副將) 이립(李立)을 사로잡았다.
1010년 11월 13일(음)
동주(銅州)·곽주(霍州)·귀주(貴州)·영주(寧州)가 모두 항복하였다.
 
1010년 11월 16일(음)
1010년 11월 16일(음)
거란주(契丹主, 거란황제 야율융서이다)가 압록강(鴨綠江, 요사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과 표기가 다르며 지금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이다)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1010년 11월 17일(음)
 
 
1010년 11월 24일(음)
강조(康兆)가 거란(契丹)과 통주(通州)에서 싸웠는데, 패배하여 군대가 무너지고 사로잡혔다.(강조가 사로잡힌 날짜와 장소가 요사[遼史]와 다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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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
대군(大軍)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tóngzhōu]에 주둔하였다.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를 보면 고려의 강조(康肇)와 1010년 음력 11월 10일 전투를 치렀고 강조는 패퇴해서 동주(銅州)에 주둔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거란은 압록강(鴨淥江, 지금의 요하[遼河]라고 본다)을 건넜다고 기재하고 있다.

요사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은 지금의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며 한자표기도 서로 다르다고 말씀드렸었다.

즉, 요사(遼史)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며 지금의 요하(遼河)로 해석된다.

따라서 거란의 군대(大軍)는 요하(遼河)를 건너 요하(遼河) 남쪽의 요동(遼東)에 위치한 동주(銅州) 부근에서 고려의 강조(康肇)와 전투를 벌였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北盟㑹編遼太祖遷女真大姓數千户置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相通名曰哈斯罕〈舊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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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銅州
'遼史'銅州廣利軍刺史渤海置兵事𨽻北兵馬司統縣一析木縣本漢望平縣地初𨽻東京後來屬(국내의 글모아에서 출판된 남주성 번역의 만주원류고에선 初隶東京後來屬라고 기재한다. 𨽻[예]가 아닌 隶[예]로 표기한다)
'明一統志'析木廢縣在海州衛東南四十里渤海花山縣遼改析木置銅州金屬澄州元省
동주(銅州)
'요사(遼史)'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은 자사주로서 발해에서 두었다. 군사 업무는 북병마사(北兵馬司)에 속한다. 관할 현은 석목현(析木縣) 하나이다. 본래 한()의 망평현(望平縣) 땅이다. 초기에 동경(東京)에 속하다가 뒤에 내속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 폐지한 석목현(析木縣)은 해주위(海州衛) 동남 40리 거리에 있다. 발해의 화산현(花山縣)이다. 요나라에서 석목(析木)이라 고치고 동주를 두었다. 금나라 때에 징주(澄州)에 속하고 원나라에서 없앴다.

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요사(遼史)'와 '명일통지(明一統志)'의 내용이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군이 주둔한 동주(銅州)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래는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내용이다. 

 

铜州 (辽朝)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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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设铜州广利军刺史于析木县(今辽宁省海城市东南44里析木镇析木城)
동주광리군자사를 석목현에 세웠다(지금의 요령성해성시동남 44리 석목진석목성이다).

강조(康肇)가 주둔한 동주(銅州)는 지금의 해성시 석목진(海城市 析木镇)이라고 한다.

요사(遼史)에선 강조(康肇)가 주둔한 동주(銅州)는 지금의 요하(遼河)보다 남쪽인 요동(遼東)지역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요사(遼史)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은 요하(遼河)로 해석된다.

아래는 지금의 석목진(析木镇)의 구글지도이다. 

 

Ximuzhen · 중국 랴오닝 성 안산 시 하이청 시 邮政编码: 11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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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강조가 주둔했던 동주(铜州)인 지금의 석목진(析木镇)이다.

요하(遼河)보다 남쪽이며 요동(遼東)지역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 통화 28년(統和 28年)의 내용이다. 丙戌 1010년 11월 11일(음)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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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 통화 28년(統和 28年)의 원문과 번역이다.

肇復出, 右皮室詳穩耶律敵魯擒肇及副將李立, 追殺數十里, 獲所棄糧餉·鎧仗.
강조(康肇)가 다시 출병하였으나 우피실 상온(右皮室 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가 강조와 부장(副將) 이립(李立)을 사로잡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적을 죽이고 버린 군량미와 갑옷, 무기를 노획하였다.

1010년 11월 11일 거란이 강조와 이립(이현온[이현운])을 사로잡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현종(顯宗) 원년 내용이다. 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고려시대 사료 DB

世家 卷第四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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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현종(顯宗) 원년 원문과 번역이다.

