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카를로 베르곤치
- 팔극권
- 나광옥
- 당수도
- 누가복음
- 유운초
- 장권당랑권
- 소호연
- 담퇴
- 칠성당랑권
- 연청권
- 마스다 류지
- 태극당랑권
- 마태복음
- 쥬세페 디 스테파노
- 사권
- 곽전각
- 북소림권
- 알프레도 크라우스
- 정무체육회
- 이서문
- 대한쿵후협회
- 루치아노 파바로티
- 마영도
- 황위철
- 미종권
- 팔괘장
- 중앙국술관
- 벽괘장
- 이소룡
- Today
- Total
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4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원문과 번역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할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湼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勣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傳十餘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于高麗。嘗以兵十五萬眾助高麗拒唐太宗,敗于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
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廼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
||
금의 선조는 말갈씨이다. 말갈은 본디 물길로 불렸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 원위 때 물길은 7부가 있었다. 속말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로 불렸다. 수나라는 말갈로 칭했고 7부는 동일하다. 당나라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고 그 외 5부는 듣지 못했다.
흑수말갈은 처음에 고려에 종속되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이적이 고려(고구려)를 격파하자 속말말갈은 동모산을 지켜냈다. 발해를 세우고 왕으로 불렸으며 10여세를 이었다. 문자와 예악, 관부와 제도가 있었다. 오경과 15부, 62주를 두었다.
흑수말갈은 숙신에 거했다. 동쪽은 바다와 접하고 남쪽은 고려(고구려)와 접했으며 역시 고려(고구려)에 의지해서 붙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15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도왔으나 안시에서 패배하였다. 개원 중에 당나라에 래조했고 흑수부가 설치되었으며 부장(부족장)이 도독과 자사를 했으며 장사를 설치해 감독하였다. 도독의 성은 이씨 성을 하사했고 이름은 헌성이며 흑수경략사로 임명했다.
그 후 발해는 번성하고 강력해졌으며 흑수(흑수말갈)도 발해에 속하게 되어 조공이 끊어졌다. 오대 때 거란이 발해의 영토를 취했고,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귀부해 속하게 되었다. 그 땅의 남쪽은 거란에 적했고(거란의 명부에 기록되었고) 이들은 숙여진으로 불렸다. 하지만 북쪽은 거란에 적하지 않아(거란의 명부에 기록되지 않아) 생여진으로 불렸다. 생여진의 땅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으며, 혼동강은 흑룡강으로도 불린다, 소위 '백산,흑수'이다.
금나라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왔다, 당시 나이는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내(阿古廼)는 불교를 좋아해서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후세의 후손들은 분명 모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갈 수 없다"며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오직 동생 보활리(保活里)만 함께 갔다. 시조(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완안부족(完顏部) 복간수(僕幹水)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保活里)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
여진(女真,女眞)의 나라는 금나라(金)이다. 우리나라에선 청나라(大淸)의 전신인 후금(後金)도 여진(女真,女眞)이 세운 나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이전에 올린 글에서 후금(後金)이나 청나라(大淸)는 여진(女真,女眞)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었다.
금사(金史)는 몽골의 원나라(元) 때 편찬한 금나라(金)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그런데 위의 금사(金史)에 보면 금의 선조는 말갈씨이다. 말갈은 본디 물길로 불렸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라고 기재하면서 여진(女真,女眞)이 세운 금나라의 선조를 말갈(靺鞨)만 인정한다. 말갈(靺鞨)은 원위(元魏) 때엔 물길(勿吉)로 불렸고 그 물길(勿吉)은 옛 숙신(肅慎)의 땅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숙신(肅慎)이 말갈(靺鞨)이나 물길(勿吉)의 선조라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또한 숙신(肅慎) 이후 그 지역에 등장한 읍루(挹婁)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말갈(물길)은 옛 숙신(肅慎)과 읍루(挹婁)가 활동하던 지역으로 이주한 후 원위(元魏) 때 이 지역에서 두각을 드러낸 외부세력이라고 본다.
