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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족의 기원과 근거지 2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본문과 번역이다.
冬十月, 王幸扶餘, 杞大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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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121)〕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성 가운데 곤궁한 자들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存問]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 흰색 매, 흰색 말 등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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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본문에 보면 숙신(肅慎)의 사신이 와서(肅愼使來)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기원 후 69년도에 말갈과는 별개로 숙신(肅慎)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漢
後漢書 夫餘國在元菟北千里地方二千里㝡為平敞以員柵為城有宫室倉庫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狗加其邑落皆主屬諸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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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한서> 부여국은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 리 떨어져 있고, 그 국토는 사방 이천 리로 매우 평탄하고 넓다. 주위에 목책을 세워서 성을 만들었다. 성 안에는 궁실과 창고가 있었다. 육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지었는데 마가, 우가, 구가가 있고, 그 도시와 마을은 모두 제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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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 보면 부여국(扶餘國)은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 리 떨어져 있고(夫餘國在元菟北千里)라고 기재되어 있다.
부여(扶餘)는 원현(고구려가 속한 현도군이라고 본다)에서 북쪽으로 천리(400km)에 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현도를 요하(遼河) 주변이나 서쪽 지역이라고 가정하면 그 지역에서 12시 30분 내지 1시 방향으로 400키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부여(扶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지금의 중국 송원시 건안현(乾安县)에 해당된다.
아래는 송원시 건안현(乾安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후한서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구글지도를 보고 거리를 계산해 보면 이 송원시 건안현(松原市 乾安县)이 후한서에서 밝힌 부여(扶餘)가 있었던 곳이다.
나는 이전에 올린 글에서 지금의 송원시(松原市)가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북부여(北扶餘)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고 올렸었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漢
後漢書古肅慎國在夫餘東北千餘里東濵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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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한서> 옛 숙신국은 부여국에서 동북쪽 쳔여 리에 있다. 동쪽은 대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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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선 옛 숙신은 부여에서 동북쪽 천여 리(400km 전후)에 있다(後漢書古肅慎國在夫餘東北千餘里)라고 기재하고 있다.
부여(扶餘)를 송원시(松原市)라고 가정하고 구글지도를 통해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면 대략 지금의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이 숙신(肅慎)이 위치한 지역에 해당된다. 그리고 동쪽은 대해이다(東濵大海)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숙신(肅慎)의 영역은 이 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연해주까지 미친다고 본다.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후한서에 기재된 내용을 검토하면 고구려가 존재할 당시 숙신(肅慎)은 이 구글지도에서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된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신(肅慎)은 이 지역에서 연해주까지 미치는 매우 넓은 영역을 소유했지만 지금의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이 숙신(肅慎)의 중심지였다고 본다.
삼국사기 저자는 말갈(靺鞨)을 요하(遼河) 주변이나 요하(遼河) 서쪽에 존재한 현도군 고구려현과 잇닿은 곳에 있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이 곳과는 지역적으로 거리가 멀다. 즉, 기원전과 기원후 어느 기간까진 말갈(靺鞨)과 숙신(肅慎)은 별개의 세력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숙신(肅慎) 이후 옛 숙신(肅慎)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읍루(挹婁)도 말갈(靺鞨)과는 별개의 세력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본문과 번역이다.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况今妖祥屢見, 國母弃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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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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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보면 백제의 온조왕은 기원전 6년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라고 발언한다.
삼국사기 저자는 기원전 37년에 이어 기원전 6년에도 말갈(靺鞨)에 대해 숙신(肅慎)과는 별개의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후한서의 내용을 검토하면 숙신(肅慎)과 말갈(靺鞨)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별개의 세력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저자는 숙신(肅慎)과 말갈(靺鞨)을 서로 구별해서 표기하는 거라고 본다.
또한 여기서 낙랑(樂浪)을 고구려 남쪽의 한반도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樂浪國)이라고 해석하면 이 내용은 현재 우리나라 학자들의 대다수 견해와 지리적으로 맞지가 않는다.
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낙랑(樂浪)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을 가리킨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한서 지리지 현도군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서 지리지 한사군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遼東郡(요동군)은 한사군에 포함되진 않지만 참고로 올려드린다.
遼東郡(요동군),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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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菟郡(현도군),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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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郡(낙랑군),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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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樂浪郡) 안에 조선(멸망한 위만조선이다)과 패수(연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다. 왕험성 서쪽에 패수가 있다고 한다)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에 기재된 기원전 6년 백제의 온조왕이 한 발언인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라는 발언은 초기 백제가 당시 멸망한 위만조선의 서쪽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에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고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와 잇닿아 있다고 기록했다.
결국, 삼국사기와 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한사군 내의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에서 나라가 시작되었고, 온조의 백제(百濟)는 한사군에 속한 낙랑군(樂浪郡)으로부터 서쪽지역에서 나라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해석하면 말갈(靺鞨)은 초기 백제(百濟)의 북쪽(낙랑군의 서북쪽에 해당된다)에서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과 맞닿는 지역까지 걸쳐있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 내용이다.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 내용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都王險。【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徐廣曰「昌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正義】臣瓚曰︰「主險在樂浪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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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은 왕험이다. 【집해(史記集解)】서광(徐廣)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색은(史記索隱)】위소(韋昭)가 이르기를 「예전의 고을 이름이다」。서광(徐廣)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신찬(臣瓚)이 이르기를「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정의(史記正義)】신찬(臣瓚)이 말하기를︰「주험(主險, 주험[主險]은 왕험[王險]이라고 해석된다)은 낙랑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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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를 주석한 서광(徐廣)은 옛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창려(昌黎)임을 주장하고 있다.
