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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태조왕건, 계림(鷄林), 고려의 번(蕃) 달고(達姑)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918년 9월 26일, 양력 918년 11월 2일)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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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고려태조 왕건이 직접 밝힌 내용으로 고구려 평양을 지칭한다)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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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918년(즉위 원년)에 고려의 평양을 방문해서 옛 고구려 평양에 번인(蕃人)들이 사냥을 하며 인근 지역을 침략하고 있다고 유시한다.
918년 당시 지금의 집안시 남부 압록강(鴨綠江) 부근으로 보이는 옛 고구려의 평양이자 고려의 평양엔 여진(女眞)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번인(蕃人)이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고려사를 보면 여진(女眞)이 918년에 고려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 내용이다.
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往來謂之哈斯罕滿洲語藩籬也志云不得與本國往來寔有防閑之義舊作合蘓欵又作曷蘓館今改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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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을 합사한(哈斯罕)(만주어로 번리[藩籬 울타리 담장]이다. '지'에는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뜻이다. 이전에 합소관[合蘓欵] 또는 갈소관[曷蘓館]으로 썼던 것을 이제 고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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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 거란은 발해국에 거주하던 여진(女真)인들을 요양(遼陽) 남쪽으로 이주시켰고 요양(遼陽) 남쪽, 요동반도에 이주하게 된 여진(女真)인을 거란에선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했다고 한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내용이다.
哈斯罕关别名苏州关关址 ,是辽圣宗统和九年(991) 所建关隘。初建时以木栅为关。
木栅在契丹语称“哈斯罕”,故名。
位于辽东半岛南端黄海与渤海之间的狭窄地带,现地属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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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사한관(哈斯罕关)으로도 알려진 소주관은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건설된 요충지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목책으로 지어졌었다. 목책은 거란어로 "합사한(hāsīhǎn)"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지어졌다. 요동반도 남단, 황해(우리나라의 서해)와 발해(Bohai sea) 사이의 좁은 지역(요동반도)에 위치하며 현재 대련시 감정자구대련만가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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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발해 멸망 후 지금의 개원시와 송화강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女真)인들 중에 일부를 요동반도의 대련시감정자구대련만가도(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로 이주시킨 후 991년부터는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으로 부르면서 본격적으로 관리했다는 내용이다.
아래는 강제이주된 요동반도여진이 거주하던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거란은 이곳에 이주시킨 여진(女真)인들을 관할하기 위해 소주(苏州)를 설치했다고 한다.
요동반도(辽东半岛)의 끝자락 귀퉁이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女真)인을 거란에선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3년에 대한 기사이다. 984년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3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命刑官御事李謙宜, 城鴨綠江岸, 以爲關城, 女眞以兵遏之, 虜謙宜而去, 軍潰不克城, 還者三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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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가에 성을 쌓아 관문(關門)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女眞)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돌아가니 군대가 무너져 성을 쌓지 못하였으며 돌아온 자는 셋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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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의해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女真)인들이 요동반도의 대련시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984년 이들과 고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
고려사에선 고려가 여진(女眞)과 충돌한 지역을 압록강가(鴨綠江岸)라고만 기록되어 있지 압록강가(鴨綠江岸) 어디라고는 기록하진 않았다.
이 당시는 이미 고려에서 서경, 평양, 성주 등의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을 확보한 상황이었기에, 고려와 요동반도 여진(辽东半岛 女真)이 충돌한 지역은 서해에서 의주까지의 압록강가(鴨綠江)와 압강(鴨江) 서쪽으로 제한된 지역이었다고 본다.
고려에서 관문(關門)으로 삼으려고 성을 쌓았다면 그 지역은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 지금의 애하[璦河]라고 본다)이 만나는 대략 지금의 의주 부근이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4년에 대한 기사이다. 985년 5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세가 권 제3(世家 卷第三) 성종(成宗) 4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王遷延不發兵, 國華諭以威德. 王始許發兵西會, 國華乃還. 先是, 契丹伐女眞, 路由我境, 女眞謂我導敵構禍, 貢馬于宋, 因誣譖, “高麗與契丹, 倚爲勢援, 摽掠生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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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시일을 끌며 군사를 일으키지 않자 한국화(韓國華)가 위협과 덕행으로 달랬다. 왕이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서쪽에서 만나기를 허락하자 한국화가 이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길로 삼았는데 여진은 우리에게 적을 끌어다가 분란을 엮었다 말하고, 송(宋)에 말을 바치러 가서는 그로 인하여 무고(誣告)하고 참소(讒訴)하기를, “고려가 거란과 더불어 그 세력의 도움에 기대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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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 학자들 대부분이 주장하는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대입하면 거란은 숙여진에 포함된 북여진(회발)이나 생여진(지금의 하얼빈이나 길림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이며 완안부여진도 이에 해당된다)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 영토를 경유할 필요가 없다.
