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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복여위, 부여국, 고리국, 동명왕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복여위(福余衛)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복여위(福余衛)에 대한 본문 일부와 번역한 내용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잘못될 수 있으니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福余衛,明朝兀良哈三衛之一。
洪武二十二年(1389年)置。
因地在古夫余國得名。
轄境初在今黑龍江省嫩江下游一帶,其首領是元太祖弟弟鐵木哥斡赤斤的後裔。
宣德、正統後南遷至今遼寧省遼陽、瀋陽、鐵嶺、開原等市縣一帶。
1424年,科爾沁部為瓦剌脫歡擊敗,投奔福余衛。福余衛首領由斡赤斤系轉入哈薩爾系。
16世紀中葉後為科爾沁部所吞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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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여위(福余衛), 명나라 오랑캐3위(兀良哈三衛) 중 하나이다.
홍무 22년(1389년)에 설치되었다.
옛 부여국(夫余國)을 따서 명명되었다.
(복여위[福余衛]의 복여[福余]는 옛 고대 국가인 부여국[夫餘國]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것이다. 한자로 福余와 夫餘는 서로 다른 글자이고 우리나라 발음으로도 '복여'와 '부여'로 서로 다른 발음이지만, 현재 중국어 발음으론 둘 다 fúyú로 같은 발음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어로 발음은 같은데 한자가 다른 것은 각각의 시대에 따라 fúyú라는 발음을 중국인들이 한문으로 음차할 때 선택한 한자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복여위[福余衛]가 있던 곳은 옛 부여국[夫餘國]이 있던 곳과 다르다. 옛 부여국[夫餘國]보다 북쪽에 복여위[福余衛]가 있었다. 그러면 명나라는 왜 이 몽골세력을 복여위[福余衛]라고 명명했을까? 여기에 대해선 아래에서 설명드리겠다)
관할 초기에는 흑룡강성 눈강 하류에 위치했으며 지도자는 칭기즈칸(元太祖)의 친동생인 테무게오치긴의 후손이었다.
선덕(1425~1435)과 정통(1435~1449, 1457~1464) 년간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령성 일대인 요양, 심양, 철령, 개원에 거주했었다. 1424년 호르친(科爾沁 코르친) 부족은 오이라트(瓦剌 서몽골) 토곤(脫歡, 북원의 실권자이며 마하무드[馬哈木]의 아들이고 에센[也先]의 아버지이다)에게 패배하고 복여위(福余衛)로 의탁했다.
복여위(福余衛)의 지도자는 테무게오치긴(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혈통에서 주치카사르(칭기즈칸의 첫째 동생) 혈통으로 옮겨졌다. 16세기(1500년대) 중반 이후 호르친(科爾沁 코르친) 부족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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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한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은 본문과 내가 번역한 내용이 있다.
'因地在古夫余國得名(옛 부여국[夫余國]을 따서 명명되었다).'
명나라는 자신에게 투항한 몽골부족들을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따라 명칭을 정했다.
즉, 명나라는 이들 거주지를 명나라 행정구역으로 설치했는데, 당시 복여하(福余河) 주변에 거주하던 몽골부족은 그들 거주지에 있는 복여하(福余河)의 이름을 따서 복여위(福余衛)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아래는 복여위(福余衛)가 있었다는 복여하(福余河)의 구글지도이다. 이 구글지도에선 복여하(福余河)를 오유니하(乌裕尔河)라고 표기했다. 현재 중국에선 오유니하(乌裕尔河)라고 칭하고 이 乌裕尔河라는 한자를 현재 중국어론 wūyùĕr hé 라고 발음하지만, 명나라 땐 복여하(福余河)라고 칭했으며 복여하(福余河)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fúyú hé 이다.
그런데 이 복여위(福余衛)가 있던 지역은 현재 중국의 치치하얼 부근으로서 옛 부여국(夫餘國)이 위치한 곳으로 보는 지금의 송원시 일대나 지금의 길림시 일대보다는 북쪽에 위치한다.
하지만 옛 부여국(夫餘國)을 건국한 동명왕(東明王)은 바로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명왕(東明王)은 이 복여하(福余河)가 있는 탁리국(橐離國)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탁리국(橐離國)의 왕이 동명(東明)을 죽이려고 하자 도피한 후 표수(淲水)를 건너 그 곳에서 부여국(夫餘國)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동명(東明)이 태어나고 자란 곳인 복여하가(福余河) 있던 지역을 문헌에 따라선 탁리국(橐離國), 고리국(槀離國), 색리국(索離國)으로 표기한다.
우리나라에선 동명왕(東明王)이라고 하면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주몽(朱蒙)을 연상한다. 하지만 부여국(夫餘國)을 세운 인물도 중국의 문헌에선 동명왕(東明王)으로 표기한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부여국(夫餘國)을 세운 동명왕(東明王)에 대한 설명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부여국(夫餘國)을 세운 동명왕(東明王)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잘못될 수 있으니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東明,夫餘國王。北夷索離國(《魏略》作“槀離”,王充《論衡》作“橐離”,此從《後漢書·東夷傳》)人。母為索離國王侍婢,父不詳。
索離國王出行期間,其侍婢懷孕。
王還,欲殺之。侍婢對答説:“有氣大如雞子,從天而降,我故有娠。”
後生男,王棄之豬圈,豬以氣噓之;移置於馬廄,馬以氣噓之,得不死。
王疑以為是天帝之子,乃令其母收養,賜名東明,令牧牛馬。
東明長而善射,王恐其奪國,復欲殺之。
東明遁走,“南至掩水(今松花江東流段),以弓擊水,魚鱉浮為橋。
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
剝去神話的外衣,就可以看到,東明本是索離國王的庶子,既勇敢又聰明,因受中原政權嫡長子繼承製的宗法制影響,不能在索離國存身,便來到同族的夫餘中,做了國王。
夫餘建國,當在秦漢之前,約為公元前二世紀。夫餘“本穢地也”。東明至穢地而王,國號夫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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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부여국왕. 그는 북이(北夷)의 색리국에서 태어났다( 후한서 동이전에 따르면 '위략'에는 '고리', 논형에는 '탁리'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색리국왕의 시비(하녀)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색리국왕이 행차하는 동안 그의 시비가 임신했다.
