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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강동 6주(江東六州)는 어느 지역일까? 2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十二年, 契丹來侵, 熙爲中軍使, 與侍中朴良柔·門下侍郞崔亮, 軍于北界備之. 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
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實恐我也............
熙曰, “非也. 我國卽高勾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且鴨綠江內外, 亦我境內, 今女眞盜據其閒, 頑黠變詐, 道途梗澁, 甚於涉海. 朝聘之不通, 女眞之故也, 若令逐女眞, 還我舊地, 築城堡通道路, 則敢不修聘? 將軍如以臣言, 達之天聰, 豈不哀納?” 辭氣慷慨, 遜寧知不可强, 遂具以聞. 契丹帝曰, “高麗旣請和, 宜罷兵.” 遜寧欲宴慰, 熙曰, “本國雖無失道, 而致上國勞師遠來, 故上下皇皇, 操戈執銳, 暴露有日, 何忍宴樂?” 遜寧曰, “兩國大臣相見, 可無歡好之禮乎?” 固請, 然後許之, 極歡乃罷. 熙留契丹營七日而還, 遜寧贈以駝十首·馬百匹·羊千頭·錦綺羅紈五百匹. 成宗大喜, 出迎江頭, 卽遣良柔爲禮幣使入覲. 熙復奏曰, “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成宗曰, “久不修聘, 恐有後患.” 遂遣之. 轉平章事.
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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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12년(993)에 거란(契丹)이 침략하자,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에 군사를 주둔하고 이에 대비하였다. 성종도 친히 방어하고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까지 가서 머물렀다. .........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재위기간은 949~ 975년이다])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內外) 또한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께서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어찌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말투가 강개하여 소손녕도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보고하였다. 거란의 황제가 이르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해왔으니, 마땅히 군사 행동을 중지하라.”라고 하였다. 소손녕이 잔치를 베풀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본국이 비록 잘못한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요가 수고롭게 군대를 내어 멀리 오게 되었으니, 상하 모두가 당황하여 무기를 들은 채로 여러 날을 들판에서 지새웠으므로 어찌 차마 잔치를 열고 즐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났는데, 어찌 환호(歡好)의 예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굳이 요청하자, 마침내 〈서희가〉 수락하고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7일을 머물고 돌아가니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즉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입근(入覲)하게 하였다. 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이 행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요청하건대 강 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나서 빙례(聘禮)를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이르기를, “오래 수교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박양유를 보냈다. 〈서희는〉 평장사(平章事)로 전임되었다.
〈성종〉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냈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에 성을 쌓았고, 또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에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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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993년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끝낸 후,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이 행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쪽(江內)은 수복했으니(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라고 밝혔다.
그리고
"요청하건대 강 밖(江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나서 빙례(聘禮)를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請俟得江外, 修聘未晩).”라고 고려성종에게 밝힌다.
위의 고려사 열전 제신(諸臣) 서희(徐熙)에,
'서희가 거란 진영에 7일을 머물고 돌아가니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즉시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幣使)로 삼아 입근(入覲)하게 하였다.'라고 기재된 것을 보면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한 후 거란에서 7일을 머물러 있다가 고려에 왔었고 고려성종(成宗)이 강가에 나와 서희를 맞이하자 서희가 위와 같이 발언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희나 고려군이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따로 강 안쪽(江內)의 여진을 몰아내는 군사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이제 겨우 강의 안쪽은 수복했으니(今纔收江內)'라고 서희가 발언한 것이다.
당시 거란의 동경(東京)인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는 거란에 의해 이주된 여진이 거주했기 때문에 요동반도와 그 주변은 여진의 영역이었지 거란이 직접 점령하고 지배하던 지역은 아니었다.
즉, 거란이 직접 이 지역을 고려에게 줄 수는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만으로 강의 안쪽을 수복했다(收江內)면 그 강의 안쪽(江內)은 고려가 이미 이전부터 확보한 땅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확보하고 있는 땅을 거란과의 담판만으로 거란에 의해 고려의 땅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이전에도 고려가 '강의 안쪽(江內)'을 획득했다면 그 '강의 안쪽(江內)'은 고려가 이미 여진을 쫓아내고 고려영토로 획득한 지역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면 여기서 서희가 밝힌 강 안쪽(江內)과 강 밖(江外)은 어떤 강을 지칭하는 것일까?
