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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3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후한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후한서 내용 중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賜鼓吹伎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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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조선을 멸했다(한무제를 지칭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 현을 설치했다,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구려현을 현도군에 배속시켰다는 뜻이다) , 사기를 북돋는 광대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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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후한서를 보면 무제는 조선을 멸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 현을 설치했다, 현도에 속하게 했다(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고구려(高句驪)는 위만조선에 속한 세력임을 볼 수 있다. 한나라(漢)는 고구려(高句驪)가 있었던 지역에 고구려현(高句驪縣)을 만들었고 이를 현도군(玄菟郡)에 소속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원문과 번역이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真·臨·樂·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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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한서(漢書)≫에는 곧 진(眞)(番)·임(臨)(屯)·낙(樂)(浪)·현(玄)(菟)의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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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선 당나라 때 인물인 배구(裵矩)가 고려는 본시 고죽국(高麗本孤竹國)이라고 밝힌 내용을 소개한다.
삼국유사에선 이 발언 외에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周以封箕子爲朝鮮)와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라는 배구(裵矩)의 발언도 인용한다.
멸망한 위만조선, 고구려(현도군 고구려현)는 옛 기자조선, 고죽국과 관련이 있는 세력임을 밝힌 거라고 본다.
아래는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喀左縣) 구산(孤山)의 구글지도이다.
1973년 조양시 객좌현(喀左縣)에서 고죽(孤竹)과 기후(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상나라(商) 때 청동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죽국(孤竹國)이 존재하던 시기와 한나라(漢) 때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이 존재하던 시기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은 지금의 요하(遼河)에서 서쪽이며 요하(遼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모본왕(慕本王)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49년의 기사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모본왕(慕本王)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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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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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는 서기 49년도에 북평(北平)을 습격(襲)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아래는 위에 기재된 북평(北平)에 대해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주석한 내용이다.
북평(北平)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우북평(右北平)으로 나온다. 우북평군은 전국 연나라가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공격하여 동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한 다음, 연(燕) 소왕(昭王) 희평(姬平) 29년(B.C. 283)에 설치했다는 5군(郡) 가운데 하나이다. 우북평군의 치소는 평강(平剛)이었는데, 네이멍구[内蒙古] 닝청현[寕城縣] 흑성고성(黑城古城)으로 비정되며, 롼허[灤河] 강 중상류의 동북방에서 라오하허[老哈河] 강 중상류의 서남방 일대를 관할했다. 진(秦)도 우북평군을 설치했지만 그 속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한(前漢)의 우북평군 치소도 평강이었고, 속현을 16개나 두었는데, 북방 흉노를 방어하는 전진기지로 관원과 군대를 파견해 주둔시켰다. 후한(後漢) 시기에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의 공격을 받아 관할구역이 롼허 강 유역으로 크게 축소되었으며, 관할 현도 4개로 줄었다(『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우북평군; 『후한서』 지23 군국5 유주 우북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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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된 북평(北平)에 대한 해설을 보면 삼국사기에선 북평(北平)으로 기재한 것과 달리, 후한서(後漢書)에선 우북평(右北平)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는 우북평(右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우북평(右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 본문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右北平郡,中國古郡名。戰國時燕國置。秦代郡治在無終縣(今天津市蓟州区)。西漢移治平剛縣(今內蒙古寧城縣甸子鎮黑城村黑城古城),隸屬于幽州刺史部。王莽時改稱北順。東漢時移治土垠縣(今河北省唐山市豐潤區東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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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右北平郡)은 고대 중국 군(郡)의 이름이다. 전국시대(戰國時) 연나라(燕國)가 설치했다. 진나라 때 군의 치소(지역의 사무를 관장하는 중심지)는 무종현(현재의 천진시 계주구)에 있었다. 서한 때는 평강현(현재의 내몽골 영성현 전자진 흑성촌 흑성고성)으로 옮겼고, 유주자사부에 예속되었다. 왕망 재위 기간(왕망의 신[新]나라 때) 동안 북순(北順)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한시대(東漢時)에 토은현(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 남동쪽)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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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을 보면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전국시대(戰國時) 때 연나라(燕)에 의해 군(郡)의 명칭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秦)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는 무종현에 있었고 현재의 천진시 계주구(蓟州区)라고 한다.
