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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 거란, 고려 금나라 국경 그리고 해성(海城)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第二十九程:自鹹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
離鹹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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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일 일정 : 함주(鹹州)에서 숙주(肅州)까지 40리, 다시 동주(同州)까지 50리.
함주(鹹州[咸州] 현재 개원시[開原市]이다)를 떠나 즉시 북쪽으로 갔는데, 주는 평탄한 땅이며 , 주민들은 일정지역에 거주하며 취락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곡식이 두루 미치며 땅은 기장을 심기에 적합했다. 동쪽에 천산(天山)이 보이는데 금나라 사람들은 이를 신라산(新羅山)으로 칭한다. 산의 내부는 깊고 멀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다. 그 곳엔 인삼, 백부자가 나오며, 깊은 곳에 고려(高麗)와 경계를 접하는 곳이 있다. 산아래에서 길까지 가려면 30리를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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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은 1125년 송나라 사신 허황종이 금나라에 다녀오면서 그 주변을 기록한 금나라 방문기내지는 여행기이다.
즉,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와 같이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가 중국의 정식 역사서로 인정한 24개의 정사(正史)인 24사(二十四史)는 아니지만 송나라의 사신이 금나라를 다녀오면서 직접 방문한 곳을 기록한 글이기에 신뢰성이 높다.
따라서 청나라 건륭제(大淸 乾隆帝)때 편찬된 만주원류고도 이 방문기를 24사(二十四史)와 함께 역사적 근거로 제시하면서 인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송나라 사신 허황종은 금나라에 다녀오면서 함주(鹹州[咸州])를 지나갔고 함주(鹹州[咸州] 현재 개원시[開原市]이다)북쪽에서 동쪽을 보면 천산(天山)이 있는데 금나라 사람들은 천산(天山)을 신라산(新羅山)으로 칭했다고 방문기에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은 신라산(新羅山) 깊은 곳이 금나라와 고려의 국경이라고 기재했다.
(鹹州[咸州]는 현재 개원[開原]이고, 함주 북쪽은 현재 개원과 철령 중간지역이다. 그 곳에서 동쪽엔 신라산이 있고 그 산은 금나라와 고려의 국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허황종이 기록한 지금의 개원시와 철령시 중간에서 동쪽은 요나라 때에도 거란과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요사(遼史)에서 기재한 곳이다.
즉, 거란의 요나라가 멸망하고 요나라 지역을 금나라가 차지했어도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은 요나라 때와 비슷하거나 같았다는 것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4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4의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나 ( )안의 카키색 글씨는 남주성 박사님의 해설이고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奉使行程錄所云自咸州至同州(今開原鐵嶺界)東望大山即新羅界遼志所云海州(即今海城始屬百濟後為髙麗所分復入渤海又歸于遼)東界新羅是也唐顯慶乾封以後百濟髙麗之地多入新羅東西增九百里南北增千餘里幅員益廣
而唐人篇什往往以海外稱者葢西北為渤海契丹所隔必浮海往來始達其南境故耳洎開元元和之際渤海愈盛鴨綠江以北皆為渤海所有遼志所謂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開置郡邑是也
後唐清泰末髙麗復起王建襲據新羅邊邑建都松岳元史所謂在鴨淥江東千餘里非平壤之舊者是也于是新羅所有僅海城以東及朝鮮數道非復唐時之境而自五代至遼傳國依然不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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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행정록'에는 "함주[咸州: 현 개원]로부터 동주(현 개원과 철령경계)에 이르고, 동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였으며 곧 신라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요지'에서 "해주(현 해성[海城]으로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다시 발해에 합쳐졌고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의 동쪽 경계는 신라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당 현경 연간(656~661)과 건봉 연간(666~668)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 많이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동서로 구백 리가 더하였고 남북으로 천여 리가 더하여져서 폭과 둘레가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당나라 사람의 글에서 왕왕 해외에 관해서 말한 것을 보면, 대개 서북쪽이 발해 거란에 막혀 있어서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그 남쪽 경계에 도착하였다고 한 것이다.
