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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와 거란 전쟁 이전 고려의 요동 확보 본문
고려태조왕건은 918년에 고려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은 993년도에 발생했다.
우리나라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 기간인 918년에서 993년까지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淸川江)까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고려의 영토는 이미 태조왕건이 황제로 즉위한 918년 이후에도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인 요동(辽东)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世家) 성종(成宗) 9년의 내용이다. 990년 9월 7일(음) 기묘(己卯)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世家) 성종(成宗) 9년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欲取十月, 言邁遼城, 行祖禰之舊規, 布邦家之新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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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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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고려와 거란의 제1차 전쟁이 벌이지기 3년 전의 일이다.
990년 9월에 고려 성종은 교서를 내리면서 10월에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겠다고 발표한다(欲取十月, 言邁遼城, 行祖禰之舊規, 布邦家之新令).
요성(遼城)은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북쪽으로 이틀거리에 있는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압록강(鴨綠江) 보다 북쪽에 위치한 요동(辽东)지역에 있는 성이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이 일어난 993년보다도 3년 전에 요동(辽东)에 있는 요성(遼城)은 이미 고려에 포함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世家) 권 제 42 공민왕(恭愍王) 19년 11월의 내용이다.(1370년 11월 2일(음) 정해(丁亥), 1370년 11월 4일(음) 기축(己丑))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世家) 권 제 42 공민왕(恭愍王) 19년 11월 기사 일부의 원문과 번역이다.
1370년 11월 2일 정해
十一月 丁亥 我太祖與池龍壽等, 至義州, 造浮橋, 渡鴨綠江.
11월 정해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1370년 11월 4일 기축
己丑 進襲遼城, 急攻拔之.
기축 〈아군이〉 요성(遼城)으로 진군한 뒤 요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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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공민왕 19년(1370년) 11월 2일과 11월 4일의 기록이다.
공민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이성계, 지용수 등은 1370년 11월 2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이틀 후인 11월 4일에 요성(遼城)을 함락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요성(遼城)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이틀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성(遼城)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辽东)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음력 991년 10월 3일)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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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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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鴨綠江) 건너 북쪽에 위치한 요성(遼城)에서 고려성종이 법령을 발표한다는 기사보다 일 년 후인 991년도 기사이다.
고려에서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 살게 했다(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는 내용을 보면
거란에 의해 요동반도(辽东半岛)에 강제이주된 여진(女眞) 때문에 고려는 압록강(鴨綠江) 전체나 요동(辽东)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 전까지 요성(遼城)이나 서경(西京) 등의 요동(辽东) 지역은 고려의 영토로 확보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를 보면 이 외의 다른 압록강(鴨綠江) 북쪽도 확보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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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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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동경(東京)엔 요양(遼陽)이 속했있다.
(현재 국내외의 학설은 지금의 중국 요양시[辽阳市]를 거란의 동경 요양이라고 주장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중국 요양시[辽阳市]는 거란의 동경 요양이 아닌 동경의 속현인 학야현[鶴野縣]이라고 본다)
거란은 발해 멸망 후 지금의 길림시 북쪽과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생여진(生女眞)을 요동반도(辽东半岛)로 이주시켰다.
고려사에선 생여진(生女眞)이 동경(東京) 남쪽에서 고려 안북부(安北府)까지 거주했다고 기재한다. 이 문장에서 생여진(生女眞)은 요동반도(辽东半岛)에 근거지를 둔 여진(女眞)을 가리킨다.
그리고 위의 고려사를 보면 생여진(生女眞)이 거주하던 거란의 동경(東京)과 고려 안북부(安北府) 사이에 땅을 고려광종이 빼앗아 가주(嘉州)와 송성(松城)을 쌓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의 가주(嘉州)와 송성(松城)은 거란의 동경(東京)과 고려 안북부(安北府) 사이에 있는 땅이고 동경(東京)과 안북부(安北府)의 위치로 볼 때 압록강(鴨綠江) 건너 북쪽인 요동(辽东)지역의 땅이라고 본다.
아래는 요양시(辽阳市) 구글지도이다.
