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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江東六州)는 어느 지역일까? 3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熙復奏曰, “臣與遜寧約, 盪平女眞, 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 今纔收江內, 請俟得江外, 修聘未晩.” 成宗曰, “久不修聘, 恐有後患.” 遂遣之. 轉平章事.
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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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아뢰어 이르기를,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깨끗이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야 조근(朝覲)이 행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요청하건대 강 밖의 〈영토까지〉 획득하고 나서 빙례(聘禮)를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이르기를, “오래 수교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박양유를 보냈다. 〈서희는〉 평장사(平章事)로 전임되었다.
〈성종〉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냈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에 성을 쌓았고, 또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에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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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이 현재 어느 지역에 해당되는지 잘 모른다. 다만 이전에 고려사, 요사(遼史), 금사(金史), 송나라 사신의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을 서로 비교해 드리면서 언급 드릴 때 조선학자들이 관여된 기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씀드렸었다.
일단 여기에선 고려의 서희가 994년에 여진을 쫓아내고 개척한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가 정확히 현재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요사(遼史)의 내용을 보면 고려가 개척한 귀화진(歸化鎭) 내지는 곽주(郭州)로 생각되는 지역이 등장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歸州
遼史
歸州觀察太祖平渤海以降户置後廢統和二十九年伐髙麗以所俘渤海户復置兵事屬南女真湯河司統縣一歸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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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歸州)
요사(遼史)
귀주에 관찰(觀察)을 두었다. 태조(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로 해석된다)가 발해를 평정하고 항복한 호민들로써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통화 29년(1011)에 고려를 정벌하고 사로잡은 발해호로써 다시 설치하였다. 군사 업무는 남여진탕하사(南女真湯河司)에 속한다. 관할 현은 귀승현(歸勝縣)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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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한림원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선 요사(遼史)를 인용해 거란의 행정지역인 귀주(歸州)에 대해 기재하고 있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항복한 호민들로써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통화 29년(1011)에 고려를 정벌하고 사로잡은 발해호로써 다시 설치하였다(太祖平渤海以降户置後廢統和二十九年伐髙麗以所俘渤海户復置).'라고 기재한 내용을 보면 요나라(遼) 귀주(歸州)는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이후 거란이 고려로부터 획득한 지역이라고 본다.
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요사(遼史)의 내용을 보면 '관할 현은 귀승현(歸勝縣) 하나이다(統縣一歸勝縣).'라고 기재하면서 귀주(歸州)는 관할 현인 귀승현(歸勝縣)을 두고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요나라(遼) 당시 귀승현(歸勝縣)의 위치를 알면 거란이 고려와의 제 2차 전쟁 이후 고려로부터 획득 해 귀주(歸州)라는 행정구역을 만든 지역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귀승현(歸勝縣)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귀승현(歸勝縣)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하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歸勝縣
歸勝縣,遼代縣名。為遼東京道歸州附郭縣。
州、縣同治於今遼寧蓋縣熊嶽城西南之歸州城。金改縣為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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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승현
귀승현, 요나라 때 현의 명칭이다. 요나라 동경도 귀주부 곽현에 두었다.
주, 현을 함께 다스렸으며 지금의 요녕개현웅악성서남쪽 귀주성이다. 금나라 때 현을 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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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백과의 내용을 보면 요나라의 귀승현(歸勝縣)을 요나라(遼) 동경도귀주부곽현(東京道歸州附郭縣)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귀주(歸州)와 곽현(郭縣)의 명칭이 공교롭게 고려가 거란과의 제1차 전쟁 이후 서희가 여진(숙여진, 서여진)을 몰아내고 설치한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와 비슷하다.
거란이 고려와 제2차 전쟁 이후 서희에 의해 개척된 주(州)와 진(鎭)를 획득했다고 해도 옛 명칭을 사용하진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요나라(遼) 귀주(歸州)와 곽현(郭縣)은 한자명칭이 비슷한 것을 볼 때 고려의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가 아닐지 생각된다.