즉, 지금 우리나라 학자들 대부분의 주장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 고려사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太祖) 19년의 내용이다. 음력 936년 9월 8일 갑오(甲午)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太祖) 19년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大相庾黔弼, 元尹官茂·官憲等, 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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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諸蕃은 여러 울타리라는 뜻이다)의 정예 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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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선 이 외국인 부대를 제번(諸蕃)으로 표기한다. 번(蕃)은 울타리라는 뜻이다.
즉, 이들은 태조왕건 때인 936년에 고려의 국경 밖의 울타리(蕃)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 남쪽에 고려 영토가 있거나 고려의 또 다른 번(蕃)이 있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내용이다. 1116년 1월 23일(음)
위의 자료는 금사(金史)의 본문을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번역한 내용이다. 금나라 태조 때 금나라가 주변 세력이나 부족국 들을 병합하는 내용이다.
自今契丹·奚·漢·渤海·係遼籍女直·室韋·
達魯古·兀惹·鐵驪諸部官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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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란(契丹)·해(奚)·한(漢)· 발해(渤海)·계요적여진(係遼籍女直)·실위(室韋)·
달로고(達魯古)·올야(兀惹)·철려(鐵驪) 각 부(部)의 관민(官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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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에 기재된 달로고(達魯古)는 고려사에 기재된 달고(達姑)를 가리킨다고 보며 금사(金史)에 기재된 철려(鐵驪)는 고려사에 기재된 철륵(鐵勒)의 일파이다.
따라서 금사(金史)의 기록을 보면 달고(達姑),철륵(鐵勒)은 완안부여진 주변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116년 당시 완안부여진은 지금의 하얼빈시 아성구에 있었다.
아래는 역사지식사전망에서 금사(金史)에 기재된 달로고(達魯古)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又译达鲁虢、达卢骨。金女直的一支,与阿骨打的完颜部相邻接,在拉林河以西地区。
此部有城,称达鲁古城。一说在今吉林前郭尔罗斯蒙古族自治县兴隆堡附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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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达鲁虢(dálǔguó), 达卢骨(dálúgú)라고도 표기한다. 금나라 여진족의 한 갈래이다(이 백과사전에선 여진의 지파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여진의 지파는 아니며 여진 부근에 거주하던 세력이다). 아골타의 완안부족과 서로 함께 이웃하고 인접해있다, 현재 납림하에서 서북지역이다. 이곳에 달로고성(达鲁古城)이라는 성(城)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현재 길림성송원시(吉林省松原市) 전곽이나사몽골족자치현(前郭尔罗斯蒙古族自治县)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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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고(達魯古)는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의 부근에 거주하던 세력이라고 한다.
達魯古(달로고)로 한자표기하는데 지금의 중국 발음으론 dálǔgǔ라고 발음한다.
그리고 고려사에 기록된 달고(達姑)는 현재 한국어로 dalgo라고 발음한다.
고려사에 기재된 달고(達姑)는 바로 금사에 기재된 달로고(達魯古)라고 해석된다.
達魯古(달로고)가 거주한 지역은 납림하에서 서북지역(拉林河以西地区)이거나 길림성송원시전곽이나사몽골족자치현(吉林省松原市前郭尔罗斯蒙古族自治县)이라고 한다.
고려사에 기재된 달고(達姑)가 달로고(達魯古)이고 서기 936년이면 달고(達姑)의 거주지는 납림하에서 서북지역(拉林河以西地区)이라고 본다.
아래는 납림하(拉林河) 구글지도이다.
납림하에서 서북쪽(拉林河以西地区)이면 지금의 하얼빈시(哈尔滨市) 아래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의 만주원류고의 내용이다.
아래는 금나라 역사를 다룬 금사(金史)를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이 해설한 만주원류고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이다.
金自始祖四遷至此後為上京故地實與今阿勒楚喀拉林河源相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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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는 시조로부터 네번 옮겨서 이곳에 이르렀으며 뒤에 강역이 되었다.
옛 땅은 실제로 지금의 아륵초객과 납림하의 수원과 가까이(拉林河源相近)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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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한림원이 편찬한 만주원류고를 보면 금나라는 시조 함보(函普 hán pǔ)로부터 네 번에 걸쳐 거주지를 옮겼고 최종적으로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금나라를 세운 것으로 청나라에선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 이전 완안부(完顏部)의 옛 땅은 납림하(拉林河) 수원(발원지)인 것으로 본다.