학자들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를 거란의 동경(東京)이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는 거란의 동경(東京)이 아닌 동경(東京)의 속한 학야현(鶴野縣)이었고 거란의 동경(東京)은 요하(遼河)의 서쪽 어느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일단 학설을 따라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를 동경(東京)으로 가정하면,
지금의 요양시(辽阳市) 남쪽에서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서쪽 사이에 고려광종이 요동반도(辽东半岛)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건설한 가주(嘉州)와 송성(松城)이 있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를 따르면,
요하(遼河) 서쪽의 어느 지역에서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서쪽 사이에 고려광종이 요동반도(辽东半岛)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건설한 가주(嘉州)와 송성(松城)이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내용이다. (994년 2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甲午)十三年 春二月 蕭孫寧致書曰,..............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修築. 伏請, 大王預先指揮, 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踏行穩便田地, 酌量地里遠近, 幷令築城, 發遣役夫, 同時下手, 其合築城數, 早與回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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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 쌓는 공사를 착수할까 합니다. 삼가 요청하건대 〈고려의〉 대왕(大王)께서 미리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지금의 계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10km이다)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성들 사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게 하시고, 아울러 성을 쌓을 일꾼들을 보내 〈우리 측과〉 같이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며, 쌓을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 빨리 회보(回報)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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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은 고려와 거란의 제 1차 전쟁 이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의 대왕(大王)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두 문장 모두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했지만 실제 고려사 원문에는 두 개의 문장 모두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 있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지금의 의주 위인 압록강(鴨綠江)에서 요동(辽东)방향으로 즉, 북쪽에 있는 지류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서로 구분한다.
위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의 대왕(大王)에게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강(鴨江)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110km)(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라고 언급한다.
압강(鴨江)동쪽으로부터 280리(110km)에 고려 안북부(安北府)가 있다는 뜻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12 지리3 북계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 제12 지리3 북계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安北大都護府寧州本高麗彭原郡. 太祖十四年, 置安北府. 成宗二年, 稱寧州安北大都護府. 顯宗九年, 稱安北大都護府. 高宗四十三年, 避蒙兵, 入昌麟島. 後出陸. 恭愍王十八年, 置安州萬戶府. 後陞爲牧. 別號安陵【成廟所定】, 有淸川江【古稱薩水, 卽高句麗乙支文德敗隋兵百萬之地】. 領防禦郡二十五, 鎭十二, 縣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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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는 본래 고려의 팽원군(彭原郡)이다. 태조 14년(931)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 성종 2년(983)에 영주(寧州)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다. 현종 9년(1018)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다. 고종 43년(1256)에 몽고 병사를 피해 창린도(昌麟島)에 들어갔다가 뒤에 육지로 나왔다. 공민왕 18년(1369)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안릉(安陵)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청천강(淸川江)이 있다【옛날에 살수(薩水)라고 불렀는데, 곧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병사 1,000,000명을 격퇴한 곳이다.】. 관할하는 방어군(防禦郡)이 25개이고, 진(鎭)이 12개이고, 현(縣)이 6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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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부(安北府)는 고려 태조왕건 때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안북부(安北府)는 고려 서경(西京)의 서쪽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고려 태조왕건 때인 921년에 고려 서경(西京)에 왕건이 행차한 기록을 볼 때 서경(西京) 부근인 안북부(安北府)도 왕건이 확보한 요동(辽东)지역이라고 본다.
위의 고려사를 보면 안북부(安北府)는 영주(寧州)로도 불리고 고려 말기 공민왕 땐 안주(安州)로 불렸으며 안북부(安北府) 즉, 안주(安州)에는 청천강(淸川江)이 있다고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고려사 지리지는 조선의 학자들이 조선시대에 고려의 안북부(安北府)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고려사 지리지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계속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청천강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청천강 옆에 평안남도 안주가 있다.
지도를 보면 평안남도 안주 왼쪽에 청천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평안남도 안주를 고려사 지리지를 저술한 조선 때 학자들의 주장처럼 고려 안북부(安北府)라고 가정하면 평양에서 북쪽으로 67km 떨어져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대다수 학자들은 북한 평양을 고려의 서경(西京)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나라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대로 북한 평양이 고려 서경(西京)이라면, 안북부(安北府)는 고려 서경(西京)에서 67km 떨어진 지역이 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명일통지(明一統志) 권 89 원문이다.
위의 명일통지(明一統志) 권 89 본문을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至元中西京內屬置東寜路..............馬頭山〈在寜州東州屬東寜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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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至元, 원나라 연호이다) 때에 서경(西京) 내에 동녕로(東寜路)를 설치했다.
....마두산〈영주(寜州)와 동주(東州)가 속한 동녕로(東寜路)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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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寜州)는 동녕로(東寜路)에 속한다(屬)고 기재하고 있다.
동녕로(東寜路)는 원나라(元)가 고려 서경(西京)을 점령한 후 고려 서경(西京)에 설치한 행정지역이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元)로부터 돌려받아 다시 고려의 소유가 되었다.