전한(서한[西漢]) 때는 평강현(현재의 내몽골 영성현 전자진 흑성촌 흑성고성)으로 치소를 옮겼으며,
후한(동한[東漢]) 때 치소는 토은현(土垠縣)으로 현재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河北省唐山市豐潤區) 동남쪽이라고 한다.
아래는 진나라(秦)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로 추정되는 계주구(蓟州区)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전한(서한[西漢])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로 추정되는 중국 내몽골(内蒙古) 영성현(寕城縣)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후한(동한[東漢])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로 추정되는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河北省唐山市豐潤區)의 구글지도이다.
위의 세 지역들이 각 나라에서 우북평군(右北平郡) 치소였다고 하니 전국시대(戰國時) 때 연나라(燕)가 공격해서 연나라(燕) 영토로 만든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의 영토는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대략 이 지역 범위 안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진나라(秦)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는 전한(서한[西漢]) 때 온조가 백제(百濟)를 시작한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원래 위만조선 이전에 존재한 조선(개인적으론 기자조선이라고 본다)의 영토였다가 기원전 283년에 연나라(燕)에게 빼앗긴 영토라고 본다.
그리고 전한(서한[西漢]) 떄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내몽골 영성현(寕城縣)은 지금의 승덕시(承德市)와 적봉시(赤峰市) 중간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전에 올린 글에서 사료로 확인되는 말갈(靺鞨)의 최초 거주지는 지금의 승덕시(承德市)와 적봉시(赤峰市)에 걸친 지역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었다.
내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기원전 6년 백제(지금의 계주구 주변으로 추정된다)의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었고,
기원전 38년 주몽의 고구려(삼국사기 저자는 현도군 고구려현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곳의 위치는 지금의 조양시 객좌현에서 요하까지의 거리 중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말갈(靺鞨)과 잇닿아 있다는 삼국사기 기록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원전 38년에서 6년까지의 기록에 등장하는 말갈(靺鞨)은 기원전 283년 연나라(燕)에게 공격을 받았던 동호(東胡)의 한 계통이라고 본다.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구당서(舊唐書) 卷199上의 내용이다.
동이(東夷)에 고려(高麗[고씨고려], 고구려), 백제(百濟), 신라(新羅), 왜국(倭國), 일본(日本)이 포함된 것을 볼 수 있다.
말갈(靺鞨, 문맥상 흑수말갈을 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과 발해(渤海)는 고구려(高句麗)보다 동쪽에 거주했지만 구당서(舊唐書)에선 이들을 동이(東夷)나 이(夷)로 표기하질 않았다.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구당서(舊唐書) 卷199下의 내용이다.
북적(北狄)에 철륵(鐵勒), 거란(契丹), 해(奚), 실위(室韦), 말갈(靺鞨, 문맥상 흑수말갈을 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발해말갈(渤海靺鞨)이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선 말갈(靺鞨)과 발해말갈(渤海靺鞨)을 동이(東夷)로 표기하지 않고 동호(東胡)의 한 계통인 거란(契丹), 실위(室韦), 해(奚)와 함께 중국의 북방민족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북적(北狄)이나 적(狄)으로 표기했다.
즉, 구당서(舊唐書)에선 말갈(靺鞨)과 발해말갈(渤海靺鞨)을 동이(東夷)나 이(夷)가 아닌 북적(北狄)이나 적(狄)에 해당되는 계통으로 구분한 것이다.
맹자(孟子)에 보면 東夷之人(동이의 사람)과 西夷之人(서이의 사람)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구당서(舊唐書)에선 북쪽의 이방인이나 외국은 狄(적)을 사용하고 동쪽의 이방인이나 외국은 夷(이)를 사용하며, 남쪽은 남만(南蠻) 내지 만(蠻)으로, 서쪽은 서융(西戎) 내지는 융(戎)으로 구분해서 기재한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과 다르게 구당서(舊唐書)에선 당나라(唐)를 중심으로 동쪽인 제1송화강 위의 실위(室韦)뿐만 아니라 제1송화강과 흑룡강, 모단강, 우수리강, 두만강 주변의 발해(渤海)와 말갈(靺鞨)도 동이(東夷)가 아닌 북적(北狄)에 포함시킨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당서(舊唐書)에 기재된 외국의 구분은 그들이 당나라(唐) 때 거주하던 지역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나 계통에 따라 구분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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