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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위화도(威化島)의 위치와 뗏목, 해병대 공기부양정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 7 내용이다. (1039년 06월 29일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 7 내용이다.
靖宗五年六月戊子 西北路大雨, 鴨江水漲, 漂失兵船七十餘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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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5년(1039) 6월 무자 서북로(西北路)에 큰 비가 내려 압록강[鴨江](고려사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 넘쳐서 병선 70여 척이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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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로(西北路)에 큰 비가 내려 압록강[鴨江](고려사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 넘쳐서 병선 70여 척이 떠내려갔다(漂失兵船七十餘艘)라고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 있다.
즉,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고려사 원문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과 다른 강이며,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압강(鴨江)은 지금의 중국 애하(璦河 Aihe River)로 보인다고 그동안 말씀드렸다.
위의 고려사 본문을 보면 압강(鴨江)은 고려의 서북로(西北路)에 속한다고 해석된다.
즉, 압강(鴨江)은 고려의 북계(北界) 내지는 서북면(西北面)에 속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만, 압강(鴨江)은 고려의 국경선 역할도 하기 때문에 압강(鴨江) 전체가 고려의 서북로(西北路)에 속했다고 보긴 힘들다.
압강(鴨江)은 고려의 국경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위의 고려사 기사처럼 압강(鴨江)에 고려의 병선 70여척(兵船七十餘艘)이 있었다고 본다.
고려 우왕 때도 고려군이 압록강(鴨綠江)에선 부교(浮橋, 배나 뗏목을 이용해서 설치한 임시 다리를 뜻한다)를 이용했고 압강(鴨江)에선 뗏목(桴)을 이용했다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압강(鴨江)은 국경이다. 따라서 강 전체를 가로지르는 부교(浮橋)와 같은 다리(橋)를 고려가 상대국을 공격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설치할 수는 없다. 고려가 부교(浮橋)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이미 적군에게 노출되어 공격받기 때문이다.
고려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때 부교(浮橋)를 설치해서 이용했다는 것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도 그 곳은 고려 땅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때는 부교(浮橋)를 설치했다고 본다.
즉, 지금의 의주(義州) 동쪽을 흐르는 압록강(鴨綠江)은 고려의 국경선이 아닌 고려의 영토 안을 흐르는 압록강(鴨綠江)이었다. (다만 의주[義州]의 서쪽을 흐르는 압록강[鴨綠江]은 고려의 국경선이다)
그에 반해 의주(義州) 북쪽을 흐르는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이자 고려 압강(鴨江)은 고려의 국경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군은 압강(鴨江)을 건널 때는 부교(浮橋)가 아닌 뗏목(桴)을 이용했다고 본다. 뗏목(桴)은 지금의 해병대 상륙정 내지는 부양정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위의 고려사에 기재된 압강(鴨江)의 병선 70여척(兵船七十餘艘) 역시 지금의 해병대 상륙정과 같은 역할을 하는 병선(兵船)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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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고려 우왕)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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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고려 우왕)가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禑次平壤....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라고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고려 우왕이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명령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때는 부교(浮橋)를 이용했다고 본다.
이를 보면 의주(義州)의 동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은 고려의 영토 안인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의 영토 안이기 때문에 상대국이나 상대국의 병사의 공격을 받지 않고 부교(浮橋)를 설치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압록강(鴨綠江) 건너에 상대국 영토가 있다면 고려는 부교(浮橋)를 설치하기 전에 압록강(鴨綠江) 건너의 상대국 병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권50 우왕 12년에 대한 내용이다.(1388년 5월 13일(음) 병술(丙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권50 우왕 12년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丙戌 左·右都統使上言, “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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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신들이 뗏목을 띄워(乘桴) 압록강(鴨江)을 건너는데(過), 앞에 큰 내가 있어 비가 와 물이 넘치니 첫 번째 여울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고, 두 번째 여울은 더 깊어서 모래톱(洲) 안에 머물러 주둔하며 헛되이 곡식만 소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요동성(遼東城)까지 그 사이에 큰 내가 여럿 있으니, 빨리 건너는 것이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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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뗏목을 띄워(乘桴) 압록강(鴨江)을 건너는데(過), 앞에 큰 내가 있어 비가 와 물이 넘치니 첫 번째 여울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고, 두 번째 여울은 더 깊어서 모래톱(洲) 안에 머물러 주둔하며 헛되이 곡식만 소비하고 있습니다...(“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라고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고려 우왕의 명령을 받은 고려군인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에 다시 뗏목(桴)을 타고 압강(鴨江)을 건너는 상황을 묘사한 고려사 본문이다.
고려사 원문에 보면 압강을 건넜다(過鴨江)로 기재되어 있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것을 보면 압록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고려사 원문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의 원문과 번역이다.