나는 이전에 올린 글에서 사료로 확인되는 말갈(靺鞨)의 최초 거주지는 지금의 중국 승덕시(承德市)와 적봉시(赤峰市) 부근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7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大金國志
金國本名珠里真(謹按本朝舊稱滿珠所屬曰珠申與珠里真音相近但㣲有緩急之異寔皆肅慎之轉音也)後訛為女真或曰慮真肅慎氏之後渤海(另條見前)之别族也唐貞觀中靺鞨來中國始聞女真之名(按通考云五代時始稱女真據此則唐時已有是稱矣)
世居混同江之東長白山下南隣髙麗北接室韋西界渤海東瀕海三國志所謂挹婁(另條見前)元魏所謂勿吉(另條見前)唐所謂黑水靺鞨者今其地也其屬分六部有黑水契丹目為混同江(按混同即松阿哩江雖下流與黒龍江會實係二水此合為一亦誤)
|
||
대금국지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이다(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옛 이름인 만주에 소속된 것을 주신이라 불렀는데, 주리진과 발음이 비슷하다, 다만 약간의 완급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모두 숙신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그 뒤에 잘못 전해져서 여진 또는 여진으로 불렸으며, 숙신씨의 후예로서 발해(앞의 다른 조에서 기술함)의 별족이다. 당 정관 연간에 말갈이 중국에 왔으며, 이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살펴보건대, '통고'에는 "5대 때에 처음으로 여진이라 불렀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당나라 때 이미 여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대대로 혼동강의 동쪽 장백산(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청나라의 장백산이나 북한의 백두산이 아니라고 해석된다) 아래에 살았다.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북쪽으로 실위와 닿으며,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 '삼국지'의 읍루(앞의 다른 조에서 나왔다), 윈위 때의 물길(앞의 다른 조에서 나왔다) 당나라 때의 흑수말갈로 불린 곳이 지금 그 땅이다. 그에 속한 부족들이 6부로 나누어졌다. 흑수가 있으며 거란에서는 혼동강으로 보았다. (살펴보건대, 혼동은 곧 송아리강이다. 비록 아래쪽에서 흑룡강과 만나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가이다. 여기에서 둘을 합하여 하나라고 한 것은 역시 잘못이다)
|
대금국지(大金國志)는 남송(南宋) 때 저작이며 저자는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선 여진(女真,女眞)의 본명은 주리진이다(本名珠里真)라고 기재한 후 뒤에 잘못 전해져서 여진 또는 려진으로 불렸으며(後訛為女真或曰慮真)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여진(女真,女眞)은 와전된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숙신의 후예이고 발해의 별족(肅慎氏之後渤海之别族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원나라(元)에서 편찬한 금사(金史)와는 여진(女真,女眞)의 선조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금사(金史)에선 말갈(靺鞨), 물길(勿吉)만 여진(女真,女眞)의 선조로 다룬다.
여진(女真,女眞)의 거주지를 소개할 땐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북쪽으로 실위와 닿으며,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 '삼국지'의 읍루, 원위 때의 물길 당나라 때의 흑수말갈로 불린 곳이 지금 그 땅이다(南隣髙麗北接室韋西界渤海東瀕海三國志所謂挹婁元魏所謂勿吉唐所謂黑水靺鞨者今其地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여진(女真,女眞)은 당나라(唐) 초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주하던 흑룡강 주변보다는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남부의 해안가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해석된다. 발해(渤海)가 여진(女真,女眞)의 서쪽에 있다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渤海)의 동쪽이 아닌 동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여진(女真,女眞)의 본거지는 흑수말갈(黑水靺鞨)보다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해석된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고구려(高句麗) 때나 발해(渤海) 때 이들의 동북쪽인 흑룡강 주변에 거주하던 세력이었다, 고구려(高句麗) 멸망 이후 세력을 확장해서 옛 고구려(高句麗) 지역으로 진출했었고 그 과정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주(武周) 군사들과도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원래의 그들 세력권이던 흑룡강 주변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 남부 지역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확장된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분파는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던 여진(女真,女眞)과도 함께 생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부근이나 그 보다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 해안가까지가 여진(女真,女眞)의 본거지였고 그 주변 지역에 고구려(高句麗) 멸망 이후 남하한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분파도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고 본다.