서희의 발언에서 어떤 강의 안쪽(江內)과 바깥쪽(江外)인지 정확히 적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소손녕과 담판을 할 때 서희가 압록강 안팍(鴨綠江內外)을 언급하는 모습은 등장한다.
아래는 고려사에 기재된 서희의 발언이다.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內外) 또한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且鴨綠江內外, 亦我境內, 今女眞盜據其閒, 頑黠變詐, 道途梗澁, 甚於涉海. 朝聘之不通, 女眞之故也, 若令逐女眞, 還我舊地, 築城堡通道路, 則敢不修聘)?"
서희는 압록강 안팎(鴨綠江內外)이 고려 땅인데 여진이 무단 점거하고 있다고 거란의 소손녕에게 밝힌다.
즉, 압록강 안팎(鴨綠江內外)은 고려의 영토이고 고려가 소유하고 있지만 여진이 근거 없이 점유하며 고려의 소유를 방해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소손녕과 담판 이전 고려가 '압록강 외의 여진족을 백두산 외로 쫓아내어 거주시켰다(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는 고려사 991년 음력 10월 3일 기사에서도 볼 수 있다.
고려가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을 소유한 상태에서 그 곳에 무단점유하던 여진을 쫓아내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손녕과 담판하기 전에 이미 고려가 여진의 방해없이 완전히 수복했고 고려의 영토로 인식했던 '강 안쪽(江內)'은 '압록강 안쪽(鴨綠江內)'이 아니다.
즉,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은 고려가 여진의 방해를 받으면서 확보하고 있던 분쟁지역이었지 완전히 확보한 지역은 아니었다.
고려사를 보면 993년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을 마쳤을 때 고려가 여진을 쫓아내고 완전히 수복한 지역이자 '강 안쪽(江內)'은 의주 위의 압록강 북쪽 지류인 압강(鴨江)의 동쪽(東)지역이었다.
이미 소손녕과의 담판이 있기 11년 전인 982년에 고려는 '압강변의 석성을 경계(鴨江邊石城爲界)'로 할 것인지 논의를 한 기록이 고려사 지(志) 권 36 982년 음력 6월에 있기 때문이다.
즉, 서희가 밝힌 '강의 안쪽(江內)'은 982년 이후 고려가 자국의 영토로 인식한 압강(鴨江)의 안쪽(內에 해당되면 뉘앙스로 볼 때 국경 안쪽[內]에 해당되지만 위치로 보면 압강[鴨江] 동쪽[東]에 해당된다)을 뜻한다고 본다.
압강(鴨江)의 안쪽(內)은 소손녕과의 담판이 있기 11년 전에도 고려가 자국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희(徐熙)는 고려성종(成宗)에게 아래와 같이 밝힌다.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이 행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요청하건대 강 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빙례(聘禮)를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기존에 고려가 확보한 강 안쪽(江內)의 소유권을 거란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이후 강 밖(江外)까지 획득하겠다고 밝힌다.
따라서 982년 고려사에 기재된 최승로(崔承老)의 발언을 볼 때,
서희가 현재 수복한 지역이라고 칭한 강 안쪽(江內)은 압강(鴨江)의 동쪽(東)을 지칭하며,
서희가 앞으로 획득하겠다는 강 밖(江外)은 압강(鴨江)의 서쪽(西)인 요동반도여진이 활동하던 지역을 뜻한다고 본다.
이 지역은 거란에 의해 이주된 요동반도여진의 영역이었다.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요사(遼史)의 내용을 보면 요동반도여진의 영역은 거란이 간접지배하고 있을 뿐 직접지배하지는 못하던 지역으로 묘사되어있다.
여진이 활동하는 지역은 고려와 거란 간의 완충지대여서 거란이 고려에게 주고받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서희가 고려성종(成宗)에게 밝힌 '이제 겨우 강의 안쪽은 수복했으니(今纔收江內)'라는 발언은, '고려가 요동반도 여진이 활동하던 지역을 공격하고 확보해도 거란은 고려의 행위를 묵인하겠다'는 거란과의 합의를 밝힌 거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993년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인 994년과 995년 고려가 여진에게 군사행동을 한 고려사 기사이다.
'〈성종〉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냈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에 성을 쌓았고, 또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에 성을 쌓았다(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
위의 고려사 본문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고려는 군사를 일으켜 2년 동안 요동반도여진을 공략해서 주(州)와 진(鎭)을 확보한 후 그 지역에 성(城)을 쌓았다는 내용이라고 본다.