위의 백도백과 내용을 보면 요나라(遼) 귀승현(歸勝縣)은 지금의 요령성개현웅악성서남쪽(遼寧蓋縣熊嶽城西南)이라고 한다.
아래는 중국 요령성 웅악진(熊岳镇)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위의 구글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요나라(遼)의 귀승현(歸勝縣)인 지금의 요령성 웅악진(熊岳镇)이라고 한다.
즉, 이 지역이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이후 요나라가 고려로부터 획득해 귀주(歸州)의 귀승현(歸勝縣)이라는 행정구역을 만든 곳이라고 한다.
웅악(熊岳)이라는 명칭은 익숙한 명칭이다. 바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의 일부를 바로 지금의 웅악(熊岳)에서 금주(金州)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바로 그 지역인 웅악(熊岳)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하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哈斯罕关别名苏州关关址 ,是辽圣宗统和九年(991) 所建关隘。初建时以木栅为关。
木栅在契丹语称“哈斯罕”,故名。
位于辽东半岛南端黄海与渤海之间的狭窄地带,现地属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
历史沿革
据《宋会要辑稿·番夷》记载,辽契丹太祖天显元年(926),辽灭渤海(国),但女真部族仍与宋朝保持经济往来,并向宋朝进贡。
辽“虑女真为患”,为“分其势,使不得相通”,便强制将女真人迁到熊岳至金州一带,并在辽南置扶州(后改复州),设怀德军节度;置苏州(今金州),设安复军节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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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사한관(哈斯罕关)으로도 알려진 소주관은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건설된 요충지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목책으로 지어졌었다. 목책은 거란어로 "합사한(hāsīhǎn)"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지어졌다. 요동반도 남단, 황해(우리나라의 서해)와 발해(Bohai sea) 사이의 좁은 지역(요동반도)에 위치하며 현재 대련시 감정자구대련만가도에 속한다.
역사연혁(历史沿革)
《송회요집고:번이》에 의하면, 요나라 거란 태조 천현 원년(926년),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여진부족은 송나라와 경제적인 연관 때문에 교류를 유지하며 송나라에도 조공을 병행했다(발해국에 부속된 여진은 발해국이 거란에 멸망했으니 이후 거란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진은 송나라에게 경제적으로 연계돼 있어서 송나라에게 조공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요나라는 "여진족이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그 세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진족을 웅악에서 금주 일대까지 강제 이주시키고 아울러 요나라 남쪽에 부주(후에 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설치했다. 회덕군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다; 소주(현재의 금주)를 설치하고, 안복군 절도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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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중국백도백과의 설명을 보면
'요나라는 "여진족이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그 세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진족을 웅악에서 금주 일대까지 강제 이주시키고(便强制将女真人迁到熊岳至金州一带) 아울러 요나라 남쪽에 부주(후에 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설치했다. 회덕군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다; 소주(현재의 금주)를 설치하고, 안복군 절도사를 두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로 웅악(熊岳)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족 일부를 이주시킨 곳에 해당된다.
즉, 거란이 고려와 제2차 전쟁이후 고려로부터 획득한 귀주(歸州)와 귀승현(歸勝縣) 내지 곽현(郭縣)은 멸망한 발해 땅에 거주하던 여진족 거주지였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 지역이 고려사에 기재된 서희가 994년 여진을 쫓아내고 개척한 고려의 귀화진(歸化鎭) 내지 곽주(郭州)가 아닐까 추측된다.
아래는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거란은 이곳에 이주시킨 여진인들을 관할하는 소주(苏州)를 설치했고 이 곳에 거주하는 여진인을 거란에선 합사한(哈斯罕)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웅악진(熊岳镇)에서 금주(金州)까지가 거란에 의해 이주된 여진(숙여진, 서여진)의 근거지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년 통화(統和) 28년 기사이다. 1010년 11월 13일(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15 성종(聖宗) 6년 기사와 번역 일부이다.
