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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 서경(西京), 성주(成州), 평양(平壤)의 구별 본문
고려 서경과 고려 평양은 서로 인접해 있지만 서로 다른 지역이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고려 때 인물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근거로,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현을 세운 졸본이며(제왕운기에선 졸본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고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으로 기재하고 있다)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에 해당된다고 말씀드렸다.
이승휴는 고려 때 인물이고 이승휴가 고려 때 직접 '지금의 서경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라고 기재했으니 고려 서경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기록이다.
또한 명나라 때 지리서인 명일통지(明一統志)의 내용이나,
고려사에 기재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국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
그리고 황성(皇城, 고려사엔 서경[西京]에 황성[皇城]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해석되는 고려사 기록만 봐도 고려 서경(西京)은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고려 평양은 옛 송양의 비류국이라고 보았고,
고구려의 도읍이 여러차례 천도를 하면서 평양도 두 차례 천도를 했고 고구려 평양은 천도하는 과정에서 위치가 바뀌었지만
고려국왕이 금나라 황제에게 밝힌 내용에 의하면,
고구려 평양은 천도 과정에도 압록강 주변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평양은 송양의 비류국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중국 부이강 주변과 부이강 주변의 남쪽인 압록강 주변을 포함한 지금의 집안시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지역이 바로 고려의 평양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고려사를 계속 검토해보니,
고려에서 옛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 지역은 성주(成州)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그 성주(成州)는 고려 서경(西京)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사들이 보였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종하는 고려사 권58 제12 지리3 북계 성주(成州)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종하는 고려사 권58 제12 지리3 북계 성주(成州)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成州本沸流王松讓之故都, 太祖十四年, 置剛德鎭. 顯宗九年, 改今名, 爲防禦使, 後爲知郡事. 別號松讓【成廟所定】. 有溫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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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 태조 14년(931)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 별호(別號)는 송양(松讓)【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이다. 온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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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成州本沸流王松讓之故都)'라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성주(成州)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인 고려 서경(西京)과 가까이에 인접한 지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지채문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지채문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智蔡文, 鳳州人, 顯宗元年, 補中郞將. 王聞契丹兵至, 遣蔡文, 將兵鎭和州, 以備東北. 及康兆敗, 兆及李鉉雲·盧顗等, 皆被執, 命蔡文移兵援西京. 蔡文卽與軍容使·侍御史崔昌進, 次剛德鎭, 顗爲契丹鄕導, 與契丹人劉經, 賚檄至西京諭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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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智蔡文)은 봉주(鳳州) 사람이고 현종(顯宗) 원년(1010)에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왕은 거란(契丹) 군사들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채문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에 진을 치고 동북 방면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강조(康兆)가 패하고, 강조 및 이현운(李鉉雲)·노의(盧顗) 등이 모두 포로가 되자, 〈왕은〉 지채문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동하여 서경(西京)을 돕도록 하였다. 지채문은 즉시 군용사 시어사(軍容使 侍御史) 최창(崔昌)과 함께 진격하여 강덕진(剛德鎭)에 머물렀는데, 노의가 거란의 길잡이[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함께 격문을 가지고 서경에 와서 항복을 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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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에 보면 고려현종이 지채문(智蔡文)에게 명령하여 서경(西京)을 돕도록 했고 지채문(智蔡文)은 서경(西京)으로 진격한 후 강덕진(剛德鎭)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보인다.
'〈왕은〉 지채문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동하여 서경(西京)을 돕도록 하였다. 지채문은 즉시 군용사 시어사(軍容使 侍御史) 최창(崔昌)과 함께 진격하여 강덕진(剛德鎭)에 머물렀는데(命蔡文移兵援西京. 蔡文卽與軍容使·侍御史崔昌進, 次剛德鎭),'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옛 송양의 비류국은 고려 성주(成州)가 되었고 고려 성주(成州)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 태조 14년(931)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다(成州本沸流王松讓之故都, 太祖十四年, 置剛德鎭).'
위의 내용을 볼 때,
지체문(智蔡文)은 고려현종의 명령을 받고 서경(西京) 근처에 있는 성주(成州)의 강덕진(剛德鎭)에 머물렀음을 볼 수 있다.