아래는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후한서에 기록된 옛 숙신(肅慎)과 부여(扶餘)의 위치를 계산하면 숙신(肅慎)의 영역은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서 동쪽으론 러시아 연해주까지 미친다.
그런데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고려사(高麗史)를 검토해보면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肅慎)의 지역 중 지금의 흑룡강성 일부와 러시아 연해주 남부 바닷가까지 거주했었고
그 중에 여진(女真,女眞)은 흑수말갈(黑水靺鞨) 세력 안에서도 특정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제신 윤관(尹瓘)의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제신 윤관(尹瓘)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瓘又使林彦, 記其事, 書于英州廳壁曰, ............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 一日背畔無道, 先考深憤焉.. ..................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於是, 新置六城, 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 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 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 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 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 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 四曰吉州防禦使, 兵民六百八十丁戶. 五曰福州防禦使, 兵民六百三十二丁戶. 六曰公嶮鎭防禦使, 兵民五百三十二丁戶. 選其顯達而有賢材能堪其任者, 鎭撫之. ....................
|
||
윤관(尹瓘)이 또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쓰게 하여 말하기를, .............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도(無道)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였다. ..............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6성(城)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로,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다. 두 번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현달하여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 그 책임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선발하여 그곳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
고려사 윤관열전에선 여진(女真,女眞)이 거주하는 위치를 두 번 언급한다. 아래는 윤관열전에서 언급하는 여진(女真,女眞)에 대한 두 개의 문장이다.
여진족에 대한 첫번째 언급
|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
|
|
여진족에 대한 두번 째 언급
|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
위의 발언은 한서지리지에서 현도군(玄菟郡)에 고구려현(高句驪縣)과 서개마(西蓋馬)가 있다는 내용을 전제로 한 발언이다.
위의 고려사 기록은 고려가 갈라전(曷懶甸)에서 상대했던 세력의 중심이 바로 야라(耶懶,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여진의 3대 세력 중 하나이다)라고 밝힌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즉, 고려는 갈라전(曷懶甸)에서 동번(東蕃)이나 동여진(東女眞)과 전투를 했지만 이들의 중심은 야라(耶懶)로 봤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고려에선 이 야라(耶懶)가 후한서에 기재된 현도군(玄菟郡) 서개마(西蓋馬) 주변에 거주하던 세력이며 이들이 바로 고구려현(高句驪縣)과 잇닿은 곳에 거주한다는 말갈(靺鞨)의 후예로 여겼다고 본다.
즉, 고려는 개마산(盖馬山) 동남쪽에 거주하는 여진(야라[耶懶]를 지칭한다고 본다)이 바로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 때부터 고구려(高句麗)와 잇닿아 있는 말갈(靺鞨)이라고 인식하고 정했다고 본다.
그런데 두 번째로 언급하는 내용에다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를 대입해서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이 요하(遼河) 주변이나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다고 하면 윤관이 언급한 내용은 지리적으로 맞지가 않는다.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여진(女真,女眞)이 있다는 것은 현도군 서개마(玄菟郡 西蓋馬)에 거주하는 말갈(靺鞨)이 고구려현(高句驪縣)과 잇닿았다는 것인데, 그 여진(말갈)의 동쪽엔 대해(大海)가 있다는 문장을 대입하면 지금의 적봉시(赤峰市) 주변에 말갈(여진)이 거주하고 있고 말갈(여진)의 동쪽엔 대해(大海)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주변엔 대해(大海)가 없다.
즉, 고려는 야라(耶懶)에 거주하는 여진(女真,女眞)을 옛 현도군(玄菟郡) 서개마(西蓋馬) 부근에 거주하는 말갈(靺鞨)의 후예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인정했고 야라(耶懶)의 서북쪽에 있는 어떤 산을 개마산(盖馬山)이라고 칭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아래는 러시아 파르티잔강(빨치산강)의 구글지도 내용이다.