개원 연간(713~741)과 원화 연간(806~820) 무렵에 발해가 점차 강성해져서 압록강(鴨綠江)이북이 모두 발해의 소유가 되었는바, '요지(遼志)'에서 "발해왕 대인수[大仁秀 : 선왕]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과 읍을 설치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당 청태(934~936년) 연간 말에 고구려(고구려가 아니라 왕건의 고려를 뜻한다)가 다시 일어났으니, 왕건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쳐서 점령하고 송악에 도읍을 세웠다. '원사'에 "압록강(鴨淥江) 동쪽 천여리에 있는 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고려)는 겨우 해성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당나라 때의 지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오대 이후 요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이어서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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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도표는 만주원류고 권4의 편찬자인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이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한 후 이를 주석한 내용이다.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
함주[咸州: 현 개원]로부터 동주(同州)에 이르고, 동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였으며 곧 신라의 경계이다(自咸州至同州東望大山即新羅界)
만주원류고 편찬자의 주석
동주(同州)는 현 개원과 철령경계이다(今開原鐵嶺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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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서 근거로 제시한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은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을 가리킨다.
만주원류고에선 봉사행정록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약간 다르게 인용했는데, 천산(天山)은 신라산이며 고려의 국경이 있다는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의 기록을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천산(天山)이 아닌 대산(大山)이 신라의 경계라고 기재했다.
또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서는 신라산(新羅山) 깊은 곳이 고려와 인접한 곳(高麗接界)이라고 기재했는데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 그대로 고려와 인접한 곳(高麗接界)이라고 인용하지 않고 신라의 경계(新羅界)라고 기재하면서 고려를 신라로 바꾸어 기재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드리겠다.
만주원류고를 편찬한 한림원은 동주(同州)는 지금의 개원과 철령의 경계라고 주석했다.
즉,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은 동주(同州)동쪽에 고려와 금나라 국경이 있다고 기재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 개원시(開原市)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철령시(鐵嶺市) 구글지도이다.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서는 개원시와 철령시 사이에서 동쪽에 신라산이 있으며 그 신라산의 깊은 곳이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두 지도를 보면 대략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9의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요사 지리지(遼史地理志)
동경 신주(信州)는 본래 옛 월희성(喜故城)의 땅으로서 고려(髙麗)와 이웃해 있다(東京信州本粤喜故城地鄰髙麗).
만주원류고 편찬자의 주석
살펴보건대, 이곳[東京信州]이 곧 발해 회원부(懐逺府) 치소로서 '원일통지'에 따르면, 빈주(濱州)의 서쪽으로 지금의 개원(開原) 동쪽이다. 대체로 요나라 때 발해가 쇠약해지고, 고려가 다시 일어나면서 고려와 서로 가깝게 되었다(按此即渤海懐逺府治所據元一統志在濱州之西今開原之東葢遼時渤海衰而髙麗復興故與髙麗相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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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를 보면 거란의 '동경 신주는 고려와 이웃해 있다(東京信州...鄰髙麗).'라고 기재했고,
이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를 주석한 청나라 한림원은 동경 신주(東京信州)를 '지금의 개원[開原] 동쪽이다(今開原之東).'라고 주석했다.
아래는 중국 개원시(開原市) 구글지도이다.
요사(遼史)와 이를 주석한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거란의 요나라 때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지금 개원시 동쪽 지역과 인접해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금나라 때도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개원시와 철령시 사이에서 동쪽에 있었다고 금나라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허황종이 자신의 여행기인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 기재했다.
즉,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바뀌었지만 이들 나라와 고려의 국경은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4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 권4의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아래의 도표는 만주원류고 권 4의 편찬자인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이 요지(遼志)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해 기재한 후 이를 주석한 내용이다.
요지(遼志)
해주(海州)의 동쪽 경계는 신라이다(海州東界新羅)
만주원류고 편찬자의 주석
해주(海州)는 현 해성(海城)으로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다시 발해에 합쳐졌고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即今海城始屬百濟後為髙麗所分復入渤海又歸于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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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나라 해성(海城)은 지금 중화인민공화국 해성시(海城市)이다.
그런데 나는 요지(遼志)에서 위의 문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요지(遼志)에 기재된 여러 문장을 검토해 위와 같이 해석한거라고 보며 이를 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해주(海州)의 동쪽 경계는 신라라고 정의했다고 본다.
