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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모니아 왕조 7 본문

중간기와 헬레니즘

하스모니아 왕조 7

박지원( baghatur khan) 2012. 10. 3. 05:25

하스모니아 가문의 독립투쟁은종교적인 성격 외에

 

기득권 계층과 비 기득권 계층간에 투쟁이라는

정치적, 혁명적인 성격도 가미됩니다.

 

학자들은 이 독립운동 및 투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어느 한가지로만볼 수는 없고

 

여러가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윈인이

세월을 두고 누적되어 발생한 것으로보고 있습니다.

 

처음 하스모니아 가문 유다의 투쟁에는

종교적, 정치적 성격의 집단인 하시딤의동조가 있었습니다.

 

하시딤이란 유대의 헬라화에반대하는 성격을 띤

종교적으로 건한 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유다는 하시딤 외에

 

헬라화된 기득권 세력인 대제사장과

주변세력에 대해 반감을 가진 가난한 자들

지지 세력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셀류코스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지역의 비유대인, 유대북쪽의 사마리아인,

그리스화(헬라화)된 유대인, 대제사장

그리고 유대 고위층의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초기 투쟁기간인

BC168~BC164년은 게릴라 전술에 능한

하스모니아 가문의 승리로 장식했다고 합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연속적인 승리가운데

BC164년 벧술에서 치뤄진 전투는

승리를 하지못하고 결론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때 유대의 헬라화 세력과 로마의 개입으로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6개월 후에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기습공격하여 승리한 후성전을 정화시키고

희생제사를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BC163년에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망하였고

하스모니아 가문의 유다는 유대 국경 넘어서까지

적들을 유린하지만

 

예루살렘 남쪽 벧 스가랴 근처에서는

셀류코스가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셀류코스의 리시우스 사령관은

셀류코스 내의 급한 일이 있다는 전갈로

급히 귀환하여야 했기에 서둘러 조약을 체결해야 했었고

 

유대의 그리스화(헬라화)된 세력은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수용하고

유대교 금지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선에서

셀류코스 측과 합의를 보았다고 합니다.(BC162년)

 

기존의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처형되었고

새로운 대제사장 알키모스가 등장하였지만

 

알키모스 역시 정도는 약하지만 온건한 헬라파여서

보수적인 세력인 하스모니아 가문에서는

알키모스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를 보면

하스모니아 가문의 뛰어난 전술과

연속적인 승리에도 불고하고

 

유대 내에서 하스모니아 가문의 발언권과

유대 전체의 장악력은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말씀은 여기까지 드리고 다음 말씀은

다음 주 수요일에 드리겠습니다.

 

참고도서: 신약성서 배경연구(저자: 헬무트 쾨스터. 출판사: 은성)             

고대 이스라엘 (저자: 리 아이 르바인, 출판사: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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