銅·霍·貴·寧等州皆降. 排押至奴古達嶺, 遇敵兵, 戰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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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동주(銅州)·곽주(霍州)·귀주(貴州)·영주(寧州)가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자 싸워서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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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보면 11월 11일 강조와 이립(이현운)이 거란에 생포되었고 이틀 후인 11월 13일엔 동주(銅州)가 거란에 항복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같은 날인 11월 13일 동주(銅州) 외에 영주(寧州), 곽주(霍州), 귀주(貴州)도 거란에 항복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때 거란이 점령한 이 지역들은 서로 인접한 지역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바로 이 지역들이 고려와 거란의 제1차 전쟁 이후 994년부터 996년까지 고려가 거란의 묵인 하에 요동반도(辽东半岛)에 거주하던 여진을 제압하고 주(州)와 진(鎭)을 개척한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이 지역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이며 압강(鴨江)의 서쪽이지 압록강(鴨綠江) 남쪽이 아니다. 따라서 고려사엔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명칭은 잘못된 명칭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명칭이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銅州
遼史
銅州廣利軍刺史渤海置兵事𨽻北兵馬司統縣一析木縣本漢望平縣地初𨽻東京後來屬(국내의 '글모아'에서 출판된 남주성 번역의 만주원류고에선 初隶東京後來屬라고 기재했다. 𨽻[예]가 아닌 隶[예]로 표기했다. 初𨽻東京 or 初隶東京를 그대로 직역하면 '초기에 동경에 종속된 노예였다'로 번역된다)
明一統志
析木廢縣在海州衛東南四十里渤海花山縣遼改析木置銅州金屬澄州元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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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銅州)
'요사(遼史)'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은 자사주로서 발해에서 두었다. 군사 업무는 북병마사(北兵馬司)에 속한다. 관할 현은 석목현(析木縣) 하나이다. 본래 한(漢)의 망평현(望平縣) 땅이다. 초기에 동경(東京)에 속하다가 뒤에 내속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
폐지한 석목현(析木縣)은 해주위(海州衛) 동남 40리 거리에 있다. 발해의 화산현(花山縣)이다. 요나라에서 석목(析木)이라 고치고 동주를 두었다. 금나라 때에 징주(澄州)에 속하고 원나라에서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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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요사(遼史)에 '동주(銅州) 광리군(廣利軍)은 자사주로서 발해에서 두었다(銅州廣利軍刺史渤海置).'라고 기재한 것을 보면
동주(銅州)는 거란에 의해 멸망한 옛 발해의 영토였고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의해 요동반도(辽东半岛)로 이주된 여진인들이 요나라를 받들면서 거주하던 여진(숙여진, 서여진)의 세력권이었지만,
後來屬(후에 래속되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이후 거란이 자국 영토로 배속시켰고 이후 거란이 직접 지배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동주(铜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设铜州广利军刺史于析木县(今辽宁省海城市东南44里析木镇析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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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광리군자사를 석목현에 세웠다(지금의 요령성해성시동남 44리 석목진석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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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기재된 동주(銅州)는 지금의 해성시 석목진(海城市 析木镇)이라고 한다.
아래는 지금의 석목진(析木镇)의 구글지도이다.
요사(遼史)의 기록과 이를 해석한 명일통지(明一統志)의 기록, 중국유기백과, 구글지도를 보면, 거란이 고려로부터 획득한 동주(銅州)는 압록강(鴨淥江) 북쪽이며 압강(鴨江)의 서쪽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11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寜州
遼史
寜州觀察統和二十九年伐髙麗以渤海降户置兵事𨽻東京統軍司統縣一新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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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寜州)
요사(遼史)
영주(寜州)는 관찰(觀察)주이다. 통화 29년(1011)에 고려를 치고 발해의 항복한 호민들로써 설치하였다. 군사 업무는 동경통군사에 속한다. 관할 현은 신안현(新安縣)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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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선 요사(遼史)를 인용해 영주(寜州)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통화(統和) 29년(1011년) 고려를 공격해서 얻었다는 것은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이후 거란이 고려로부터 획득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요나라(遼) 영주(寜州,宁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요나라(遼) 영주(寜州,宁州)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宁州,辽朝时设置州。
统和二十九年(1011年)遼國讨伐高丽,将渤海國降户,设宁州观察,治所在新安縣(今辽宁省瓦房店市西北70里永宁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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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寜州,宁州), 요나라(遼) 때에 설치한 주이다.