또한 그 지역은 압록강 외(鴨綠江外)이며 압강(鴨江) 서쪽(西)인 옛 발해국 지역이었다고 본다.
즉, 우리나라 학자들이 주장하는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명칭의 압록강(鴨綠江) 동쪽은 아니라고 본다. 고려사 본문엔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명칭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증거가 1010년과 1011년 고려거란의 제 2차 전쟁 때 거란이 고려를 제압하고 확보한 동주(銅州)와 영주(寜州)라고 본다.
요사(遼史)에 기재된 동주(銅州)와 영주(寜州)는 모두 옛 발해국 지역이고 요동반도에 있거나 그 부근에 위치한 지역이다. 압록강(鴨綠江) 동쪽(東)이나 남쪽(南)이 아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大金國志)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 본문과 번역이다. 남주성 박사님의 만주원류고(글모아 출판) 번역을 인용한다.
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往來謂之哈斯罕滿洲語藩籬也志云不得與本國往來寔有防閑之義舊作合蘓欵又作曷蘓館今改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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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을 합사한(哈斯罕)(만주어로 번리[藩籬 울타리 담장]이다. '지'에는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뜻이다. 이전에 합소관[合蘓欵] 또는 갈소관[曷蘓館]으로 썼던 것을 이제 고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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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遼陽)은 거란의 동경(東京)에 해당된다. 거란은 생여진을 요양(遼陽) 남쪽으로 이주시켰다.
아래는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거란은 요동반도로 강제이주시킨 여진인들을 관할하는 소주(苏州)를 위의 구글지도에 표시된 금주(金州)에 설치했고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의 경종(景宗) 5년(973) 기사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의 경종(景宗) 5년(973) 기사이다.
辛未,女直侵邊,殺都監達裏叠、拽剌斡裏魯,驅掠邊民牛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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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에(辛未), 여진(女直)이 변방(邊)을 침략했다, 도감(都監) 달리질(達裏叠)과 열랄(拽剌) 알리로(斡裏魯)를 죽이고, 변방사람들(邊民)의 소와 말을 약탈해서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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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에(辛未), 여진(女直)이 변방(邊)을 침략했다(辛未,女直侵邊),'라며 여진이 거란의 변방을 침략했다라고 기재한 것을 볼 때,
여진족들은 거란에 의해 요동반도에 이주되었지만 거란은 여진족들의 거주지를 직접 소유하진 못했다고 본다.
요사(遼史)에 '여진이 변방(邊)을 침략했다(侵)'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志) 권 36이다. 982년 6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志) 권 36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成宗元年六月 正匡崔承老上書曰, “我國家統三以來, 士卒未得安枕, 糧餉未免糜費者, 以西北隣於戎狄, 而防戍之所多也. 以馬歇灘爲界, 太祖之志也, 鴨江邊石城爲界, 大朝之所定也. 乞擇要害, 以定疆域, 選土人能射御者, 充其防戍. 又選偏將, 以統領之, 則京軍免更戍之勞, 蒭粟省飛輓之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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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원년(982) 6월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사졸(士卒)들이 아직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고 군량을 아직 많이 소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서북이 오랑캐에 인접하여 방수(防戍)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한 것은 태조(太祖)의 뜻이고, 압록강(이 문장의 원문은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변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하는 것은 대조(大朝)가 정한 바입니다. 바라건대 요해지를 선택하여 강역(疆域)으로 정하고 토착인[土人]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방수(防戍)에 충당하십시오. 또 편장(偏將)을 선발하여 이들을 통솔하고 거느리게 하면, 경군(京軍)은 교대로 방수하는 어려움을 면하고 꼴과 곡식을 운반하는 비용을 덜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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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록된 최승로의 발언(982년도의 기록)에서도 고려의 국경 중 압강(鴨江)으로 정할 것에 대해 의논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982년도면 고려거란의 제 1차 전쟁(993년) 이전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 의해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합의하기 전에도 고려는 압강(鴨江)변의 석성(石城)을 국경지로 거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마친 후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今纔收江內)'라고 발언한 것은 이제 거란에게도 압강 안쪽(鴨江內)을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았다고 밝힌 거라고 본다.
