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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강동 6주(江東六州)는 어느 지역일까? 1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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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大軍)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tóngzhōu]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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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와 조선의 학자들이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 두 나라가 충돌한 지역과 날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강조(康肇)와 거란군이 전투한 지역과 날짜는 서로 다르다고 말씀드렸었다.
요사(遼史)에선 고려사에 기재된 양규의 흥화진 전투보다 6일 전인 11월 10일에 거란은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록강(鴨淥江, 지금의 요하[遼河]라고 본다)을 건너 고려의 강조(康肇)와 전투를 벌였고 이에 밀린 강조는 동주(銅州)에서 주둔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압록강(鴨淥江)은 동주(銅州)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선 동주(銅州)는 요령성 해성시에 위치한 석목진으로 보고 있다.
즉, 요사(遼史)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은 북한과 중국 국경인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다.
북한의 압록강(鴨綠江)은 동주(銅州, 지금의 중국 석목진)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해석한 내용과 삼국유사에 기재된 내용을 보아도 압록강(鴨淥江)과 압록강(鴨綠江)은 서로 다른 강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었다.
요사(遼史)에 기재된 압록강(鴨淥江)은 지금의 요하(遼河)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銅州
遼史
銅州廣利軍刺史渤海置兵事𨽻北兵馬司統縣一析木縣本漢望平縣地初𨽻東京後來屬(국내의 '글모아'에서 출판된 남주성 번역의 만주원류고에선 初隶東京後來屬라고 기재했다. 𨽻[예]가 아닌 隶[예]로 표기했다. 初𨽻東京 or 初隶東京를 그대로 직역하면 '초기에 동경에 종속된 노예였다'로 번역된다)
明一統志
析木廢縣在海州衛東南四十里渤海花山縣遼改析木置銅州金屬澄州元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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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銅州)
'요사(遼史)'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은 자사주로서 발해에서 두었다. 군사 업무는 북병마사(北兵馬司)에 속한다. 관할 현은 석목현(析木縣) 하나이다. 본래 한(漢)의 망평현(望平縣) 땅이다. 초기에 동경(東京)에 속하다가 뒤에 내속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
폐지한 석목현(析木縣)은 해주위(海州衛) 동남 40리 거리에 있다. 발해의 화산현(花山縣)이다. 요나라에서 석목(析木)이라 고치고 동주를 두었다. 금나라 때에 징주(澄州)에 속하고 원나라에서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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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요사(遼史)'와 '명일통지(明一統志)'의 내용이다.
고려의 강조(康肇)가 주둔한 '동주(銅州)는 발해의 화산현(花山縣)이었고 요나라 초기엔 동경에 속하다가 후에 래속하였다(初𨽻東京後來屬 or 初隶東京後來屬).'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동주(銅州)는 거란에 의해 멸망한 옛 발해의 영토였고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의해 이 지역으로 이주된 여진인들이 요나라를 받들면서 거주하던 요동반도여진(숙여진[熟女眞] 서여진[西女眞])의 세력권이었지만
後來屬(후에 래속되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이후 요나라가 자국 영토로 배속시켰고 이후 요나라가 직접 지배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때 거란이 고려를 물리치고 이 지역을 직접 점령했다면,
그 이전인 고려와 거란의 제1차 전쟁 이후엔 고려가 옛 발해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들(거란에 의해 이 지역으로 이주된 여진족들을 지칭한다)을 제압하고 개척했었던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设铜州广利军刺史于析木县(今辽宁省海城市东南44里析木镇析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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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광리군자사를 석목현에 세웠다(지금의 요령성해성시동남 44리 석목진석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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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康肇)가 주둔한 동주(銅州)는 지금의 해성시 석목진(海城市 析木镇)이라고 한다.
아래는 지금의 석목진(析木镇)의 구글지도이다.
요사(遼史)의 기록과 이를 해석한 명일통지(明一統志)의 기록, 중국유기백과와 구글지도를 보면,
거란의 군대(大軍)는 지금의 요하(遼河)인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요동(遼東)에서 고려의 강조(康肇)와 먼저 전투를 벌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1010년 11월 13일(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년 기사와 번역 일부이다.
銅·霍·貴·寧等州皆降. 排押至奴古達嶺, 遇敵兵, 戰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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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동주(銅州)·곽주(霍州)·귀주(貴州)·영주(寧州)가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자 싸워서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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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보면 11월 11일 강조와 이립(이현운)이 거란에 생포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1월 13일엔 동주(銅州)가 거란에 항복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같은 날 동주(銅州) 외에 영주(寧州)도 거란에 항복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주(寧州)는 동주(銅州)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寜州
遼史
寜州觀察統和二十九年伐髙麗以渤海降户置兵事𨽻東京統軍司統縣一新安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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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寜州)
요사(遼史)
영주(寜州)는 관찰(觀察)주이다. 통화 29년(1011)에 고려를 치고 발해의 항복한 호민들로써 설치하였다. 군사 업무는 동경통군사에 속한다. 관할 현은 신안현(新安縣) 하나이다. |
영주(寜州)는 1011년 고려를 치고 얻은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화(統和) 29년(1011년) 고려를 공격해서 얻었다는 것은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이후 거란이 고려로부터 획득한 지역임을 뜻한다.