통화29년(1011년) 요나라는 고려를 토벌하고는, 발해의 항복한 가구로 보충했으며, 영주관찰을 설치했고, 치소는 신안현에 두었다(지금의 요령성와방점시 서북70리 영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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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중국유기백과 내용을 보면 영주(寜州,宁州)는 지금의 요령성와방점시 서북70리 영영진(辽宁省瓦房店市西北70里永宁镇)이라고 한다.
요령성 영영진(永宁镇)의 구글지도이다.
이곳에 요사(遼史)에 기재된 영주(寜州,宁州)라고 한다. 요사(遼史)에 기재된 동주(銅州)에서 멀지 않으며 동주(銅州)처럼 압록강(鴨淥江) 북쪽이고 압강(鴨江)의 서쪽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갈소관(曷苏馆) 에 대한 중국 한어사전내용이다.
아래는 갈소관(曷苏馆) 에 대한 중국 한어사전내용의 원문과 번역이다.
曷苏馆
路名。又作遏速馆、合思罕、合苏款、苏馆。金置。治所在今辽宁复县西北。辖境相当今辽东半岛中部地区。明昌四年(1193年)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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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소관(hésūguăn)
도로 이름이다. 또한 알속관(èsùguǎn), 합사한(hésīhǎn), 합소관(hésūkuǎn), 소관(sūguăn)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나라에서 설치했다. 행정을 총괄하는 지역은 현재 요녕성 복현 북서쪽에 위치했었다. 관할 지역은 대략 지금의 요동반도의 중부지역에 해당된다. 명창 4년(1193 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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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의해 합사한(哈斯罕 hésīhǎn)을 칭하던 지역은 금나라 때엔 갈소관(曷苏馆 hésūguăn)으로 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에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며 거란어의 음차표기인 합사한(哈斯罕 hésīhǎn)을 여진어로 발음한 후 그 여진어발음을 한문으로 음차표기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요녕복현(辽宁复县)으로 추정되는 복주성진(复州城镇)구글지도이다.
금나라 때 갈소관(曷苏馆 hésūguăn) 행정을 총괄하는 지역인 지금의 요녕성 복현 복주성진(辽宁复县复州城镇)이다.
나는 그동안 고려사에 기재된 내용을 근거로
고려와 거란의 서쪽 국경은 서해에서 의주까지는 압록강(鴨綠江), 의주에서는 요동(辽东) 어느지역까진 압강(鴨江), 압강(鴨江)의 어느지역에서 지금의 요양 부근인 천황학주의 성까지가 고려와 거란의 서쪽 국경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청나라 한림원이 편찬한 만주원류고 역시 요사와 금사, 봉사행정록 등을 검토한 후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와 거란의 국경과는 별개로,
고려는 여진(숙여진, 서여진)이 활동하던 요동반도(辽东半岛)의 남쪽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확보했었다고 보인다. 즉, 요동반도(辽东半岛)의 남쪽은 거란과 별개로 고려가 여진을 공략해서 고려의 영토로 확보한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고려사 음력 991년 10월 3일 기사에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라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선 압록강 북쪽(鴨綠江北)으로 기재하지 않고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으로 기재했다.
숙여진(서여진)이 거주하던 요동반도(辽东半岛) 금주(金州)는 압록강 북쪽(鴨綠江北)이 아닌 압록강(鴨綠江)에서 8시 방향이다. 즉, 압록강(鴨綠江)은 건너지만 압록강(鴨綠江) 북쪽(北)은 아니다.
따라서 991년에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에 해당되는 요동반도(辽东半岛) 남쪽의 숙여진(서여진)을 백두산 바깥(白頭山外)으로 고려가 강제이주시켰다면, 고려는 여진족이 활동하던 요동반도(辽东半岛) 중에 남쪽지역은 고려의 영역으로 확보했다고 해석된다.
고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고려 임의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숙여진(서여진)을 백두산 바깥(白頭山外)으로 강제이주시켰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음력 991년 10월 3일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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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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