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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진한(秦韓)의 의미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원문과 번역이다.
“‘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者, 靑木松也, 謂松嶽郡人, 以龍爲名者之子孫, 可以爲君主也. 王侍中, 有王侯之相, 豈謂是歟? 黑金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初盛於此, 殆終滅於此乎! 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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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가운데 사유 아래로 상제(上宰)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체를 드러낸다.’라는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이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에게 왕후(王侯)의 상이 있으니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바인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께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끝내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로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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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高麗史)는 왕건이 태봉의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있을 때 거울에 세겨진 예언을 해석하는 내용이다.
상제(上宰)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라는 문장에서 보듯 고려사(高麗史)에는 거울에 세겨진 예언과 예언을 풀이한 내용을 함께 기재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선 상제(上宰, 하늘의 주인을 뜻한다고 해석된다)의 아들이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왔음을 기술하고 있다.
즉,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은 상제(上宰)의 아들이 개입된 중요한 요소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王侍中, 왕건)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라고 기재하면서 역시 거울에 세겨진 예언과 풀이를 고려사(高麗史)에서 함께 기술하고 있다.
거울에 세겨진 예언엔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先操雞, 後搏鴨者).’라고 했는데 닭은 한문으로 鷄(계)라고 쓰며 오리는 한문으로 鴨(압)이라고 쓴다.
즉, 이 예언에 기재된 鷄(계, 닭 계)는 鷄林(계림)을 뜻하며 鴨(압, 오리 압)은 鴨綠江(압록강)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이 예언을 당시에 왕시중(王侍中, 왕건)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로 풀이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앞의 예언에서 상제(上宰)에 의해 아들(왕건)이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왔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사(高麗史)에서 풀이한 계림(鷄林)은 진한(辰韓)을 뜻하며 압록강(鴨綠江)은 마한(馬韓)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계림(鷄林)은 진한(辰韓)에 속한 지역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마한(馬韓)은 고구려가 된다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즉, 고려 때 편찬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내용을 볼 때 마한(馬韓)은 고구려가 되기에 이 예언에 기술된 압록강(鴨綠江)은 마한(馬韓)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아래는 의문점을 나타낸 내용과 도표이다.
첫번 째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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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 고구려가 되었고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면, 왕건이 고려의 황제가 되었을 때 이미 왕건은 마한을 거둔 것이 되는데, 왜 왕건이 황제가 된 후 계림을 먼저 거두고 이후 압록강으로 상징되는 마한을 거둔다고 예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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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째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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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재된 계림, 즉 계림으로 상징되는 진한이 과연 왕건이 삼국통일을 하기 전의 신라이고 지금의 경북 경주(慶州)를 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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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2 태조 18년 12월의 내용이다. 935년 12월 12일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2 태조 18년 12월의 본문과 번역이다.
壬申 御天德殿, 會百僚曰, “朕與新羅, 歃血同盟, 庶幾兩國永好, 各保社稷. 今羅王固請稱臣, 卿等亦以爲可, 朕心雖愧, 衆意難違.” 乃受羅王庭見之禮, 群臣稱賀, 聲動宮掖. 於是, 拜金傅爲政丞, 位太子上, 歲給祿千碩, 創神鸞宮賜之. 其從者並收錄, 優賜田祿. 除新羅國爲慶州, 仍賜爲食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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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신라(新羅)와 피를 입술에 바르며 동맹을 맺은 것은 두 나라가 길이 우호(友好)를 유지하고 각자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있겠다고 요청하고 그대들도 그것이 옳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라고 하고, 이어 신라왕이 뜰에서 알현(謁見)하는 예를 받으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여 함성이 궁궐[宮掖]을 진동하였다. 이에 김부(金傅)를 정승(政丞)으로 임명하여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두고, 해마다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으며 신란궁(神鸞宮)을 지어 하사하였다. 그의 시종자도 〈관리로〉 수록(收錄)하여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하사하였다.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그 지역을 〈김부의〉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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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태조왕건 18년에 신라를 병합한다. 왕건이 삼국통일을 하기 1년 전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2 태조 19년 9월의 내용이다. 936년 09월 08일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2 태조 19년 9월의 원문과 번역일부이다.
