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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중간기와 헬레니즘 (11)
濟世安民 bagtur khan
앞의 글에선 요나단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아쉽게도 요나단은 유대의 독립을 겪지는 못하고 정치적 음모에 의해 살해됩니다. 결국 형제들 중 막내인 시몬이 대제사장이 되고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는 시리아를 몰아내고 친 헬라(그리스)파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후 기원 전 141년 셀류코스 왕국으로 부터 독립을 선포합니다. 이 독립왕국인 하스모니아 왕조는 신약성경에 등장하진 않지만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역사입니다. 이 왕조는 단순히 정치적 왕조가 아닌 종교적 성격을 함께 가진 왕조였으며 신약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가 종교적 활동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 활동을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들어내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후에 하스모니아 왕조에서 로마의 지배로 바뀌면서 정..
하스모니아 가문의 시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유대 내에서 기반이 약해진 상황에서도 그동안 그들의 독불장군식의 고집스러운 일관성과 권력지향성은 그들의 추종자 들에겐 결집력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오히려 헬라화된 그리고 온건한 보수적 성격의 집단들은 유대 내에서 그 수는 많았지만 여러갈래 여러계통으로 갈라져 있어서 군사적으로 바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집단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셀류코스 왕국 즉, 시리아의 사정을 보면 안티오쿠스 5세는 사촌인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시라아의 왕권으르 노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의 도전을 받고 있었고요. 데메트리오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대 내의 하스모..
오늘은 짧게 글 올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과 낮에 해야 할 일들이 많고 준비할 일들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가 조금 어렵네요. ^^ ; 어제 저녁 5시 쯤에 기상했는데 아마도 모레 7시까지는 계속 취침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진도 내용으로 들어가서 앞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스모니아 가문은 유대 내의 여러 저항세력 중 매우 강경한 성격의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적인 성격을 떠나서 정치적으로도 야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고요. 하스모니아 가문이 유대 내부의 저항세력 중에서도 주변인으로 취급 받은 것은 그들이 타협을 모르는 보수적인 신앙성격을 고집한 것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매우 야심이 많아서 유대 내부서 견제를 당했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들의 비타협적인 신앙성격과 독..
앞에서는 알키모스가 대제장이 되고 금지되었던 유대종교가 다시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선에서 유대와 셀류코스 왕조가 합의를 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합의를 보는 과정에서 합의안을 반대한 유다 측 즉, 하스모니아 가문의 발원권은 인정되지 않았고 유다는 유대 내에서 주변인 신세로 놓이게 됩니다. 다시 유다는 여러전투를 벌였고 예루살렘 북쪽 아다사에선 그리스의 장군 니카노르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시리아의 장군 바키데스가 지휘하는 전투에선 유다는 전사하게 됩니다. 시리아 장군 바키데스는 화해조약을 제시했고 전사한 유다의 형제인 요나단이 예루살렘 부근에서 재판관으로 세워지고 예루살렘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시리아는 다시 유대지역을 통치하고 대신 유대종교는 인정하는 선에서 시리아와 합의를 봅니다. 하스모니아..
하스모니아 가문의 독립투쟁은종교적인 성격 외에 기득권 계층과 비 기득권 계층간에 투쟁이라는 정치적, 혁명적인 성격도 가미됩니다. 학자들은 이 독립운동 및 투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어느 한가지로만볼 수는 없고 여러가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윈인이 세월을 두고 누적되어 발생한 것으로보고 있습니다. 처음 하스모니아 가문 유다의 투쟁에는 종교적, 정치적 성격의 집단인 하시딤의동조가 있었습니다. 하시딤이란 유대의 헬라화에반대하는 성격을 띤 종교적으로 경건한 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유다는 하시딤 외에 헬라화된 기득권 세력인 대제사장과 주변세력에 대해 반감을 가진 가난한 자들도 지지 세력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셀류코스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지역의 비유대인, 유대북쪽의 사마..
오늘은 짧게 글 올려드리겠습니다. 매장에 일이 많아지고 제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글을 잘 정리해서 쓰기 힘드네요. 오늘은 자료를 찾아 글을 올려드리진 않고 간단하게 제 느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아버지와 다섯 아들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조는 왕국을 세우는데 약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적과 내부에서 투쟁과 협상을 병행해 가면서 이루어 냅니다. 한 인물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대에서 자식 대에 걸쳐 이루는 것은 아마도 중국 삼국시대를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는데 초석을 둔 사마 염의 할아버지 사마 의와 사마씨 가문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부추켜 당나라를 건국한 당태종 이세민과도 비교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세 가문과 사건은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동족 내부에서 그리고 집안 ..
앞의 하스모니아 왕조 4세에서는 안티오쿠스 3세와 안티오쿠스 3세 이후 셀류코스 왕국은 로마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내용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의 등장과 야손이 대제사장이 되는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내용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설명드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야손은 셀류코스 왕국이 로마에 바치는 조공으로 인한 재정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기원전 175년에 대제사장이 된 후 에루살렘을 그리스화 된 도시로 개조합니다. 당시 야손은 예루살렘을 그리스화 시키려는 개혁파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요. 다시 3년 후인 기원전 172년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메넬라우스라는 인물도 야손과 같은 방식으로 셀류코스 왕에게 뇌물을 바쳐 야손을 제치고 대제사장이 됩니다. 메넬라우스 역시 개혁파의 지지를 받..
안티오쿠스 3세 때 셀류코스 왕조는 제 5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01~195년)을 통해 페니키아와 유대지역을 점령하지만 안티오쿠스 3세는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다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 후 안티오쿠스 3세와 다음 지도자 셀류코스 4세 그리고 다시 다음 지도자인 안티오쿠스 4세 때 셀류코스 왕조는 로마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제 6차 시리아 전쟁 때도 이집트를 제압하지만 로마의 압력에 의해 결국 이집트를 포기하게 됩니다. 셀류코스 왕조는 로마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따라서 안티오쿠스 4세 때 셀류코스 왕조는 로마에 부담해야하는 조공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대 예루살렘에서는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은 세력과 유대 전통을 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