금사(金史)에 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函普)는 동생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고 기재하고 있다. 그 중에 동생 보활리(保活里)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 야라(耶懶)는 러시아 파르티잔강 주변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숙신의 땅(古肅慎地)은 매우 넓었고 그 중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은 현재 흑룡강과 러시아 연해주에 주로 거주했다.(사실 길림성 일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남쪽 지역도 숙신의 땅일지는 좀 의문이다. 삼한 중에 진한의 영역에 해당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의 길림성 일부와 러시아 연해주 남쪽 지역은 중국 진나라 유민과 위만조선의 유민 그리고 이 지역 토착민에 해당되는 숙신 계열[별종]들이 함께 거주하던 곳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야라(耶懶)의 위치가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주변이라고 한다면 동생 보활리(保活里)는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남부 해안가에 거주한 것이 된다.
러시아 파르티잔강은 두만강에서 동쪽이며 금사(金史)와 대금국지(大金國志)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이 지역 주변은 흑수(흑수말갈) 세력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여진(女真,女眞)은 주변의 흑수(흑수말갈)세력들과 함께 거주하면서도 연해주 해안가에서 여진(女真,女眞)의 독자성을 보이며 생활하고 있었다고 본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여진(女真,女眞)과 흑수(흑수말갈)는 같은 말갈(靺鞨)계통이지만 서로 구별된다고 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문종 35년 기록이다. 1081년 08월 05일 (음)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문종 35년 기록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八月 己未 西女眞漫豆等十七人, 挈家來投, 禮賓省奏曰, “舊制, 本國邊民, 曾被蕃賊所掠, 懷土自來者, 與宋人有才藝者外, 若黑水女眞, 竝不許入. 今漫豆亦依舊制遣還.” 禮部尙書盧旦奏曰, “漫豆等雖無知之俗, 慕義而來, 不可拒也. 宜處之山南州縣, 以爲編戶.”, 從之.
|
||
8월 기미 서여진(西女眞)의 만두(漫豆) 등 17인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으므로,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에는 우리나라의 변방 사람으로 일찍이 번적(蕃賊)에게 납치되었다가 고향을 생각하여 스스로 돌아온 자와, 송인(宋人)으로 재능이 있는 자 이외에 흑수여진(黑水女眞)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두 등도 또한 옛 규정에 의하여 돌려보내소서.”라고 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노단(盧旦)이 아뢰기를, “만두 등은 비록 무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의(義)를 사모하여 왔으니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산남(山南)의 주현(州縣)에 거처하게 하고 편호(編戶)로 삼으소서.”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
흑수여진(黑水女眞)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고려사에선 철리(鐵利), 서여진(西女眞), 흑수(黑水), 동여진(東女眞)을 구분해서 기록한다. 그런데 1081년 고려사 기록에선 흑수여진(黑水女眞)이라는 모호한 단어가 등장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숙종 8년 기록이다.1103년 07월 27일 (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숙종 8년의 원문과 번역이다.
甲辰 東女眞太師盈歌遣使來朝. 有本國醫者, 居完顔部, 善治疾. 時盈歌戚屬有疾, 盈歌謂醫曰, “汝能治此人病, 則吾當遣人歸汝鄕國.” 其人果愈, 盈歌如約, 遣人送至境上, 醫者至言于王曰, “女眞居黑水者, 部族日强, 兵益精悍.” 王乃始通使, 自是來往不阻, 盈歌旣破蕭海里, 報捷于我, 我, 復使人賀之. 盈歌遣其族弟斜葛, 報聘, 王待之甚厚.
|
||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으로 왕래하기 시작하여 이후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고 우리도 다시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영가가 그의 족제(族弟)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로 방문하니, 왕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
1103년 여진거흑수자(女眞居黑水者)라는 표현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문자그대로 흑수(흑수말갈)세력에서 거주하는 여진(女眞居黑水者)이라는 명칭이다. 1103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여진거흑수자(女眞居黑水者)는 바로 야라(耶懶)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女真,女眞)인 야라(耶懶)를 고려에선 흑수(흑수말갈)세력 안에 거주하는 여진(女眞居黑水者)이라며 흑수(흑수말갈)세력과는 구별해서 칭한 거라고 본다.