神劒與其弟菁州城主良劒, 光州城主龍劒, 及文武官僚來降. 王大悅勞慰之, 命攸司虜獲百濟將士三千二百人, 並還本土, 唯昕康·富達·又奉·見達等四十人幷妻子, 送至京師. 面責能奐曰 “始與良劒等, 謀囚君父, 立其子者汝也. 爲臣之義, 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流良劒·龍劒于眞州, 尋殺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罪輕二弟, 又且歸命, 特免死賜官. 於是, 甄萱憂懣發疽, 數日卒于黃山佛舍. 王入百濟都城, 令曰 “渠魁旣已納款, 無犯我赤子.” 存問將士, 量才任用 軍令嚴明, 秋毫不犯, 州縣按堵, 老幼皆呼萬歲相慶曰 “后來其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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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이 동생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관료와 함께 항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힘써 위로하고 해당 관청[攸司]에 명하여 사로잡은 후백제의 장사(將士) 3,200인을 아울러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오직 흔강·부달(富達)·우봉·견달 등 40인만은 그들의 처자와 함께 개경(開京)으로 보내었다. 능환(能奐)을 앞에 놓고 꾸짖어 말하기를, “처음 양검 등과 더불어 임금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를 꾀한 자는 너였다. 신하된 자의 의리가 이래서야 마땅하겠는가?”라고 하자, 능환이 머리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목을 베고 양검과 용검을 진주(眞州)로 유배 보냈다가 이후에 죽였다. 신검이 왕위에 참람(僭濫)하게 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이 협박한 것으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볍고 또한 귀부(歸附)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며칠 후 황산(黃山)의 절에서 죽었다. 왕이 후백제의 도성으로 들어가 명령하기를, “큰 괴수가 항복하였으니 나의 백성을 범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 장병들을 위문하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으며 군령(軍令)을 엄격하고 밝게 하여 조금도 〈백성을〉 범하지 않게 하니, 이에 고을마다 편안해지고 늙은이나 어린이 할 것 없이 다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경사스러워하며 말하기를, “임금께서 오셨으니 우리가 다시 살아났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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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태조왕건 19년에 후백제를 병합한다. 즉, 왕건이 삼국통일을 한 때는 제위19년 때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6 최승로의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6 최승로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伏審我太祖神聖大王之御極也, 時當百六, 運協一千. 當初翦亂夷凶, 天生前主而假手, 在後膺圖受命, 人知聖德以歸心. 於是, 値金雞自滅之期, 乘丙鹿再興之運, 不離鄕井, 便作闕庭. 定遼·浿之驚波, 得秦韓之舊地, 十有九載, 統一寰瀛, 可謂功莫高矣, 德莫大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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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왕위에 오르셨으니, 그 시기는 난세[時當百六]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에 합치[運協一千] 하였습니다. 처음에 내란을 평정하시고 흉악한 무리를 정벌하실 때, 하늘이 전주(前主)를 내어 그의 손을 빌리었고, 그 뒤에 임금이 될 상서로운 조짐과 합하여[膺圖] 천명을 받아 〈왕 위에 오르시니〉 사람들이 〈태조의〉 성덕을 알고 진심으로 따랐습니다. 이에 신라[金雞]가 스스로 멸망하는 시기를 만났고, 고려[丙鹿]가 다시 일어나는 운을 타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곧 대궐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 (진한의 옛 땅을 얻은 후 19 해만에 통일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태조원년인 918년도에 진한의 옛 땅을 얻고 19 해만이다. 즉, 태조19[936]년에 통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진한은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가 아니다.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는 통일 일년 전인 태조18[935]년에 얻었다. 그러므로 태조원년에 얻은 옛 진한 땅은 왕건 당시의 신라가 아니라고 본다), 공은 매우 높으시고 덕은 매우 크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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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高麗史) 최승로 열전에선 최승로가 고려성종(成宗)에게 올린 글을 소개하고 있다. 최승로는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得秦韓之舊地, 十有九載, 統一寰瀛)라고 기재한다.
즉, 최승로는 왕건(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이 진한(秦韓)의 옛 땅(舊地)을 얻고 19 해만에 통일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태조19년에 후백제를 병합하고 통일을 했으니 이 내용은 고려사(高麗史)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선 태조왕건은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고 19 해만에 통일했다고 기재했으니 여기서 진한의 옛 땅(秦韓之舊地)을 얻은 때는 태조원년에 해당된다. 즉, 918년이다.