나는 금사(金史)에서 이러한 내용을 못 읽었는데 이 지역에 거주했던 만주인이나 여진인들 사이에 구전된 내용을 기록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936년 일리천전투 때나 985년 이전까지 고려의 제번 중 하나인 달고(達姑)가 납림하에서 서북지역에 위치한 지역에 거주했고 그 아래가 고려의 영토였으며 985년 전까지 완안부여진이 납림하 수원지인 납림하 남쪽에 거주했다면
납림하 서쪽에 위치한 고려의 영토는 납림하 남쪽에 거주하던 완안부여진을 거란이 공격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고려의 영토가 중간에서 가로막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납림하 서쪽에 고려의 영토가 있었다면 그 지역은 지금의 길림시(吉林市)이다.
즉, 고려 왕건 때부터 거란이 생여진(완안부여진, 동여진)을 공격했던 985년 어느 시점에 길림시(吉林市)는 태조왕건 이후로 고려영토였다고 해석된다.
고려사에서도 왕건이 등극한 후 오리(압록강, 마한과 동의어)를 치기 전에 계림(雞林, 지금의 길림시[吉林市]로 해석되며 진한[辰韓]에 속한다)을 얻는다는 예언이 고려사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달고(達姑)가 고려의 번(蕃)이고 거란이 여진(위치를 볼 때 북여진이나 생여진으로 보인다)을 칠 때 고려의 영토를 경유했다는 고려사의 내용은 위치로 볼 때 부합한다.
그런데 위의 내용이 아니라 당시 계림(雞林)을 고려에선 지금의 길림시(吉林市)가 아닌 길림시(吉林市)보다 남쪽지역(역시 진한[辰韓]에 속한다)으로 봤다고 하고, 거란이 공격한 여진은 생여진(지금의 하얼빈이나 길림시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이며 완안부여진도 이에 해당된다)이 아닌 숙여진 중에 북여진(회발)이라고 해도 역시 그 지역은 고려의 영토에서 동쪽일 수 있으므로 거란은 영토진입 허락을 고려로부터 받아야 한다. 역시 고려사와 위치적으로 부합한다.
아래는 휘발하(辉发河)의 구글지도이다.
휘발하(辉发河) 주변에는 숙여진(계요적여진)에 해당되는 북여진(회발)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일 고려에서 생각한 계림(雞林)이 지금의 길림시(吉林市)가 아니라 길림시(吉林市) 아래지역이라고 해도 고려태조 왕건이 옛 진한(辰韓)의 영토이며 옛 계림(雞林)으로 생각한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아래지역을 획득했다면, 회발(북여진)은 고려의 영토에서 동쪽에 위치할 수 있으므로 거란의 입장에선 회발(북여진)을 공격할 경우 고려에게 영토 경유를 허락받아야 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내용이다.
顯慶五年命蘇定方為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自是新羅漸有髙麗百濟之地其界益大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때)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까닭, 이유)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授法敏為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垂拱二年遣使來朝天授三年〈按册府元龜作長壽二年〉政明卒立其子理洪為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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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5년(660)에 명을 내려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삼고 수구과 육군 10만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서 영을 내려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차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점령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
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수공 2년(686)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천수 3년(살펴보면, '책부원구'에는 장수 2년으로 되어 있다)에 정명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효소왕)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은 장안 2년(702)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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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魏志), 후한서(後漢書), 통전(通典)에 보면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고, 통전(通典)에 보면 진한(辰韓) 위에 예맥(濊貊, 북부여[北扶餘]를 지칭한다고 해석되며 위치는 지금의 송원시[松原市]일대라고 본다)이 있다고 기재했기 때문에,
위의 사서들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진한(辰韓)에 속한 계림(雞林)은 송원시(松原市) 아래인 길림시(吉林市)로 본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者, 靑木松也, 謂松嶽郡人, 以龍爲名者之子孫, 可以爲君主也. 王侍中, 有王侯之相, 豈謂是歟? 黑金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初盛於此, 殆終滅於此乎! 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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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가운데 사유 아래로 상제(上宰)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체를 드러낸다.’라는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이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에게 왕후(王侯)의 상이 있으니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바인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께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끝내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로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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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있을 때 거울에 세겨진 예언을 해석하는 내용이다.
'왕시중(王侍中, 왕건)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고 한다.
위의 고려사에서 예언을 풀이한 내용을 보면 계림(鷄林)은 진한(辰韓)이라고 풀이한다.
즉, 청나라 한림원의 학자들이 중국의 사서들을 보고 풀이한 것처럼 길림시(吉林市)나 그 부근을 뜻하지 경주(慶州)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언에선 압록강(鴨綠江)은 마한(馬韓)으로 풀이하는 데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마한의 왕검성은 고려 서경(西京)이라고 기재했다.
