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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학야현, 천황학주의 성, 북저용천(北抵龍泉) 본문
고려와 거란이 제1차 전쟁을 치룬 후 서로 국경을 정한다.
이를 거란의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때라고 고려국왕은 밝히고 있다.
그 이전까진 고려는 요하의 동쪽인 요동을 영토로 하려고 하였고,
거란 역시 요양 남쪽에다 지금의 개원시와 길림시, 하얼빈시 일대에 거주하던 생여진과 다른 이민족들을 강제이주시켜 요동반도 중부에 거주케 한 후,
이들을 이용해 고려의 압록강 이북 요동지역의 확보를 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거란이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던 생여진인들을 요동반도로 강제이주시키고 이들을 관리하던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위치상 요동반도에서 Bohai Sea와 Yellow Sea와 접한 곳에 거주한 것을 볼 때 이 당시 요동반도 여진은 그다지 강력한 세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이들을 이용해 고려를 견제했지만 요동반도 귀퉁이에 거주하던 것을 볼 때,
이들 영향력은 서해에서 의주지역까지의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주변까지였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7 세가 문종 9년 7월의 내용이다.1055년 7월 1일(음) 정사(丁巳)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7 세가 문종 9년 7월의 내용 중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秋七月 丁巳朔 都兵馬使奏, “契丹前太后皇帝, 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然或置城橋, 或置弓口欄子, 漸踰舊限, 是謂不厭. 今又創立郵亭, 蠶食我疆, 魯史所謂, ‘無使滋蔓, 蔓難圖也.’ 宜送國書於東京留守, 陳其不可, 若其不聽, 遣使告奏.” 於是, 致書東京留守曰,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矧前太后皇帝, 玉冊頒恩, 賜茅裂壤, 亦限其江. 頃者, 上國入我封界, 排置橋壘. 梯航納款, 益勤於朝天, 霤闥抗章, 乞復其舊土, 至今未沐兪允, 方切禱祈. 又被近日來遠城軍夫, 逼邇我城, 移設弓口門, 又欲創亭舍, 材石旣峙, 邊民騷駭, 未知何意. 伏冀, 大王親隣軫念, 懷遠宣慈, 善奏黈聰, 還前賜地, 其城橋弓欄亭舍, 悉令毁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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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정사 초하루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거란(契丹)의 전 태후황제(太后皇帝)가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이동 지역을 하사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城)과 다리[橋]를 설치하거나 궁구난자(弓口欄子)를 설치하기도 하여 점차 옛 경계선을 넘어오니 이는 속이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을 설치하여 우리 강토를 잠식하니, 『춘추[魯史]』에 이른바 ‘만연하게 하지 말라. 만연하면 도모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그 불가함을 말하고, 만약 듣지 않으면 〈거란 황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실정을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동경유수에게 국서를 보내기를,
“본국은 기자(箕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도 옥책(玉冊)으로 은혜를 내려 봉토를 하사하여 땅을 나누고 또 압록강(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원문엔 其江[기강]으로 기재되어 있다. 其江[기강]은 번역하면 '그 강'이다. 따라서 其江[기강]은 압강[鴨江]을 가리킨다)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요사이 상국에서 우리 영토의 경계에 들어와서 다리와 보루를 설치하였습니다. 먼 곳까지 가서 정성을 다하고 〈귀국의〉 황제를 뵙기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전(御前)에 장주(章奏)를 보내 옛 영토 회복을 빌었으나 지금까지 허락을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또 요즈음 내원성(來遠城)의 군부(軍夫)가 우리 성 가까이 다가와 궁구문(弓口門)을 옮겨 설치하고, 또 정사(亭舍)를 세우려고 목재와 석재를 이미 쌓아놓아 변방 백성이 놀라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이웃 나라와의 친선을 잘 고려하여 먼 땅에 자비를 베풀고, 귀국 황제에게 잘 아뢰어 전에 하사한 땅을 돌리도록 하며 그 성과 다리, 궁란(弓欄)과 정사(亭舍)는 모두 철거하여 없애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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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문장 중에
"압록강(鴨綠江) 이동 지역을 하사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이 되었습니다(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라는 문장과
"본국은 기자(箕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라는 문장은 모두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강(鴨江)으로 기재된 원문과 달리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하고 있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인 지금의 Aihe River(璦河 애하)로 보이며
조선에서도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구분해서 칭했다고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臣伏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甫叅於禹會. 獎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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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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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에 기재된 고려문종과 고려선종 때 기사를 검토해보면,
고려와 거란의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때 서로 합의한 국경은 대략 아래와 같다.