己亥 康兆與契丹, 戰于通州, 敗績就擒.
기해 강조(康兆)가 거란(契丹)과 통주(通州)에서 싸웠는데, 패배하여 군대가 무너지고 사로잡혔다.

고려사에는 음력 11월 24일 '통주에서 강조가 거란과 싸우다 패배하고 사로잡혔다(康兆與契丹, 戰于通州, 敗績就擒).'고 기재되어 있다.

요사(遼史)와 고려사를 비교해보면 강조가 사로잡힌 날짜는 13일이 차이가 난다.

즉, 요사(遼史)는 11월 11일이며 고려사는 11월 24일이다.

그리고 강조와 거란군이 전투한 장소도 다르다.

요사(遼史)에선 동주(銅州)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사에선 통주(通州)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거란이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북한의 압록강이다)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에서 1월 16일 전투하고 이후 24일 강조가 생포되었다고 기록되어있으니 강조가 생포된 통주(通州)는 북한의 압록강(鴨綠江)보다 남쪽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요사(遼史)에선 거란의 대군이 압록강(鴨淥江, 요하[遼河]라고 본다)을 건너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한 동주(銅州)에서 강조를 생포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즉, 요사(遼史)와 고려사 중 하나는 실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현종(顯宗) 원년 내용이다. 1010년 11월 16일(음) 신묘(辛卯)

 

고려시대 사료 DB

世家 卷第四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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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현종(顯宗) 원년 본문과 번역이다.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渡鴨綠江, 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신묘 거란주(契丹主)가 직접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15의 내용이다.

 

遼史/卷15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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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년 1월 1일의 번역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것이고 그 아래의 1월 14일부터 1월 24일까지의 내용은 내가 번역한 내용이다.

二十九年春正月
乙亥朔,班師,所降諸城復叛。至貴州南峻嶺谷,大雨連日,馬駝皆疲,甲仗多遺棄,霽乃得渡。
己丑,次鴨淥江(압록강에 이르렀다)
庚寅,皇后及皇弟楚國王隆祐迎於來遠城
壬辰,詔罷諸軍。
己亥,次東京
29년 춘정월
1011년 1월 1일(음력) 군대를 철수시키자 항복했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서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지자 갑옷과 병장기를 많이 버렸으며, 날이 개어서 겨우 건넜다.
1011년 1월 14일(음력) 압록강(鴨淥江, 지금의 요하[遼河]라고 본다)에 도달했다.
1011년 1월 15일(음력) 황후와 황제의 동생 초국왕(楚國王) 융우(耶律隆祐 야율융우)래원성(來遠城)에서 영접하였다.
1011년 1월 17일(음력) 모든 군대를 거두었다.
1011년 1월 24일(음력) 동경(東京)에 도달했다.

 내용은 '고려거란 제2차 전쟁' 때 거란이 고려에서 철수하는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요사(遼史)의 내용이다.

 

거란군대는 1월 1일 귀주(貴州)에 있었고 1월 14일 압록강(鴨淥江)에 도달했다고 한다. 귀주(貴州)가 요동지역에 있으니 여기서 압록강(鴨淥江)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거란이 강조(康肇)와 전투하기 전에 건넜던 요하(遼河)라고 해석된다. 한문 역시 강조(康肇)와의 전투를 묘사한 요사(遼史)의 압록강(鴨淥江)과 한자표기가 같다.

그리고 거란에선 압록강(鴨淥江) 즉, 요하(遼河)에 도달한 다음 날 황후와 초국왕(楚國王) 야율융우(耶律隆祐)를 래원성(來遠城)에서 영접했다고 한다. 따라서 거란의 래원성(來遠城)은 요하(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9일이 지난 1월 24일에 거란의 동경(東京)에 도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거란의 동경(東京)은 지금의 요하(遼河)를 건너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서쪽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즉,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서쪽이 아닌 동쪽에 있기 때문에,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는 요나라 동경(東京)이 아니라고 해석된다.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는 동경(東京)이 아닌 동경(東京)의 관할현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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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歸州
遼史
歸州觀察太祖平渤海以降户置後廢統和二十九年伐髙麗以所俘渤海户復置兵事屬南女真湯河司統縣一歸勝縣
귀주(歸州)
요사(遼史)
귀주에 관찰(觀察)을 두었다. 태조(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로 해석된다)가 발해를 평정하고 항복한 호민들로써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통화 29년(1011)에 고려를 정벌하고 사로잡은 발해호로써 다시 설치하였다. 군사 업무는 남여진탕하사(南女真湯河司)에 속한다. 관할 현은 귀승현(歸勝縣) 하나이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요사(遼史)의 내용을 인용해 '관할 현은 귀승현(歸勝縣) 하나이다(統縣一歸勝縣).'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귀주(歸州)는 관할 현인 귀승현(歸勝縣)을 두고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요사(遼史)에 기재된 귀주(歸州)는 요하(遼河)보다 남쪽이며 요동(遼東)지역에 있음을 볼 수 있다. 1011년 1월 1일 거란이 철수할 당시 거란군대는 아직 요하(遼河)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요동(遼東)지역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귀승현(歸勝縣)에 대한 내용이다. 

