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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1 본문
고려 때 저술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각각 주몽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장소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본문과 번역이다.
髙句麗
髙句麗即卒夲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䓁”, 皆誤矣. 卒夲州在遼東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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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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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저자는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고구려)의 위치가 요하(遼河) 동쪽인 요동(遼東)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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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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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에 기재된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을 학자들 대부분은 현재 요하(遼河) 동쪽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辽阳市)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는 동경(東京)의 속현이고 요나라 동경(東京)은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를 동경(東京)의 서쪽에 있었다고 보고 있으니 지금의 요양시(遼陽市)를 동경(東京)으로 본다면 요하(遼河) 주변에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요나라 동경(東京)이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다면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 역시 지금의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지역이 바로 한사군 중에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이 되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 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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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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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면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 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위의 삼국사기 본문을 보면, 기원전 37년 주몽의 고구려(高句麗)와 잇닿는 곳에 말갈(靺鞨) 부락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에선 기원전 37년에 말갈(靺鞨)이 활동한 기록은 없다. 말갈(靺鞨)은 수나라 때 등장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삼국사기에서 지칭하는 말갈(靺鞨)은 말갈(靺鞨)의 조상인 숙신(肅愼)을 뜻하는 것이고 삼국사기에서 말갈(靺鞨)이라고 표기한 것은 삼국사기 저자가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삼국사기 저자가 실수로 잘못 기재한 오기는 아니라고 본다.그 이유는 삼국사기 저자가 백제 본기에서도 비슷한 시기를 다룰 때도 말갈(靺鞨)을 계속 언급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주몽이 기존에 존재하던 고구려현(高句驪縣)에 국가로서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고구려(高句麗)는 지금의 요하(遼河) 서쪽이나 요하(遼河) 주변에 세운 국가가 된다.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을 거란의 동경(東京) 서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삼국사기에 기재된 말갈(靺鞨)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와 잇닿아 있기 때문에 주몽이 활동할 당시 요하(遼河) 서쪽이나 요하(遼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는 요하(遼河)에 대한 두산백과사전의 내용이다.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주몽이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 세운 고구려는 지도에서 보이는 요하(遼河) 주변에 있었거나 요하(遼河)의 서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 그에 따라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기재된 BC.37년 주몽의 고구려(高句麗)와 잇닿은 말갈(靺鞨)은 요하 주변이나 요하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한서 지리지 현도군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서 지리지 한사군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遼東郡(요동군)은 한사군에 포함되진 않지만 참고로 올려드린다.
遼東郡(요동군),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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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菟郡(현도군),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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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郡(낙랑군),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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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韓地)에 보면 한사군 중에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高句驪),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저자는 이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高句驪縣)에서 주몽이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도군 안에는 고구려현(高句驪縣) 외에 서개마(西蓋馬)라는 지역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제신 윤관에 내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제신 윤관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瓘又使林彦, 記其事, 書于英州廳壁曰, “孟子曰, ‘弱固不可以敵强, 小固不可以敵大.’ 吾諷斯言久矣, 而今信之矣. 女眞之於國家, 强弱衆寡, 其勢懸殊, 而窺覦邊鄙, 於肅宗十年, 乘隙構亂, 多殺我士民, 其繫縲爲奴隷者, 亦多矣. 肅宗赫然整旅, 將欲仗大義以討之, 惜乎厥功未集, 永遺弓劒. 今上嗣位, 亮陰三載, 甫畢祥禪, 謂左右曰,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 一日背畔無道, 先考深憤焉. 嘗聞古人之稱大孝者, 善繼其志耳. 朕今幸終達制, 肇覽國事, 盍擧義旗, 伐無道, 一洒先君之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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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尹瓘)이 또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쓰게 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본디 큰 적을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외운 것이 오래되었으나 지금에서야 〈이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女眞)은 우리나라보다 강함을 따지면 약하고 많은 것을 따지면 적어 그 기세가 아주 다른데, 변방을 엿보다가 숙종(肅宗) 10년(1105)에 틈을 타 난을 일으켜 우리의 사민(士民)을 많이 죽였고, 포승으로 묶어 노예로 삼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숙종께서 분노하여 군사를 모아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께서 왕위를 이어 상복을 입으신지 3년이라 이제 막 대상(大祥)과 담제(禫祭)를 마치시고 좌우에 말하기를,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도(無道)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는 큰 효도라는 것은 그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짐이 지금 다행스럽게도 달제(達制)를 마치고 국사(國事)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함을 정벌하여 아버지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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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지리지(韓地)를 보면 위만조선 멸망 후 한사군 지역에서 현도군에 속한 곳엔 고구려(高句驪)와 서개마(西蓋馬)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사 윤관 열전을 보면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에선 고려의 동북에 위치한 여진(女眞)을 본래 개마선(盖馬山) 동쪽에 있던 고구려(高句麗)의 부락이었다고 인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에선 삼국사기에 기재된 주몽의 고구려(高句麗)와 잇닿은 말갈(靺鞨)은 고려 때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거주하고 있는 여진(女眞)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의 인식은 삼국사기의 저자의 견해와 지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BC.37년에 요하(遼河) 주변이나 요하(遼河) 서쪽에 있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주몽의 고구려와 잇닿은 지역에 말갈(靺鞨)이 있었다고 기재한 건데, 고려는 고려의 동쪽에 위치한 여진(女眞)을 공격한 후 여진(女眞)은 본래 개마산(盖馬山, 내 개인적인 견해론 현도군 고구려현 부근에 위치한 서개마[西蓋馬]를 지칭한다고 본다) 동쪽에 있다고 본 것이다.
즉, BC.37년 고구려 부근에 위치한 말갈(靺鞨)과 AD.1109년 고려 동북에 위치한 여진(女眞)은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세력이며
고려가 자신들의 동쪽 어느 지역에 개마산(盖馬山)으로 부르는 산이 있었다고 해도 그 개마산(盖馬山)이 옛 한나라 현도군에 속한 서개마(西蓋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
삼국사기의 저자의 견해대로 고구려(高句麗)의 중심부가 요하(遼河) 부근이나 서쪽에 위치한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서 동쪽(압록강[鴨綠江]으로 해석된다)으로 도읍을 이동하였듯이
BC.37년 경 현도군 서개마(西蓋馬) 주변에 위치한 말갈(靺鞨)도 AD.1109년엔 고려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본다.
어느 시기에 이 지역으로 이주한지는 모르지만 고구려(高句麗) 당시 국제정세에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말갈(靺鞨)은 요하(遼河) 주변이나 요하(遼河) 서쪽에서 옛 숙신(肅愼)의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그리고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지만, BC.37년 경 말갈(靺鞨)과 숙신(肅愼)은 서로 별개의 세력이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요하(遼河, 辽河, Liaohe River)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BC.37년 말갈(靺鞨)은 요하(遼河, 辽河, Liaohe River) 주변이나 요하(遼河, 辽河, Liaohe River)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아래는 러시아 파르티잔강(빨치산강, река Партизанская, Partizanskaya River)의 구글지도 내용이다.
고려사 윤관열전에 기재된 개마산(盖馬山) 동쪽의 여진(女眞)은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바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야라(耶懒)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고려에선 갈라전(曷懶甸)에서 동여진(東女眞) 내지는 동번(東蕃)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야라(耶懒)를 여진(女眞)의 중심세력으로 봤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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