따라서 최승로의 글에 기재된 '진한의 옛 땅(秦韓之舊地)'은 왕건 때의 신라인 지금의 경주(慶州)가 아니다. 태조왕건이 신라를 병합한 때는 태조18년(음력 935년 12월)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장에서 진한(辰韓)의 초기 명칭인 진한(秦韓)은 왕건 때의 신라인 지금의 경주(慶州)가 아니라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으로 불리던 옛 진한(秦韓)을 지칭하는 것이며, 왕건이 태조원년에 획득한 '진한의 옛 땅(秦韓之舊地)'이란 왕건 때의 신라가 아닌 '초기 진한(秦韓)의 영토'를 뜻하는 거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其地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各有長帥大者名臣智散在山海間無城郭凡五十餘國總十萬餘户辰王治月支國魏景初中明帝宻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部從事吴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﨑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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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쪽은 왜와 닿았고 그 지방은 사방 사천리이다.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이 서쪽이 있는데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한다. 각기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라 부른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모두 오십여 개 나라이고 합해서 십만여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위나라 경초 연간에 명제(위[魏]의 2대 황제이며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204년에 출생해서 239년에 사망했다)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주고, 그 다음 지위의 자들에게는 읍장의 관직을 주어 비로소 두 군을 안정화시켰다. 부의 종사인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다스렸으므로, 진한의 여덟 개 나라를 나누어 낙랑에 주려고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의 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자, 신지들이 한나라(韓) 지역민들을 격분시켜(臣智激韓忿)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웠다.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개 군은 마침내 한을 쳐서 없앴다(滅韓, 위지[魏志]에 따르면 한국[韓國]이 멸망한 것은 204년에서 239년이 된다).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秦)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섯 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서 열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었는데, 모든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모두 4~5만 호이다. 그 열두 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는데, 항상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졌다. 토지는 비옥하고 좋다. 변진과 한은 함께 산다. 또한 성곽이 있고 의복과 사는 집은 진한과 같다. 그 중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닿아 있다. 열두 개 나라 또한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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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지(魏志)를 보면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진한(辰韓)의 조상은 진나라(秦) 출신의 망명자들이다(自言避秦役來適韓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辰韓在馬韓東).
진한(辰韓)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진한(秦韓)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今有名之為秦韓者). 따라서 진한(辰韓)은 초기에 진한(秦韓)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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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지(魏志)를 보면 진한(辰韓)의 초기 명칭은 진한(秦韓)이고 이는 진나라(秦)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망명한데서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은 우리나라 학자들의 다수 견해인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서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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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고구려 주몽이 건국한 곳은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이 바로 고려의 서경(西京)이라고 밝히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러한 역사관이 고려의 공식적인 역사관이라고 본다.
고려의 서경(西京)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한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이라고 말씀드렸었다.
따라서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이 압록강(鴨綠江) 부근의 현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이라면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한 진한(辰韓)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과 백두산 주변지역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본문과 번역이다.
髙句麗
髙句麗即卒夲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䓁”, 皆誤矣. 卒夲州在遼東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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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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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帝王韻紀)보다 불과 몇 년 먼저 쓰여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저자는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髙句麗即卒夲扶餘也.... 卒夲州在遼東界)라고 기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인 졸본(卒夲)이 요동(遼東)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쓰여질 당시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에 포함된 요하(遼河)와 압록강(鴨綠江) 사이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마한(馬韓)에 속한 지역이다. 그러니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는 진한(辰韓)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과 백두산 주변에 해당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顯慶五年命蘇定方為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自是新羅漸有髙麗百濟之地其界益大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때)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까닭, 이유)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授法敏為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垂拱二年遣使來朝天授三年〈按册府元龜作長壽二年〉政明卒立其子理洪為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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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5년(660)에 명을 내려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삼고 수구과 육군 10만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서 영을 내려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차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점령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
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수공 2년(686)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천수 3년(살펴보면, '책부원구'에는 장수 2년으로 되어 있다)에 정명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효소왕)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은 장안 2년(702)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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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들인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구당서(舊唐書)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계림(雞林)을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로 해석했음을 볼 수 있다.