따라서 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인 청나라 한림원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開元元和之際渤海愈盛鴨綠江以北皆為渤海所有遼志所謂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開置郡邑是也
後唐清泰末髙麗復起王建襲據新羅邊邑建都松岳元史所謂在鴨淥江東千餘里非平壤之舊者是也于是新羅所有僅海城以東及朝鮮數道非復唐時之境而自五代至遼傳國依然不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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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연간(713~741)과 원화 연간(806~820) 무렵에 발해가 점차 강성해져서 압록강(鴨綠江)이북이 모두 발해의 소유가 되었는바, '요지(遼志)'에서 "발해왕 대인수[大仁秀 : 선왕]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과 읍을 설치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당 청태(934~936년) 연간 말에 고구려(髙麗)가 다시 일어났으니, 왕건(王建)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쳐서 점령하고 송악에 도읍을 세웠다(建都松岳). '원사'에 "압록강(鴨淥江) 동쪽 천여리에 있는 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고려: 왕건[王建]의 고려를 뜻한다)는 겨우 해성의 동쪽(海城以東)과 조선의 여러 도(朝鮮數道)를 차지하고 있었고, 당나라 때의 지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非復唐時之境). 또한 오대 이후 요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이어서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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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의 편찬자인 청나라 한림원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당나라 개원과 원화 연간인 713~741년, 806~820년에 발해가 강성해져서 압록강 이북은 발해의 소유가 되었고(開元元和之際渤海愈盛鴨綠江以北皆為渤海所有)
요지(遼志)에선 발해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과 읍을 설치했다(遼志所謂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開置郡邑)고 했지만
후당청태(934~ 936년)말에 왕건의 고려가 다시 일어나 신라의 변두리를 습격하여 점령한 후 송악에 도읍을 세웠고(後唐清泰末髙麗復起王建襲據新羅邊邑建都松岳)
그리하여 신라는 겨우 해성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도를 차지했다(于是新羅所有僅海城以東及朝鮮數)고 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통일신라말기 신라는 왕건(王建)에게 신라의 변두리 땅을 점령당했으며 왕건(王建)의 고려는 더욱 영토를 확장시켜 해성시 동쪽에 이르렀다고 기술하다가
결국, 왕건(王建)의 고려가 아니라 신라가 이러한 결과를 이뤘다고 기재했다.
즉, 고려와 신라를 바꾸어 이상하게 문장을 기술한 것이다.
이 문장은 신라가 소멸하던 때이며 왕건(王建)의 고려가 후삼국 통일하기 전후에,
고려가 압록강(鴨綠江) 이북인 해성(海城) 동쪽을 장악했고 한반도의 여러 도를 차지했다는 내용인데 왜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왕건(王建)의 고려가 아닌 신라로 바꾸어 표기했을까?
그리고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서는 신라산(新羅山) 깊은 곳이 고려와 인접한 곳(高麗接界)이라고 기재했는데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의 원문과 달리 신라의 경계(新羅界)로 기재하면서 고려를 신라로 바꾸어 기록했다고 말씀드렸다.
왜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원문을 바꾸어 고려가 아닌 신라로 표기했을까?
원문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금나라 때엔 신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나는 청나라 황실의 부계는 왕건(王建), 모계는 칭기즈칸(成吉思汗) 혈통이라고 본다.
하지만 청나라는 지금의 길림시 동남쪽에서 신라가 진한의 일부로 등장했다고 보는데에 비해 고구려는 청나라가 발흥한 지역과 관련이 없는 나라라는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
청나라의 시각은 고려가 고구려를, 조선이 고려를 정치적으로 계승했다고 본다.
따라서 조선은 청나라가 책봉(冊封)하는 나라이기에 조선이 계승한 고려의 영토가 청나라 영토인 지금의 개원시와 철령시 사이의 동쪽에 있었다거나 요령성 해성시 동쪽인 청나라 영토에 있었다는 표현을 피한 거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 해성시(海城市) 구글지도이다.
구글지도를 보면 해성시(海城市)가 빨간색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동쪽에 신라(왕건고려)와의 국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志) 권 36이다. 982년 6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志) 권 36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成宗元年六月 正匡崔承老上書曰, “我國家統三以來, 士卒未得安枕, 糧餉未免糜費者, 以西北隣於戎狄, 而防戍之所多也. 以馬歇灘爲界, 太祖之志也, 鴨江邊石城爲界, 大朝之所定也. 乞擇要害, 以定疆域, 選土人能射御者, 充其防戍. 又選偏將, 以統領之, 則京軍免更戍之勞, 蒭粟省飛輓之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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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원년(982) 6월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사졸(士卒)들이 아직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고 군량을 아직 많이 소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서북이 오랑캐에 인접하여 방수(防戍)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한 것은 태조(太祖)의 뜻이고, 압록강(이 문장의 원문은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변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하는 것은 대조(大朝)가 정한 바입니다. 바라건대 요해지를 선택하여 강역(疆域)으로 정하고 토착인[土人]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방수(防戍)에 충당하십시오. 또 편장(偏將)을 선발하여 이들을 통솔하고 거느리게 하면, 경군(京軍)은 교대로 방수하는 어려움을 면하고 꼴과 곡식을 운반하는 비용을 덜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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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2년도이면 송나라도 존재할 때지만 여기서 대조(大朝)는 송나라거나 거란으로 해석된다.