위의 내용은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볼 때 왕건 때에 실현된 내용이라고 보며,
예언의 순서를 볼 때 진한(辰韓)에 해당되는 계림(鷄林)인 길림시(吉林市)를 먼저 얻고 이후 마한(馬韓)에 해당되는 압록강(鴨綠江) 위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얻었다고 본다.
만일 계림(鷄林)을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라고 한다면 예언과 맞지 않는다.
왕건은 921년에 서경(제왕운기에선 마한의 왕검성이라고 한다)에 행차했고 이후 신라에겐 935년에 항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언에선 왕건은 서경(마한의 왕검성)보다 먼저 진한(계림)을 얻는다고 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길림(吉林)보다 북쪽에 위치한 달고(達姑)와 철륵(鐵勒)이 고려태조 왕건이 치룬 일리천 전투 때 이미 고려(高麗)의 제번(諸蕃)으로 기재되었기 때문에,
고려태조 왕건이 진한(辰韓)과 계림(鷄林, 길림[吉林]으로 해석된다)을 얻었다는 것은 맞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성종 15년 3월의 내용이다. 996년 3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성종 15년 3월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咨! 爾高麗國王王治, 地臨鯷壑, 勢壓蕃隅. 繼先人之茂勳, 理君子之舊國, 文而有禮, 智以識機. 能全事大之儀, 盡協酌中之体. 鴨江西限, 曾無恃險之心, 鳳扆北瞻, 克備以時之貢. 言念忠敬, 宜示封崇, 升一品之貴階, 正獨坐之榮秩. 仍䟽王爵, 益表國恩, 冊爾爲開府儀同三司尙書令高麗國王. 於戱! 海岱之表, 汝惟獨尊, 辰卞之區, 汝惟全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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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대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는 그 땅이 메기가 사는 골짜기[鯷壑, 고려의 별칭]에 있으면서 다른 나라들[蕃隅]을 위세로 눌렀다. 선인(先人)의 뛰어난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군자(君子)의 옛 나라를 다스리니,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사대(事大)의 의례가 능히 온전하였으며 조절하는 요체(要體)가 모두 〈그를〉 도왔다.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일찍이 그 험한 지세를 믿는 마음이 없었으며, 황제가 있는[鳳扆] 북쪽을 우러러보며 때를 맞추어 조공(朝貢)을 보냈다. 그대의 충성과 공경함을 말하고 생각하자면 마땅히 높은 관작(官爵)에 봉하여 1품의 귀한 자리에 올리고 바로 홀로 앉는 영예로운 직위를 받아야 한다. 이에 국왕의 작위를 주어 더욱 나라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그대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는다.
아아!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바깥 지역에서는 오직 그대만이 홀로 존귀하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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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 이후 거란에서 고려 성종을 책봉하는 내용이다.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 일찍이 그 험한 지세를 믿는 마음이 없었으며(鴨江西限, 曾無恃險之心)'라고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鴨綠江)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압강(鴨江)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서로 구분하고 있다.
압강(鴨江)은 요동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애하(璦河 Aihe River)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거란은 이 책봉 문서에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압강(鴨江)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해에서 의주까지는 압록강(鴨綠江)이, 의주 위로는 요동을 흐르는 압강(鴨江)이 경계이다.
그리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辰卞之區, 汝惟全有),'라고 거란에선 밝힌다.
위의 거란의 책봉 문서를 보면 아래와 같이 정의 된다.
거란이 생각하는 마한(馬韓)은 우리나라 주류 사학자들이 생각하는 한반도 중부가 아니다.
압록강 북쪽의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부지역을 옛 마한(馬韓)이라고 인식한다.
요동을 흐르는 압강(鴨江)을 경계로 한다는 것은 고려의 마한(馬韓) 전 지역에 대한 소유를 인정하진 않고 마한(馬韓) 중에 요동 지역은 고려와 거란이 서로 경계를 나누어 소유한다는 뜻이다.
고려는 당시 마한(馬韓)의 왕검성이라고 인식한 서경(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등은 소유했지만 거란과 압강(鴨江)을 경계로 하면서 마한(馬韓) 중에 요동지역은 전체를 다 소유하진 못했다.
그리고 거란은 고려가 옛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을 소유하는 것은 인정했다.
역시 거란이 생각하는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지금 우리나라 대다수 사학자들의 의견과 다름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학자들 대다수의 의견대로라면 고려는 경상도와 강원도만 소유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거란이 지칭한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한반도 동남부가 아니다.
거란이 지칭한 진한(辰韓)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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