즉, 고려가 단순히 실력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거란에게도 고려의 소유로 인정받았음을 밝힌 거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3년에 대한 기사이다. 984년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3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命刑官御事李謙宜, 城鴨綠江岸, 以爲關城, 女眞以兵遏之, 虜謙宜而去, 軍潰不克城, 還者三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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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가에 성을 쌓아 관문(關門)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女眞)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돌아가니 군대가 무너져 성을 쌓지 못하였으며 돌아온 자는 셋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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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의해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이 요동반도의 대련시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984년 이들과 고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
고려사에선 압록강가(鴨綠江岸)라고만 기록되어 있지 압록강가(鴨綠江岸) 어디라고는 기록하진 않았다.
984년이면 이미 고려에선 압강(鴨江) 동쪽인 서경, 평양, 성주 등의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은 확보된 상황이고,
2년 전인 982년엔 압강(鴨江)변의 석성(石城)을 고려의 국경으로 논의하던 시기였으므로,
984년 고려와 요동반도여진이 충돌한 압록강가(鴨綠江岸)는 서해에서 의주까지의 압록강가(鴨綠江岸)로 제한된다고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음력 991년 10월 3일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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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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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북쪽(鴨綠江北)으로 기재하지 않고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으로 기재했다.
지도를 보면 숙여진(서여진)이 거주하던 요동반도 금주(金州)는 압록강 북쪽(鴨綠江北)이 아니다. 8시 방향에 가깝다.
따라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지만 압록강(鴨綠江) 북쪽(北)은 아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내용이다. 994년 2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甲午)十三年 春二月 蕭孫寧致書曰,..............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修築. 伏請, 大王預先指揮, 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踏行穩便田地, 酌量地里遠近, 幷令築城, 發遣役夫, 同時下手, 其合築城數, 早與回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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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 쌓는 공사를 착수할까 합니다. 삼가 요청하건대 〈고려의〉 대왕(大王)께서 미리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지금의 계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10km이다)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성들 사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게 하시고, 아울러 성을 쌓을 일꾼들을 보내 〈우리 측과〉 같이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며, 쌓을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 빨리 회보(回報)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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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은 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 이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의 대왕(大王)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두 문장 모두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했지만 실제 고려사 원문에는 두 개의 문장 모두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 있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서로 구분한다.
압강(鴨江)은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라고 본다.
거란의 소선녕이 993년 다음 해인 994년에 고려성종(成宗)에게 보낸 서신에 '압강 서쪽(鴨江西)에 5개의 성을 쌓는데 고려에서 일꾼을 보내 같이 시작하도록 명령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이 서신의 내용을 볼 때 993년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내용은 고려와 거란이 압강 서쪽(鴨江西)의 여진족 거주지를 함께 개척하자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성종(成宗) 15년 3월의 내용이다. 996년 3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성종(成宗) 15년 3월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咨! 爾高麗國王王治, 地臨鯷壑, 勢壓蕃隅. 繼先人之茂勳, 理君子之舊國, 文而有禮, 智以識機. 能全事大之儀, 盡協酌中之体. 鴨江西限, 曾無恃險之心, 鳳扆北瞻, 克備以時之貢. 言念忠敬, 宜示封崇, 升一品之貴階, 正獨坐之榮秩. 仍䟽王爵, 益表國恩, 冊爾爲開府儀同三司尙書令高麗國王. 於戱! 海岱之表, 汝惟獨尊, 辰卞之區, 汝惟全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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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대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는 그 땅이 메기가 사는 골짜기[鯷壑, 고려의 별칭]에 있으면서 다른 나라들[蕃隅]을 위세로 눌렀다. 선인(先人)의 뛰어난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군자(君子)의 옛 나라를 다스리니,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사대(事大)의 의례가 능히 온전하였으며 조절하는 요체(要體)가 모두 〈그를〉 도왔다.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일찍이 그 험한 지세를 믿는 마음이 없었으며, 황제가 있는[鳳扆] 북쪽을 우러러보며 때를 맞추어 조공(朝貢)을 보냈다. 그대의 충성과 공경함을 말하고 생각하자면 마땅히 높은 관작(官爵)에 봉하여 1품의 귀한 자리에 올리고 바로 홀로 앉는 영예로운 직위를 받아야 한다. 이에 국왕의 작위를 주어 더욱 나라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그대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는다.
아아!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바깥 지역에서는 오직 그대만이 홀로 존귀하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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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기사는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이후인 996년 3월에 고려성종(成宗)이 거란으로부터 책봉받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면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을 통해 거란은 고려의 서쪽 경계를 압강(鴨江西限)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압록강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 있다.
압강(鴨江)은 압록강이 아니며 압록강(鴨綠江)의 북쪽지류이고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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