고려거란의 제 1차 전쟁(993년) 이전이며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합의 하기 전에도 고려의 국경으로 책정할 지역으로 압강(鴨江)변의 석성(石城)이 거론되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4 문종 9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1055년 7월)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4 문종 9년의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秋七月. 都兵馬使奏, “契丹前太后皇帝詔, 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然或置城橋, 或置弓口欄子, 漸踰舊限, 是謂不厭. 今, 又創立郵亭, 蠶食我疆. 魯史所謂, ‘無使滋蔓. 蔓難圖也.’ 宜送國書於東京留守, 陳其不可, 若其不聽, 遣使奏告.” 於是, 致書東京留守曰, “當國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矧前太后皇帝玉冊頒恩, 賜茅裂壤, 亦限其江. 頃者, 上國入我封界, 排置橋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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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도병마사(都兵馬使)에서 아뢰기를,
“거란(契丹)의 전 태후와 황제가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江) 동쪽을 하사하고 우리나라의 봉경(封境)으로 삼았습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이 문장을 원문과 다르게 압록강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문장의 원문은 압강[鴨江]이지 압록강이 아니다. 또한 고려사 세가에 기재된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압강은 압록강과는 다른 강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간혹 성교(城橋)를 설치하거나 궁구난자(弓口欄子)를 두어 점차 옛 한계선을 넘어왔으니, 이는 ‘아무리 해도 싫지 않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우정(郵亭)을 세워 우리의 강역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사(魯史)』에서는 이른바, ‘만연하게 하지 말라. 만연하면 도모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어 그 불가함을 진술하고, 만약 그가 듣지 않는다면 사신을 파견하여 아뢰어야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동경유수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르기를,
“본국은 기자(箕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鴨江)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도 옥책(玉冊)으로 은혜를 내려 봉토를 하사하여 땅을 나누고 또 압록강(其江 = 鴨江)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이 문장 역시 원문과 다르게 압록강이라고 번역했다. 이 문장의 원문도 압강[鴨江]이지 압록강은 아니다. 또한 고려사 세가에 기재된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압강은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강으로 해석된다) 요사이 상국에서 우리 영토의 경계에 들어와서 다리와 보루를 설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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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재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고려문종에게 보낸 내용과 고려문종이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고려거란 제1차 전쟁이후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압강(鴨江)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 원문을 번역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원문에 기재된 압강(鴨江)을 모두 압록강(鴨渌江)으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번역은 원문과 다르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서로 다른 강이라고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지금의 Aihe River(璦河 애하) 구글지도이다.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해성시(海城市)동남쪽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Aihe River(璦河 애하)가 바로 고려 때 압강(鴨江)이라고 본다.
고려 때 압강(鴨江)으로 보이는 지금의 Aihe River(璦河 애하)에서 서북쪽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해성시(海城市)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臣伏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甫叅於禹會. 獎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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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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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선종은 거란의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때 확정된 양국의 경계를 거란의 황제에게 다시 한 번 언급한다(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이란 학야(鶴野)에 있는 화표주(華表柱)를 뜻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鶴野縣. 本漢居就縣地, 渤海爲雞山縣. 昔丁令威家此, 去家千年, 化鶴來歸, 集於華表柱, 以咮畫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塚纍纍.’ 戶一千二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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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가 계산현(雞山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위(丁令威)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서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화표주에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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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보면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학야현(鶴野縣)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야현(鶴野縣)과 화표주(華表柱)는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속한 지금의 요양시(辽阳市) 부근이라고 본다.
요지(遼志)에 기재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학야현(鶴野縣), 화표주(華表柱)와 고려와 거란의 국경부근인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서로 같은 의미이기에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 부근이라고 본다.
아래는 지금의 요양시(辽阳市) 구글지도이다.
지금의 요양시(辽阳市)에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속한 학야현(鶴野縣)이 있었고 그 부근에 고려사에 기재된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압강(鴨江, 지금의 Aihe River[璦河])까지 선을 그은 후 그 선의 서쪽은 거란, 그 선의 동쪽은 고려의 영토가 된다.
그리고 선의 서쪽에 해당되는 거란의 영토에 지금의 해성시(海城市, 거란 때에는 해주[海州])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사(遼史)와 고려사(高麗史) 그리고 요사(遼史)를 해석한 청나라(大淸) 한림원(翰林院)의 견해처럼 고려와 거란의 서북쪽 국경은 지금의 해성시(海城市) 동쪽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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