명일통지(明一統志)와 고려사지리지 영주(寧州)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고려사지리지 |
안북부(安北府) =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 영주(寧州) = 안주(安州) |
명일통지(明一統志) |
원나라 동녕로(東寜路) = 고려의 옛 서경(西京),
영주는 동녕로에 속해있다(寜州屬東寜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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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지리지영주(寧州) 와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종합한 해석 |
'영주는 동녕로에 속해있다(寜州屬東寜路).'라는 문장은
'안북부(安北府)는 서경(西京)에 속해있다(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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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오른쪽의 평안남도 안주를 안북부(安北府)로 해석하고 북한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해석하면 명일통지(明一統志)에 기재된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평안남도 안주는 평양에서 대략 67km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이면 명일통지(明一統志)에 기재된 것과는 달리 안북부(安北府)는 서경(西京)에 속한 지역이 아니다.
두 지역의 거리로 볼 때 안북부(安北府)는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있어야 한다.
(67km의 거리는 서울시청에서 경기도와 충남의 경계지점인 평택과 아산의 경계선까지의 거리와 같고, 서울시청에서 강원도 춘천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에 해당된다)
나는 고려 서경(西京)은 북한 평양이 아닌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본다.
그리고 안북부(安北府)는 환인만주족자치현과 접한 환인만주족자치현의 서쪽부근이라고 주장했었다(안북부[安北府, 영주寜州]는 서경[西京, 동녕로東寜路]에 속한 지역이다).
따라서 나의 견해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대부분 주장하는 견해와 달리 명일통지(明一統志)에 기록된 내용과 부합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이다.(921년 10월 20일(음) 임신(壬申))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壬申 幸西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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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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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 때인 921년 서경(西京)은 고려의 영토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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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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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주변에 송양의 비류국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안북도호부 영주의 부근인 성주(成州)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안북도호부 영주의 부근인 성주(成州)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成州本沸流王松讓之故都, 太祖十四年, 置剛德鎭. 顯宗九年, 改今名, 爲防禦使, 後爲知郡事. 別號松讓【成廟所定】. 有溫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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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 태조 14년(931)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 별호(別號)는 송양(松讓)【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이다. 온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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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성주(成州)는 송양의 비류국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송양의 비류국은 주몽이 세운 졸본에 인접한 나라이다.
나는 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서,
주몽의 졸본과 송양의 비류국이 합해져 고구려 때 평양이 되었고 고려 때는 주몽의 졸본은 고려 서경(西京)으로 송양의 비류국은 고려 평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었다.
또한 고려국왕이 밝혔듯이 고려에선 고구려의 평양이 여러 번 위치를 옮겼어도 압록강(鴨綠江) 주변을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고려의 평양 역시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있었다고 주장했었다.
위의 고려사 지리지에 기재된 것처럼 고려 때 성주(成州)를 고려인들이 옛 송양의 비류국이 있던 곳이라고 인식했다면, 고려의 성주(成州)는 고려의 평양과 매우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성주(成州)를 한반도 내의 어느 지역으로 해석하는 것 같은데, 고려에서 성주(成州)를 옛 송양의 비류국이라고 인식했다면 한반도 내의 지역은 아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인식한 서경(西京) 주변에 성주(成州)가 있었다고 본다.
또한 이 지역을 고려 태조왕건 때인 931년에 강덕진(剛德鎭)을 세웠다고 하니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성주(成州)는 왕건 때 확보된 땅이다.
성주(成州) 부근으로 보이는 서경(西京)도 고려 태조왕건 때인 921년에 고려의 영토로 존재했다.
아래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의 구글지도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 집안시 안에 고려 성주(成州)와 고려 평양이 함께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고려 성주(成州)는 길림성 통화시와 가까운 집안시 내의 북쪽이고, 고려 평양은 집안시 내의 남쪽인 압록강(鴨綠江) 부근이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만주족자치현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나는 환인만주족자치현 내의 서북쪽에 고려 서경(西京)에 소속된 안북부(安北府)가 있었다고 본다.
지도를 보고 거리를 계산하면 서경(西京)으로 보이는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고려 때 압강(鴨江)으로 보이는 지금의 애하(Aihe River)까지는 대략 280리(110km) 거리이다.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의 대왕(大王)에게 통보한 '압강(鴨江)의 동쪽에서 안북부(安北府)까지인 280리(110km)'에 부합한다.
또한 '영주는 동녕부에 속해있다(寜州屬東寜路)'는 명일통지(明一統志)의 문장을 해석한 '안북부(安北府)는 서경(西京)에 속해있다'는 내용과도 거리나 위치로 볼 때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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