즉, 고려 성주(成州)는 고려 서경(西京) 근처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22 세가 고종(高宗) 3년 9월의 기사이다. 1216년 9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22 세가 고종(高宗) 3년 9월의 기사 원문과 번역이다.
乙卯 西京兵至成州之狗淺, 遇丹兵二千餘人交戰, 斬獲共一百十五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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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 서경(西京) 군사가 성주(成州)의 구천(狗淺)에 도착하여 거란군 2,000여 명과 마주쳐서 서로 싸웠다. 참수하거나 포로로 사로잡은 자가 11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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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 때가 아니라 200년 후인 1216년도에 고려와 거란의 충돌내용이다.
서경(西京) 군사가 성주(成州)에 도착해 거란군과 싸운 내용을 보면 서경(西京)은 성주(成州)와 가까이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고려 서경(西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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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저술된 제왕운기를 보면,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다.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의 오녀산 남쪽 인공호수 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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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주(成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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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보면, 당시 졸본(卒本)을 흐르는 비류수(沸流水)의 상류엔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 비류수(沸流水)로 추정되는 강을 현재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의 혼강(渾江)으로 추정한다.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흐르는 혼강(渾江)의 상류에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위치해 있으니 지금의 부이강에서 집안시(集安市) 북부에 해당된다고 본다.
고려사 지리지엔, 성주는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은 고구려 동명왕 때 다물(多勿)이라고 불렸다.
동천왕 땐엔 주몽의 졸본(卒本)과 합해져 고구려 평양(平壤)이 되었다고 본다.
동천왕 때와 장수왕 때 모두 집안시(集安市) 남부와 합해져 고구려 평양(平壤)에 속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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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양(平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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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의 평양(平壤)은 마진의 궁예대왕이나 고려태조 왕건이 고구려 때 평양(平壤)이라고 인식한 곳이다.
고구려는 두 차례 평양(平壤)으로 천도했다. 아마도 마진의 궁예대왕이나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고구려 평양(平壤)이라고 인식했다고 본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국왕은 고구려 평양(平壤)이 여러 차례 바뀌었어도 압록강(鴨綠江)을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고구려 평양(平壤)이라고 인식한 곳에 고려 평양(平壤)을 둔 고려 역시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고려 평양(平壤)이 있었다고 본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우왕이 평양(平壤)에 와서 압록강(鴨綠江)에 부교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고 배로 짐을 서경(西京)으로 운반시킨 것을 볼 때 고려 평양과 압록강(鴨綠江) 그리고 고려 서경(西京)은 함께 인접해있다.
고려 평양(平壤)은 고구려의 평양(平壤) 중에 지금의 집안시(集安市) 남부인 압록강(鴨綠江)과 접한 지역이라고 본다.
고구려 평양(平壤) 중에 북부는 고려 성주(成州)가 되었고 남부는 고려 평양(平壤)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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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부이강(富尔江)의 구글지도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부이강(富尔江)에서 동남쪽에 있는 길림성 집안시(集安市) 북부에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구글지도이다.
집안시(集安市)북부는 고려 성주(成州)인 송양(松讓)의 옛 비류국(沸流國)이고 집안시(集安市)남부 압록강(鴨綠江)부근은 고려 평양(平壤)이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있는 오녀산(五女山)의 구글지도이다.
서경(西京)은 오녀산(五女山)에서 동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인공호수 안이라고 본다.
오른쪽에 고려 성주(成州)와 고려 평양(平壤)으로 해석되는 집안시(集安市)가 있다.
그동안 올려드린 글에서, 나는 고려 평양을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전체로 인식한 후 집안시 북부의 부이강 부근 지역을 옛 송양의 비류국으로 보았다.
따라서 집안시 전체에서 북부에 속하는 지역은 고려 평양의 북부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인식한 후
그 곳을 옛 송양의 비류국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고려사 내용을 보면 지금의 집안시(集安市)는 남북으로 나누어 집안시(集安市) 북부는 고려 성주(成州), 집안시(集安市) 남부는 고려 평양(平壤)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기존에 올렸던 글 중에 고려 평양(平壤)과 고려 성주(成州)를 구분하지 않고 올린 글은 다시 수정해서 고려 평양(平壤)과 고려 성주(成州)를 구분해서 올렸다.
아래는 이전에 올린 글 중 수정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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