五月, 大軍渡鴨綠江, 次威化島, 亡卒絡繹於道。 禑命所在斬之, 不能止。 左、右軍都統使上言:
"臣等乘桴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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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渡)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우왕이 소재(所在)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鴨江)을 건넜으나(過),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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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大軍渡鴨綠江(대군이 압록강을 건너다)과 "臣等乘桴過鴨江("신 등이 뗏못을 타고 압강을 지나다")"라는 두 문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선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을 서로 구별해서 표기했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이 두 강을 서로 구별하지 않고 모두 압록강으로 번역했다. 이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고려사 원문과는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위의 고려사를 보면 고려군은 뗏목(桴)으로 압강(鴨江)을 지나다가 압강(鴨江) 백사장(洲)에 둔을 쳤다(留屯洲中)고 기재하고 있다.
결국,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종합하면,
고려군은 고려 영토 안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은 부교(浮橋)를 이용해서 건넜고 국경선 역할을 하는 압강(鴨江)은 뗏목(桴)을 이용해 지나다가 아직 압강(鴨江, 국경선 역할을 하던 강이다)은 건너지 않고 압강(鴨江)의 백사장(洲)에서 둔을 친(留屯) 상황이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45 내용이다.(1390년 04월 01일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45 내용이다.
卿副曹敏修以行, 軍過鴨江, 卿諭諸將, 以社稷存亡之計, 而回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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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이 조민수(曹敏修)의 부장으로 가서 군대가 압록강[鴨江]을(고려사 원문엔 압강[鴨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건너려 할 때,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의 계책으로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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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過鴨江, 卿諭諸將, 以社稷存亡之計, 而回軍(군대가 압강[鴨江, 고려사 원문엔 압강으로 표기되어 있다]을 건너려 할 때,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의 계책으로 설득하여 회군하였다)이라고 위의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엔 압강(鴨江)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고려사 원문과 다르게 번역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성계가 주둔한 백사장(洲)은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강(鴨江)에 있는 백사장(洲)이며, 압강(鴨江)은 고려의 국경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선 이 백사장(洲)을 위화도(威化島)라고 기재했다.
따라서 위화도(威化島)로 기재된 지역은 압강(鴨江)에 있는 백사장(洲)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본다.
그런데 근래에 유튜브를 보면,
위화도(威化島)는 고려 때 압강(鴨江)으로 해석되는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가 아닌 지금의 포석하(蒲石河)에 있는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교수 분이 계신다.
물론 그 교수께서 명나라와 조선의 기록을 바탕으로 말씀하시니 그 교수의 주장도 근거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백사장(洲)이나 위화도(威化島)가 압록강(鴨綠江) 중간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대부분인데 그 교수께선 압록강(鴨綠江) 건너에 위화도(威化島)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높은 성과를 올리셨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군이 압강(鴨江)을 건너지 못하고 압강(鴨江) 주변에 주둔한 백사장(洲, 위화도라고도 칭한다)은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 주변의 백사장(洲)이지 포석하(蒲石河) 주변의 백사장(洲)은 아니라고 본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로,
압강(鴨江)은 고려와 명나라의 국경선이기 때문에 조선이 들어선 이후나 그 즈음에 조선과 명나라에서 위화도(威化島)의 위치를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 주변에서 포석하(蒲石河) 주변으로 서로 합의하에 변경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압강(鴨江) 주변의 백사장(洲)은 원래 이름없는 백사장(洲)이었는데 이성계가 고려의 실권을 잡은 후 이성계 세력이 그 백사장(洲) 명칭을 포석하(蒲石河) 주변에 있는 위화도(威化島)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칭하지 않았나 의심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래에서 말씀드리겠다.
참고로 지금의 중국 포석하(蒲石河)는 고려 때 고려 서북계(西北界)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고려의 국경이 아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포석하(蒲石河)의 고려 때 명칭은 청수강(淸水江)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 권 제7의 내용이다. (1131년 07월 미상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 권 제7의 내용이다.
仁宗九年七月 女眞地群蛇, 涉鴨綠江, 入義州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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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9년(1131) 7월 여진(女眞) 지역의 뱀 떼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 경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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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眞) 지역의 뱀 떼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 경계로 들어왔다(女眞地群蛇, 涉鴨綠江, 入義州境)고 기재하고 있다.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여진(女眞)의 땅이 있다고 하니 이 여진(女眞)은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서여진(西女眞)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의주(義州)는 서여진(西女眞)을 기준으로 볼 때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치한 지역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제신 안우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제신 안우이다.
餘賊三百餘, 一日一夜, 至義州, 渡鴨江而走, 芳實·祐等追, 不及而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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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적 300여 명이 하루 밤낮 동안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원문은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다)을 건너 달아나니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다가 미치지 못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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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義州)에 이르러 압록강(원문은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다)을 건너 달아나니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다가 미치지 못하여 돌아왔다(至義州, 渡鴨江而走, 芳實·祐等追, 不及而還)라고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이 고려사 원문에서도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고려사 원문과 다르게 압록강으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올린 고려사를 보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의주(義州)가 있었는데 이 고려사를 보면 의주(義州)와 압강(鴨江) 역시 인접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홍건적이 압강(鴨江)을 건너 달아나니 고려의 이방실과 안우 등이 이들을 쫓다가 더 이상 쫓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압강(鴨江)이 고려의 국경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서여진(西女眞) 지역에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의주(義州)가 있고 다시 의주(義州) 주변에 압강(鴨江)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의주(義州) 주변에서 서로 합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는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구글지도이다.