(백도백과에선 어느 문헌을 근거로 색리국왕이 출행하는 동안 시비가 임신했다고 기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논형에는 그냥 시비가 임신했다고 기재되어 있지 탁리국왕[색리국왕]이 출행했다고 기재되어 있진 않았다)
왕은 돌아와서 죽이려 했다. 시비는 "커다란 닭(or 계란)과 같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후에 아이가 태어나자 왕은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숨을 불어넣어 주었고 마구간으로 아이를 옮기니 말이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한 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키우도록 했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사한 후 소와 말을 관리하도록 명했다.
동명(東明)은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東明)이 자신의 나라를 차지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그를 다시 죽이고 싶어했다. 동명(東明)은 "멀리 남쪽으로 엄수(지금의 동쪽으로 흐르는 송화강)까지 이르러 활로 물에 부딪히니 물고기와 거북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강을 건넌 후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졌다. 따라서 추적자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로인해 부여의 도성에서 왕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옛 북이(故北夷)에는 부여국(夫餘國)이 존재한다. "
(이 문장을 읽어 보면 동명[東明]이 도망온 지역은 부여[夫餘]라는 곳이었고 동명[東明]이 이 지역에 수도를 개척하면서 이 지역은 부여국[夫餘國]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동명[東明]이 이 곳에서 처음으로 부여[夫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동명[東明]은 자신이 이주한 부여[夫餘]라는 지역을 개척해서 부여국[夫餘國]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부여[夫餘]라는 명칭은 동명[東明]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 색리국[고리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후 색리국[고리국]에 있는 fúyú[夫餘]라는 강의 이름을 따와서 fúyú[夫餘]라는 지명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화에 담긴 원래의 뜻을 해석하면 동명은 원래 색리국왕의 시비의 소생으로 용감하고 총명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중원정권의 장자세제라는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색리국에선 살지못하고 결국 같은 동족이 사는 부여지역으로 도피한 후 그 곳에서 왕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중국 백도백과에서 설명하는 내용도 기존에 부여[夫餘]라는 지역이 원래 있었고 이들은 색리국과 같은 동족이었으며 동명[東明]이 색리국의 왕을 피해 이 지역으로 도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 진나라와 한나라 이전에 국가를 세웠다. 부여는 "거칠은 곳"이다. 동명은 이 거친 곳에서 왕이 되었고 국가 이름은 부여였다.
(중국 백도백과에선 부여[夫餘]가 기원전 2세기인 진나라 이전에 국가가 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내 견해는 다르다. 아마도 기원전 2세기에 부여[夫餘]지역에 색리국에서 이주한 동족들이 거주했겠지만 동명[東明]이 이 지역으로 와서 부여국[夫餘國]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1세기인 한나라 때 아닐까 추정된다. 그 이유는 다음 글에서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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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東明王)이라는 이름은 이후 등장한 고구려의 주몽(朱蒙)도 동명왕(東明王)으로 소개되었고,
고구려 주몽(朱蒙)이 태어나고 성장한 후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는 부여의 동명왕(東明王)이 태어나고 성장한 후 부여국(夫餘國)을 세운 이야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는 등 동명왕(東明王)과 부여(夫餘)라는 명칭은 이후에 동북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준다.
백제가 후반기엔 남부여(南扶餘)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현재 우리나라에도 부여(夫餘)라는 도시가 존재한다.
아래는 한국민족대백과에서 설명하는 남부여(南扶餘)에 대한 설명이다.
아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오사국에 대한 내용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잔존세력이 세운 오사국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이다.
이 오사국은 발해의 유력 세력과 후에 올적합으로 불리게 되는 올야(원나라 때는 오자야인으로 불렸다)가 세운 나라이다.
아래는 백과사전 원문이다.
이 나라의 왕을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또는 줄여서 ‘발해염부왕’·‘발해왕’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발해인들이 지배 계층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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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가 위치한 곳을 浮渝府(부유부)로 칭했다는 것이다. 浮渝(부유)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fúyú이다.
이 나라가 위치한 곳이 옛 부여국(夫餘國)와 관련된 곳이어서 같은 발음의 한문음차표기인 浮渝(부유)를 써서 浮渝府(부유부)로 칭한 것이라고 본다
즉, 시대에 따라 부여(夫餘), 부유(浮渝), 복여(福余) 등 한자 표기는 달라도 그 한자에 대한 중국어 발음은 현재 모두 옛 부여(夫餘)의 발음인 fúyú인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고대의 부여국(夫餘國)의 발음이 현재 중국어 발음인 fúyú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부여(夫餘)라는 옛 고대국가 부여(夫餘國)에서 유래한 지역 명칭이 아직도 같은 한자표기 명칭으로 존재하듯이
이 지역에서도 옛 부여(夫餘國)에서 유래한 발음인 fúyú라는 지명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옛 탁리국(고리국, 색리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흑룡강성 치치하얼시 부유현(富裕县)의 구글지도이다. 부유현(富裕县)의 富裕(부유)도 현재 중국어론 fúyú로 발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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