따라서 여진(女真,女眞)과 흑수(흑수말갈)세력은 모두 말갈(靺鞨)의 후예이지만 서로 구별되는 차별성을 지녔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 본문과 번역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
조선왕은 만(滿, 위만을 뜻한다)이다. 옛 연나라 사람이다. “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 진나라(秦)가 연나라(燕)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 밖 변방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漢)가 일어났지만('한나라[漢]가 진나라[秦]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으로 해석된다) 멀어서 다스리기 곤란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修) 패수(浿水)까지(至)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燕)에 속하게 하였다....
|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즉, 조선(내 개인적으론 기자조선이라고 본다)과 진번(眞番, 真畨)이라는 세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 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築)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변방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사고(師古)가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임금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 (이(李)는 땅이름이라 하고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전한서(前漢書)를 보면 위만(魏滿,衛滿)이 조선(朝鮮)에서 왕이 된 후 주변의 작은 읍락을 침범하여 항복시키자 진번(眞番, 真畨)이 위만(魏滿,衛滿)의 조선(朝鮮)에게 복속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진번(眞番, 真畨)은 조선(朝鮮) 부근에 있는 세력으로서 조선(朝鮮)에게 복속된 세력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略
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亦與朝鮮真畨不相往來....
|
위략
옛날에 우거(조선왕 위만의 손자)가 아직 패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우거가 이를 듣지 아니하자, 그가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조선의 동쪽에 진국이 있다). 이때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 호였다. 이들 또한 조선(朝鮮) 진번(真畨)과는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였다(진국은 진번과는 구별된다).
|
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을 보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과 갈등으로 조선상 역계경(朝鮮相厯谿卿)이 진국(辰國)으로 망명한 후 이들은 조선(朝鮮) 진번(真畨, 眞番)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조선(朝鮮)과 진번(真畨, 眞番)은 서로 부근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같은 노선을 유지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하북성 창려현(昌黎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이 지역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험(王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전부터 조선(朝鮮)과 함께 연나라(燕)에게 영토를 잃었었고, 위만조선(衛滿朝鮮) 땐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되었으며, 우거왕(右渠王) 이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정치적으로 같은 노선을 유지하던 것으로 보이는 진번(真畨, 眞番)은 지금의 창려현(昌黎县) 부근에 위치했었던 세력이었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 승덕시(承德市)의 구글지도이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선 여진(女真,女眞)의 본명은 주리진이다(本名珠里真)라고 기재하고 있다. 후에 와전되어서 여진(女真,慮真)으로 불렸다고 기재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바로 이 진번(眞番, 真畨)이 후에 주리진(珠里真)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진번(眞番, 真畨)의 후예가 주리진(珠里真) 내지 여진(女真,女眞)이라고 생각된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진번(眞番, 真畨)은 동호(東胡)에 속한 말갈(靺鞨)과는 같은 계통이었지만 조선(朝鮮)과 함께 연나라(燕)에게 영토를 잃은 역사를 공유했었고, 정치적으론 조선(朝鮮)에 종속된 세력이었으며 거주지 역시 말갈(靺鞨)이 거주하던 곳으로 보이는 승덕시(承德市)보다는 아래이며 하북성 당산시(唐山市)보다는 위에서 거주하던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이들은 위만조선(衛滿朝鮮) 멸망 후 어느 시기부터 말갈(靺鞨)과 함께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말갈(靺鞨)은 시대에 따라 물길(勿吉)과 말갈(靺鞨)로 불리다가 말갈(靺鞨)의 본류는 흑룡강 주변과 지금의 연해주에서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불릴 때 진번(眞番, 真畨)은 주리진(珠里真)으로 칭하며 흑수말갈(黑水靺鞨)과도 차별된 모습으로 활동했다고 보인다.
즉, 주리진(珠里真) 내지 여진(女真,女眞)은 흑수말갈(黑水靺鞨)과는 혈통적으론 같은 계통이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론 고려(高麗)에 의지하던 세력이었다고 본다.
'누르하치의 만주구룬 등장 전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3 (0) | 2024.05.04 |
---|---|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2 (2) | 2024.05.01 |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2, 3'에 대한 일부 수정 공지드립니다. (2) | 2024.04.29 |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1 (2) | 2024.04.26 |
복여위, 부여국, 고리국, 동명왕 (0) | 202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