서해에서 의주까지는 압록강(鴨綠江)으로 해석되고,
의주에서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까지는 압강(鴨江)으로 해석되며,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에서 일자별교의 수(or 용천)까지 선을 그은 후 선의 서쪽은 거란의 영토로 선의 동쪽은 고려의 영토로 정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중에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라는 지역은 압강(鴨江)을 거슬러 올라가면 압강(鴨江) 주위에 있는 성(城)으로 추정했었다.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이라는 이름 자체가 요동(遼東) 땅에 거주하던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이 학(鶴)이 되어 요동(遼東)의 성(城)에 앉아있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내용이며 요동(遼東)은 학(鶴)의 들판(野)인 학야(鶴野)라고 부르기 때문에,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요동(遼東)지역의 성이라고 주장했었다.
다만 그 위치는 요동(遼東)내에 있는 압강(鴨江) 주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란의 역사를 다루는 요사(遼史)에 보니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엔 위의 내용과 같은 전설을 가진 '학야현(鶴野縣)'이라는 지역이 있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 38 지8(卷38 志8) 지리지2(地理志2)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道 東京遼陽府)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鶴野縣. 本漢居就縣地, 渤海爲雞山縣. 昔丁令威家此, 去家千年, 化鶴來歸, 集於華表柱, 以咮畫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塚纍纍.’ 戶一千二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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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가 계산현(雞山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위(丁令威)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서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화표주에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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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속한 학야현(鶴野縣)은 정령위(丁令威)와 화표주(華表柱)의 전설과 관련된 학야(鶴野)
즉, 학의(鶴) 들판(野)이라는 뜻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사(遼史)의 내용을 볼 때,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에 하나인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거란의 동경요양부 학야현(東京遼陽府 鶴野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아래는 지금의 요양시(辽阳市) 구글지도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거란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학야현(鶴野縣)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라고 본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인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과 접한 지역이라고 보며 그곳에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거란에서 고려국왕을 책봉하는 내용이다. (1097년의 기사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원문과 번역이다.
十二月 癸巳 遼遣耶律思齊·李湘, 來賜玉冊·圭印·冠冕·車輅·章服·鞍馬·匹叚等物. 冊曰, “朕以昊蒼眷祐, 祖宗貽範, 統臨天下, 四十有三載矣. 外康百姓, 內撫諸侯, 咸底于道. 而海隅立社, 北抵龍泉, 西極鴨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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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계사 요(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와 이상(李湘)을 파견하여 옥책(玉冊), 규(圭), 인(印), 관면(冠冕), 차로(車輅), 장복(章服), 안마(鞍馬), 필단(匹叚) 등의 물건을 보냈다. 책문(冊文)에서 말하기를,
“짐이 하늘에서 돌보아주심과 조종(祖宗)께서 남기신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 43년이 되었다. 밖으로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안으로는 제후를 어루만져 모두 바른 길로 가게 하였다.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鴨綠)에 닿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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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황제는 고려국왕에게 고려와 거란의 국경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鴨綠)에 닿았으며(北抵龍泉, 西極鴨綠).'
그런데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에 고려의 북단은 용천에 이른다(北抵龍泉)'는 '北抵龍泉'의 '抵(저)'는,
'용천(龍泉)에 닿았다'내지는 '용천(龍泉)에 접한다'로 해석되지 '용천(龍泉)을 분할한다'거나 '용천(龍泉)을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용천(龍泉) 전체는 거란의 영토이고 고려의 영토는 용천(龍泉) 아래라고 본다.
즉, 지금의 흑룡강성모단강시영안발해진(黑龙江省牡丹江市宁安渤海镇) 아래가 당시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 고려의 최북단이라고 본다.
아래는 흑룡강성모단강시영안발해진(黑龙江省牡丹江市宁安渤海镇)구글지도이다.
옛 발해국(渤海国)의 수도 중 하나인 용천(龍泉)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지금의 흑룡강성모단강시영안발해진(黑龙江省牡丹江市宁安渤海镇)의 아래까지가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 고려의 최북단에 해당된다고 본다.
고려에선 이 지역의 아래지역에 흐르는 모단강(牡丹江)을 주몽이 건넌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로 인식했다고 본다.
고려는 옛 동부여를 모단강(牡丹江)보다 동쪽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은 내가 이때까지 생각했던 것에 비해서 북계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고 동계는 오히려 남쪽으로 내려온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내가 주장한 고려의 국경에 대한 내용들과 큰 틀에선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부적으로 정확히 다뤄야할 옛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어서 이전에 올린 글들 중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시 수정해서 올린다.
아래는 이전에 올린 글 중에 수정한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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