구글지도를 보면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義州) 위에 대각선으로 압록강(鴨綠江)이 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의주(義州)에서 북쪽을 보면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가 바로 고려 때 압강(鴨江)이라고 본다.
그리고 애하(璦河 Aihe River)의 서쪽이자 의주(義州)의 왼쪽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은 서여진(西女眞)의 영역이며,
애하(璦河 Aihe River)의 동쪽이자 의주 오른쪽 압록강(鴨綠江)의 북쪽 지역은 고려의 영토라고 본다.
구글지도에 나타난 지형을 보면 여진(요동반도[遼東半島]에 근거지를 둔 서여진[西女眞]으로 해석된다)에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가 있다는 고려사 내용이나 의주(義州)에 이르러 압강(鴨江)이 있다는 고려사 내용과 부합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고려사에는 아래 도표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의주(義州) 주변에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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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강(鴨江)에 백사장(洲)이 있고 그 백사장(洲)이 위화도(威化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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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압강(鴨江)을 건너기 전 군대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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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의 내용을 볼 때 위화도(威化島)는 지금의 포석하(蒲石河)가 아닌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에 있었다고 본다.
조선과 명나라에서 이 사건 이후 위화도(威化島)가 포석하(蒲石河) 주변에 있었다는 내용의 사료와 실제 지명은 조선과 명나라 간의 사후 합의에 따른 조치라고 의심된다.
아니면 압강(鴨江, 지금의 애하[璦河]라고 본다) 주변의 백사장(洲)을 포석하(蒲石河)에 있는 위화도(威化島)라는 명칭을 사용해 조선의 학자들이 사료에 기재했을 수도 있다.
위화도(威化島)가 포석하(蒲石河)에 있으면 고려의 영토는 축소되기 때문이다.
아래는 중국 포석하(蒲石河) 구글지도이다.
포석하(蒲石河)는 애하(璦河 Aihe River)의 동쪽에 있고 의주(義州)의 동북쪽에 있는 강이다. 애하(璦河 Aihe River)처럼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다.
만일 포석하(蒲石河)에 위화도(威化島)가 있으면 고려의 영토는 그만큼 축소된다. 위화도(威化島)는 국경에 있었고 고려군은 아직 국경선을 넘기 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포석하(蒲石河)에 위화도(威化島)가 있다면 지금의 포석하(蒲石河)가 고려 때의 압강(鴨江)이라는 논리인데,
이는 고려사에 기재된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대왕에게 보낸 압강(鴨江)과 안북부(安北府, 명일통지[明一統志]를 보면 안북부[安北府]는 서경[西京]에 속한 지역으로 해석된다)의 거리를 밝힌 서신 내용과도 어긋난다.
아래는 국방부에서 제공하는 도하작전 영상이다.
고려 우왕 때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 배나 뗏목을 이용해서 설치한 임시 다리를 뜻한다 )를 설치해서 고려군이 건넌 것은 바로 이러한 스타일의 다리이다.
부교(浮橋)는 강의 건너쪽이 우리나라 영토이거나 강의 건너쪽이 적진의 영토지만 그 적을 완전히 무력화 시킨 후에 설치할 수 있는 임시다리(便橋)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의 공격으로 인해 설치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고려에서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설치했다는 것 자체가 압록강 건너편(의주[義州] 동쪽의 압록강[鴨綠江])은 고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유튜버 지식스토리에서 제작한 상륙부대의 공기부양정 영상이다.
고려사에서 고려군이 압강(鴨江)을 지날 때 뗏목(桴)을 이용한 것은 바로 압강(鴨江)이 상대국과 대치중인 고려의 국경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뗏목(桴)은 수심이 낮아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고려군이 강에서 상륙전을 행하는데 유리한 이동수단이었다고 본다.
유튜버 집나온 부식에서 제작한 뗏목을 이용한 한탄강(漢灘江) 래프팅 영상이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군이 압강(鴨江)은 뗏목(桴)을 이용해서 건넜다고 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압강(鴨江)은 수심이 얕고 물살도 빠른 여울(灘)이 있는 구간을 포함한 강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군이 사용한 뗏목(桴)은 고려의 상륙부대가 물살이 빠르고 바다보다는 수심이 얕은 강에서 사용하던 상륙정이었다고 본다.
이런 고려사의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고려군이 위화도(威化島)에서 말머리를 돌릴 때 그냥 육군의 모습인 것은 사료와 맞지가 않다. 지금의 해병대와 같은 상륙부대가 상륙공격을 앞두고 말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연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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