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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체 글 (237)
濟世安民 bagtur khan
이전에 올려드린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8'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했기 때문에 공지드립니다. 기존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한 이유는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지금의 개원시(開原市)와 철령시(鐵嶺市) 동쪽 어느 지점에서 지금의 영안시(宁安市)와 접한 남쪽지역까지 선을 그은 후 그 선의 남쪽이 고려의 영토라고 보기 때문에 이전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했습니다. 또한 길주(吉州)의 위치에 대한 제 견해도 바뀌었기 때문에 수정했습니다(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선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에서 백두산 사이의 어느 지역에 고려가 세운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봤었는데 지금은 흑룡강성 수분하시[绥芬河市] 남쪽에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봅니다). 고려가 동여진(東女眞) 내지 동번(東蕃)과 전투를 벌여 확보..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인지 의구심이 든다. 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를 거란 때의 동경(東京)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까지 올린 글에서도 그렇게 기술했지만,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지금의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은 아니며 동경(東京)에서 관할하던 동경(東京)의 속현이었고 아마도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관할하던 학야현(鶴野縣) 주변이며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와 국경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학야현(鶴野縣) 주변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거란의 중..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熙復奏曰, “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成宗曰, “久不修聘, 恐有後患.” 遂遣之. 轉平章事. 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 서희가 아뢰어 ..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十二年, 契丹來侵, 熙爲中軍使, 與侍中朴良柔·門下侍郞崔亮, 軍于北界備之. 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 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고려시대 사료 DB 遼史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db.history.go.kr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 대군(大軍)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tóngzhōu]에 주둔하였다.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와 조선의 학자들이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 두 나라가 충돌한 지역과 날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강조(康肇)와 거란군이 전투한 지..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내용이다.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转到导航 跳转到搜索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宋·許亢宗 《靖康稗史》之一種 金人既滅契丹,遂與我為敵國,依契丹例,以講和好。每歲遣使,除正旦、生辰兩zh.wikisource.org아래는 위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第二十九程:自鹹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離鹹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제..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zh.wikisource.org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遼史地理志'東京信州本粤喜故城地鄰髙麗(按此即渤海懐逺府治所據元一統志在濱州之西今開原之東葢遼時渤海衰而髙麗復興故與髙麗相近也)'金史地理志'韓州栁河縣本粤喜縣地以河為名有枸河栁河'元一統志'栁河縣故城本粤喜地後置縣以其地近栁河故名今城址猶存'요사 지리지' 동경 신주(信州)는 본래 옛 월희성(喜故城)의 땅으로서 고려(髙麗)와 이웃해 있다. (살펴보건대, 이곳이 곧 발해 회원부[懐逺府] 치소로서 '원일통지'에 따르면, 빈주[濱州]의 서쪽..
태조왕건 드라마를 보면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그리고 국사 강의하실 때 교사나 강사들의 강의를 들어보면 패서인(浿西人)은 황해도호족과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강의한다. 황해도호족은 고구려의 유민들이고 고려에서 왕건을 추대한 세력이라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강의한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도 이런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황해도면 고구려에서 평양이나 중심지역이 아닌 외곽이나 지방에 속했는데 고구려가 멸망한지 200년이 넘었어도 황해도 사람들이 고구려의 부활을 원했을까?” 그러다가 그 동안 공부한 내용이 쌓이니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명칭은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황해도출신 호족은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