 

歸勝縣_百度百科

歸勝縣,遼代縣名。為遼東京道歸州附郭縣。

baike.baidu.hk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귀승현(歸勝縣)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하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歸勝縣
歸勝縣,遼代縣名。為遼東京道歸州附郭縣
州、縣同治於今遼寧蓋縣熊嶽城西南之歸州城。金改縣為鎮。
귀승현
귀승현, 요나라 때 현의 명칭이다. 요나라 동경도 귀주부 곽현에 두었다.
주, 현을 함께 다스렸으며 지금의 요녕개현웅악성서남쪽 귀주성이다. 금나라 때 현을 진으로 만들었다.

백도백과의 내용을 보면 요나라(遼) 동경도귀주부곽현(東京道歸州附郭縣)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요나라(遼) 귀승현(歸勝縣)은 지금의 요령성개현웅악성서남쪽(遼寧蓋縣熊嶽城西南)이라고 한다.

아래는 중국 요령성 웅악진(熊岳镇)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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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글지도에 표시된 지금의 요령성 웅악진(熊岳镇)에 요나라(遼)의 귀주(歸州)의 관할인 귀승현(歸勝縣)이 있었다고 한다.

즉, 거란은 1011년 1월 1일 귀주(歸州)남쪽을 지나고 있었다고 하니 바로 구글지도에 표시된 이 지역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北盟㑹編遼太祖遷女真大姓數千户置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相通名曰哈斯罕〈舊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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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保州
遼史保州宣義軍節度髙麗置州故縣一曰來逺聖宗以髙麗王詢擅立問罪取其保定二州統和末髙麗降於此置榷場𨽻東京統軍司縣一來逺縣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户一千
遼史宣州定逺軍刺史開泰三年徙漢户置𨽻保州
遼史懐化軍下刺史開泰三年置𨽻保州
보주
'요사(遼史)' 보주 선의군에는 절도를 두었고 고려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내원(來逺) 하나이다. 성종이 고려의 왕순이 마음대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죄를 물어서 보주(保州)와 정주 두 주를 빼앗았다. 통화 연간 말에 고려가 항복하자 이곳에 각장(榷場: 시장)을 두었다. 동경통군사 예하에 두었으며 관할 현은 내원현(來逺縣) 하나이다. 처음에 요서의 여러 현민들을 옮겨서 채웠으며, 또 해와 한 병 7백 명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고 호는 1천이다.
'요사(遼史)' 선주 정원군에는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1014)에 한호를 옮겨살게 하고 보주 예하에 두었다.
'요사(遼史)' 회화군은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고, 개태 3년(1014) 설치하였으며 보주 예하에 두었다.

만주원류고에선 요사(遼史)를 인용해 보주(保州)를 설명하고 있다. 보주(保州)는 거란에서 고려로 부터 빼앗은 영토였다. 보주(保州)는 래원현(來逺縣)을 관할로 두었다고 한다. 요사(遼史)에 보면 거란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요하(遼河)로 해석되는 압록강(鴨淥江)에 도달한 후 그 다음 날 래원성(來遠城)​에서 거란황제의 동생인 초국왕 야율륭우(耶律隆祐)를 영접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보주(保州)는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본다.

요하(遼河, 辽河, Liaohe River)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Liaohe River · 중국

★★★★☆ ·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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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지도를 보면 요하(遼河) 동쪽에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가 있다. 요사(遼史)를 보면 거란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요하(遼河)를 건너 동경(東京)에 도착한 것으로 해석되기에 지금의 요양시(遼陽市, 辽阳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이 아닌 동경(東京)의 관할현이고 학야현(鶴野縣)이 위치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요하(遼河, 辽河, Liaohe River)에 대한 두산백과 설명이다. 

 

랴오허강

중국 둥베이 지방 남부 평원을 관류하는 강. 길이 약 1,400km. 원류는 서랴오허강과 동랴오허강으로 나뉘는데, 서랴오허강이 동랴오허강보다 길다. 서랴오허강은 대싱안링[大興安嶺]산맥 남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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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貴州)가 요동반도(遼東半島)에서도 발해만(Bphai Sea)에 가까운 지역인 것으로 볼 때 거란의 동경(東京)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다고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