아래는 요나라(遼) 영주(寜州,宁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요나라(遼) 영주(寜州,宁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宁州,辽朝时设置州。
统和二十九年(1011年)遼國讨伐高丽,将渤海國降户,设宁州观察,治所在新安縣(今辽宁省瓦房店市西北70里永宁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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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寜州,宁州), 요나라(遼) 때에 설치한 주이다.
통화29년(1011년) 요나라는 고려를 토벌하고는, 발해의 항복한 가구로 보충했으며, 영주관찰을 설치했고, 치소는 신안현에 두었다(지금의 요령성와방점시 서북70리 영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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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중국유기백과 내용을 보면 영주(寜州,宁州)는 옛 발해국(渤海國)이었고 거란이 고려와의 제 2차 전쟁 때 거란이 고려로부터 탈취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는 아니었다.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된 후 이 지역은 거란에 의해 이주된 여진족의 소굴이었고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담판한 후(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993년] 이후) 고려가 요동반도여진의 거주지를 점령해 고려의 요새로 만든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령성 영영진(永宁镇)의 구글지도이다.
거란이 고려로부터 얻은 영주(寜州,宁州)는 이 지역이다. 강조(康肇)가 주둔한 동주(銅州)와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대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에 의해 압록강(鴨綠江) 동쪽(우리나라 학자들 주장대로라면 동쪽도 아니고 남쪽이다)을 얻어 주와 진을 실치했다는 내용은 정확한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고려사 본문을 검색해보니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명칭도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고려가 서희의 담판 이후 설치한 주와 진 등의 요새는 옛 발해영토였으며,
당시 고려와 거란의 완충지대였던 요동반도여진이 거주하던 지역을 거란의 묵인 하에 고려가 요동반도여진을 공략해 요새로 개척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吉州
遼史 吉州福昌軍刺史〈遼史不詳沿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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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吉州)
요사(遼史) 길주 복창군은 자사주이다. (요사[遼史]에는 연혁이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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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보면 길주(吉州)가 등장한다. 길주(吉州)는 고려거란전쟁에 기록된 지역은 아니다.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요사(遼史)에 길주(吉州)의 연혁이 자세하지 않다고 기재하고 있다.
아래는 요나라(遼) 길주(吉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요나라(遼) 길주(吉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본문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吉州,辽朝时设置州。
辽国设置吉州福昌军刺史,设置时间不详,不辖县。《武经总要》:“吉州,三韩古城也,契丹置兵防控新罗诸国。东石城,西南鸭绿江,东至大盐州百里,西至海。”大约在今辽宁省庄河市以东、丹东市以西一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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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 요나라 때 설치된 주이다.
요나라는 길주복창군자사(吉州福昌军刺史)를 두었는데, 설립 시기는 알 수 없고, 관할 현을 두지 않았다. : 《무경총요(武经总要)》에는 "길주(吉州), 삼한의 옛 성이며. 거란이 신라여러나라를 제어하고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 동쪽은 석성이 있으며, 서남쪽에 압록강(鸭绿江, 鴨綠江)이고, 동쪽으로 가면 커다란 소금모래사장이 백리이고, 서쪽으로 가면 바다이다."대략 지금의 요녕성 장하시에서 동쪽, 단동시에서 서쪽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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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때 저작인 무경총요(武经总要)에 보면,
'吉州,三韩古城也,契丹置兵防控新罗诸国(길주, 삼한의 옛 성이며. 거란이 신라여러나라[아마도 후삼국시대에 분열된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를 제어하고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길주(遼史)는 옛 삼한(三韩)의 고성이며 거란에서 신라여러나라(新罗诸国, 아마도 후삼국시대에 분열된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아래는 단동시(丹东市) 구글지도이다.
요나라(遼) 길주(吉州)는 지금의 단동시(丹东市)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이 거란에서 신라여러나라(아마도 후삼국시대에 분열된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이 옛 삼한(三韩)에 속한다고 한다.
즉, 삼한(三韩)은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기술하는 한반도 중남부와 남부에 걸친 나라가 아니다.
아래는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대한 위키백과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대한 위키백과 설명 일부이다.
《무경총요》(武經總要)는 중국 북송(北宋) 왕조에서 펴낸 군사 저작이다.
개요
정공량(曾公亮)와 정도(丁度) 등이 황제 인종(仁宗)의 명을 받들어 강정(康定) 원년(1040년)부터 편찬을 시작, 경력(慶歷) 4년(1044년)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완성하였다.
주제는 광범위하며, 특히 갖가지 종류의 수군 전함이나 투석기에 대한 것까지 모두 수록하였다. 또한 《무경총요》는 초석(硝石) · 유황(硫磺) · 숯(木炭) 등을 배합해 화약(火藥)을 제조하는 방법을 언급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1126년 금(金) 왕조가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시켰을 때 원본이 소실되었고, 1231년에 남송(南宋)에서 몇몇 부본(副本)을 토대로 다시 《무경총요》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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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經總要)는 중국 송나라(北宋) 때인 1040년에 편찬해서 1044년에 완성한 책이다.
송나라(北宋)의 저작이지만 요나라와 고려가 존재할 당시에 편찬된 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송나라(北宋)도 압록강(鴨綠江) 외(外)지역을 옛 삼한(三韩)의 영토라고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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