아래는 창려현(昌黎县)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서광(徐廣)은 사기(史記)를 주석하면서 옛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을 창려(昌黎)라고 주석했다. 그리고 창려(昌黎)는 지금의 창려현(昌黎县)으로 추정된다.
즉, 이 지역에 옛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 있었고 위만조선 멸망 후엔 낙랑군(樂浪郡)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서쪽으로 가면 옛 위만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패수(浿水)가 있는 것이 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温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猒丗,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欝欝如疣贅, 不如奉母氏南遊卜地, 别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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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주몽)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유리왕)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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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재된 고려와 후당, 고려와 송나라의 책봉관계에 대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는 '주몽이 지금의 압록강 주변인 요동에서 고구려를 세웠다'는 내용을 고려의 정체성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위만조선과 고구려(논란의 소지는 있다), 백제 모두 지금의 요하 서쪽에서 시작하였고 고구려의 경우는 다물 등의 고토회복이라며 역대 중국정권과 대립하다가 멸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백제도 고구려 만큼은 아니지만 결국 당나라와 신라 연합에게 멸망되었다.
따라서 왕건의 고려는 지금의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에서 기자조선, 고구려가 시작되었다는 역사관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당,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의 고구려를 거란의 동경 서쪽에서 시작한 나라로 보고 있다. 즉, 고려의 정체성과는 다른 주장을 삼국사기 저자는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 저자가 삼국사기에서 밝혔듯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근거와 정당성이 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고려 때 집필한 역사서기 때문에 최대한 고려의 정책을 따라 사서를 기록했다고 본다.
삼국사기 저자는 고구려 현도군을 요하 주변이나 요하의 서쪽으로 보면서도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게 고려의 서경(내 개인적으론 압록강 주변인 지금의 환인 만주족자치현으로 본다)으로 보는 것이 그 예라고 본다(우리나라의 대다수 학자들 견해처럼 지금 북한 평양이 왕험성이라고 해도 역시 같은 예이다).
중국의 사서를 보면 백제는 지금의 북경 주변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데 당시 고려의 정체성에 따라 삼국사기 저자 역시 백제의 시작이 한반도가 배경인 것처럼 기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증거가 지금의 인천으로 해석되는 미추홀을 삼국사기의 이 문장에 기록한 거라고 본다.
하지만 위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渡浿·帶二水)라는 문장에서 지칭하는 패수(浿水)는 옛 위만조선과 연나라(궁극적으론 한나라이다)의 경계인 패수(浿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며 지금의 중국 하북성 창려에서 서쪽에 있는 강이라고 내 개인적으론 보고 있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3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3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通考>百濟即後漢末夫餘(另條見前)王仇台之後馬韓五十四國百濟是其一也初以百家濟因號百濟後漸强大兼諸小國晉時句麗既畧有遼東百濟亦畧有遼西晉平(唐栁城北平之間)
自晉以後吞併諸國據有馬韓故地南接新羅(另條詳後)北拒髙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自晉代受藩爵自置百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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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고> 백제는 곧 후한 말 부여(앞의 다른 조 참조) 왕 구태의 후예이다. 마한 54개 국 중 백제는 그 하나이다. 초기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서 [나라를 세웠기에]백제라고 불렀다. 백제는 뒤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소국을 합쳤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였고,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사이)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후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닿고(다른 조에서 상세하게 후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은 대해를 한계로 하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진나라 이후 대대로 번국으로서의 작위를 받아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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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백제에 대한 내용인데 중국 진나라 때(晉時) 백제의 영역으로 진평(晉平)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를 주석한 청나라 학자들은 진평(晉平)이 당나라 때의 북평(北平)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래는 북평(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구글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틀릴 수 있으니 참작하시기 바란다.
明代以前,“北平”一词从未用于今北京附近地区,而是保定、天津蓟州区所拥有的名称。
明初攻占元大都以后,废除大都路,改设北平府,而永乐迁都以后北平府即改为京师顺天府。
至民国初年,“北平”一词指代北京附近地区共三十四年零五个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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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이전에는 '북평'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의 북경 근처 지역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지금의 보정과 천진 계주구에 해당되는 지명이었다.
명나라 초에 원나라 대도를 함락시킨 뒤 대도로를 폐지하고 북평주를 세웠으며, 영락이 도읍을 옮긴 후 북평주를 순천주로 바꾸었다.
중화민국 초기까지 '북평'이라는 용어는 총 34년 5개월 동안 지금의 북경 인근 지역을 지칭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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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중국유기문고의 내용을 보면 진나라 때 백제는 지금의 보정이나 계주구에 위치하고 있었다(내 개인적인 견해론 계주구[蓟州区]나 계주구에서 동쪽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재된 온조왕 때의 초기 백제는 바로 이 지역 주변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계주구(蓟州区)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삼국사기, 통고, 통고를 주석한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지역 주변에서 온조의 백제(百濟)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온조 때 백제(百濟)의 동쪽은 낙랑(樂浪, 한사군 중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고 옛 위만조선의 왕험성 부근이라고 본다)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낙랑(樂浪)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昌黎县)으로 추정된다.
백제(百濟)로 추정되는 지금의 계주구에서 동쪽은 역시 낙랑군(樂浪郡)으로 추정되는 창려현(昌黎县)이 위치하기 때문에 사기와 삼국사기 그리고 통고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이 지역이 백제(百濟)가 처음 시작한 곳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고 그 말갈(靺鞨)은 삼국사기 저자가 주장하는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과 잇닿아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으니, 말갈(靺鞨)은 지금의 승덕시(承德市)와 적봉시(赤峰市)에 걸쳐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즉, 사료로서 확인할 수 있는 말갈(靺鞨)의 최초 거주지는 지금의 중국 승덕시(承德市)와 적봉시(赤峰市)에 걸친 지역이었다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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