위지(魏志), 후한서(後漢書), 통전(通典)에 보면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고, 통전(通典)에 보면 진한(辰韓) 위에 예맥(濊貊, 북부여[北扶餘]를 지칭한다고 해석되며 위치는 지금의 송원시[松原市]일대라고 본다)이 있다고 기재되었기에 사서의 내용에 따라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진한(辰韓)에 속한 계림(雞林)은 송원시(松原市) 아래인 길림시(吉林市)로 본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과 경주(慶州)를 기반으로 한 것은 위의 영토를 고구려와 말갈에게 잃고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발해가 이 지역의 최강자가 되기 전까진 신라는 지금의 길림시(吉林市)를 다시 확보했던 것으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 3 성종 9년 12월의 내용이다. 990년 미상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권제 3 성종 9년 12월의 원문과 번역이다.
是歲, 敎曰, “秦皇御宇, 焚三代之詩書, 漢帝應期, 闡五常之載籍. 國家草創之始, 羅代喪亡之餘, 鳥跡玄文, 燼乎原燎, 龍圖瑞牒, 委於泥途. 累朝以來, 續寫亡篇, 連書闕典. 寡人自從嗣位, 益以崇儒, 踵修曩日之所修, 繼補當年之所補. 沈隱士二萬餘卷, 寫在麟臺, 張司空三十車書, 藏在虎觀. 欲收四部之典籍, 以畜兩京之府藏. 靑衿無閱市之勞, 絳帳有執經之講. 使秦韓之舊俗, 知鄒魯之遺風, 識父慈子孝之常, 習兄友弟恭之懿. 宜令所司, 於西京開置修書院, 令諸生, 抄書史籍而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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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삼대(三代)의 시서(詩書)를 불살라버렸지만, 한제(漢帝)가 기회에 부응해 오륜(五倫)에 관한 서적을 널리 퍼뜨렸다. 우리나라가 처음 열리던 시작은 신라가 망하고 난 뒤라 글자로 기록된 문서는 모조리 화롯불에 타버리고 귀중한 문헌은 진흙탕에 내팽개쳐졌다. 〈이에〉 여러 선왕(先王) 이래로 망실(亡失)된 서적을 다시 베끼게 하고 빠진 부분은 연이어 적어 넣게 하였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 더욱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지난날 편찬하던 책은 이어서 편찬하고 당년(當年)에 보충하던 것은 계속해서 보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은사(隱士) 심약(沈約)의 책 20,000여 권은 베껴서 비서성(秘書省)에 두고, 사공(司空) 장화(張華)의 책 30수레는 백호관(白虎觀)에 보관하게 하였다. 또한 4부(部)의 전적(典籍)을 모아서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관청 창고에 쌓아두고자 한다. 이로써 학생들은 저자를 돌아보는 수고를 덜고 선생들은 강석(講席)에서 경서(經書)를 잡고 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진한(秦韓)의 옛 풍속〈에 젖은 우리나라 사람들〉으로 하여금 공맹(孔孟)의 유풍(遺風)을 알게 하고, 아비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는 법을 깨닫게 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익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하여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하게 하고,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사적(史籍)을 초록(抄錄)하여 보관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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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선 진한(辰韓)이 아닌 진한(秦韓)으로 표기한 내용이 두 번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는 이 내용이다.
진시황(秦始皇) 때 유학(儒學)의 경서를 불태운 분서갱유와 이후 한나라(漢) 때 유학(儒學)이 회복된 역사를 먼저 상기한 후 신라가 망하고 문서가 모두 불탔지만 고려가 다시 유학(儒學)을 회복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진한(秦韓)의 옛 풍속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추로(鄒魯, 공자와 맹자를 상징하는 표현이다)의 가르침을 알게 하였다고 하면서 진한(辰韓)이 아닌 진한(秦韓)으로 표기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진시황(秦始皇)의 진나라(秦)가 유학(儒學)이 융성한 나라가 아니었듯이 진나라(秦)유민으로 이루어진 진한(秦韓, 辰韓)과 그 후예인 신라는 진나라(秦)의 풍속에 따라 진한(秦韓) 이래로 유학(儒學)이 융성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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