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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내용이다. 한국 고대 사료 DB고구려본기 제3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본문과 번역이다.冬十月, 王幸扶餘, 杞大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69년(121)〕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성 가운데 곤궁한 자들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存問]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 흰색 매, 흰색 말 등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삼국사기 본문에 보면 숙신(肅慎)의 사신이 와서(肅愼使來)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기원 ..
이전에 올려드린 글 중에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2'와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3'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기에 공지드립니다.조선의 이성계와 친밀한 세력이 된 여진족(두만강 주변에 거주하던 세력이라고 본다)은 조선 초기 기록에 그들의 직함이 옛 금나라 관리명칭인 맹안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따라서 원나라 때도 그들의 조상은 맹안이라는 직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럴 경우 그들은 테무게 오치긴 세력이 이 지역을 분봉지로 받고 이주했을 당시 테무게 오치긴 세력과 함께 두만강 주변으로 이주했던 친원 세력 출신의 여진족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하지만 여진족에 대해서 계속 연구해보니 이들은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인 파르티잔강 주변에 거주하다 두만강 주변으로 이주한 야라나 흑수의 후..
고려 때 저술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각각 주몽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그런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장소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 고대 사료 DB권 제1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본문과 번역이다.髙句麗髙句麗即卒夲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䓁”, 皆誤矣. 卒夲州在遼東界.고구려(高句麗)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삼국유사의 저자는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고구려)의 위치가 요하(遼河) 동쪽인 요동(遼東)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
이전에 올려드린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8'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했기 때문에 공지드립니다. 기존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한 이유는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지금의 개원시(開原市)와 철령시(鐵嶺市) 동쪽 어느 지점에서 지금의 영안시(宁安市)와 접한 남쪽지역까지 선을 그은 후 그 선의 남쪽이 고려의 영토라고 보기 때문에 이전에 올려드린 글을 수정했습니다. 또한 길주(吉州)의 위치에 대한 제 견해도 바뀌었기 때문에 수정했습니다(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선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에서 백두산 사이의 어느 지역에 고려가 세운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봤었는데 지금은 흑룡강성 수분하시[绥芬河市] 남쪽에 길주[吉州]가 있었다고 봅니다). 고려가 동여진(東女眞) 내지 동번(東蕃)과 전투를 벌여 확보..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인지 의구심이 든다.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를 거란 때의 동경(東京)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까지 올린 글에서도 그렇게 기술했지만,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지금의 요양시(遼陽市)가 거란 때의 동경(東京)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은 아니며 동경(東京)에서 관할하던 동경(東京)의 속현이었고 아마도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관할하던 학야현(鶴野縣)과 그 주변이며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의 국경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학야현(鶴野縣) 주변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거란의 중요 도시..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熙復奏曰, “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成宗曰, “久不修聘, 恐有後患.” 遂遣之. 轉平章事.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db.history.go.kr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十二年, 契丹來侵, 熙爲中軍使, 與侍中朴良柔·門下侍郞崔亮, 軍于北界備之. 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實恐我也...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乙酉 1010년 11월 10일(음) 고려시대 사료 DB遼史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기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대군(大軍)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시키자, 물러나서 동주(銅州)[tóngzhōu]에 주둔하였다.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와 조선의 학자들이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 두 나라가 충돌한 지역과 날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그 한 예로 강조(康肇)와 거란군이 전투한 지역과 날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