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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패서인, 마한출신 고구려의 적통, 궁예의 마진 본문
태조왕건 드라마를 보면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그리고 교사나 강사들의 국사 강의를 들어보면 패서인(浿西人)을 황해도호족과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강의한다.
즉, 패서인(浿西人)은 황해도호족이며 고구려 유민들이고 고려에서 왕건을 추대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강의한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도 이런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황해도면 고구려에서 도읍도 아닌 남쪽 지방에 속했는데 고구려가 멸망한지 200년이 넘었어도 황해도 사람들이 고구려의 부활을 원했을까?”
그러다가 그 동안 공부한 내용이 쌓이니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명칭은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황해도출신 호족은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都囯内歴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歴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歴八十三年, 寳臧王二十七年而滅 (古人記録, 自始祖朱蒙王寳臧王, 歴年丁寧纎悉若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亰,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壖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艫千里, 髙㠶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逺近, 則不可知矣. |
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이 지나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朱蒙王)으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歷年)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년)에 (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고려] 서경(西京)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 입구의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수양제(隋煬帝)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
위의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를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 )안의 내용은 내가 해설한 내용이다.
고려 서경의 위치 =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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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동강(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본다) = 고구려 패수(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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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려사를 검토한 나의 견해를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 )안의 내용은 내가 해설한 내용이다.
고려 서경의 위치 + 고려 성주의 위치 + 고려 평양의 위치 =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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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 {고려 서경의 위치, 고려 성주의 위치, 고려 평양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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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동강(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본다) = 고구려 패수(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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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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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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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서경(西京)의 위치=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 위치=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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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올려드린 글에서도 밝혔듯이 고구려 평양 남쪽의 패수(浿水)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흐르는 혼강(渾江)에 해당된다고 본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구려 말기 평양성의 위치는 고려 때 고려의 서경(西京), 성주(成州), 평양(平壤)을 합한 지역에 해당된다고 본다.
아래는 고구려 평양성안에 흐르던 패수(浿水)로 추정되는 혼강(渾江)의 구글지도이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이고 패수(浿水)의 서쪽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패서인(浿西人)이라면,
패서인(浿西人)은 지금의 황해도 출신이 아니라 지금의 혼강(渾江)을 기준으로 혼강(渾江)의 서쪽 지역에 거주하던 세력들이었다.
즉,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 서쪽과 관전만주족자치현(宽甸满族自治县)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두 지역의 남쪽인 압록강(鴨綠江) 주변, 즉 평안북도의 지역 일부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 관전만주족자치현(宽甸满族自治县)의 구글지도이다.
지금의 혼강 서쪽지역이니 고구려 때 패서(浿西)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그런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를 검색해보니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단어는 고려사에 등장하질 않는다.
그러니 사료에도 없는 단어를 이때까지 실제로 존재하던 단어로 인식하고 패서인(浿西人)은 황해도출신호족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다만 행정구역으로 서경(西京)의 소관(所管)인 패서도(浿西道)라는 지역명칭이 보이는데 이 지역은 고려의 북계(北界)나 서북면(西北面)으로도 불린 지역이다.
이렇게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태조왕건의 황후와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지역출신이 패서(浿西)출신이고 황해도출신이라는 내용도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태조왕건의 황후와 부인들의 출신들을 확인해보았다.
제 4황후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는 황주(黃州)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다수 학자들은 고려의 황주(黃州)를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黃州郡)으로 보고 있다.
아래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의 황주(黃州)라고 추정하는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구글지도이다.
그런데 고려사를 보면 태조왕건이 서경(西京, 환인만주족자치현이라고 본다)에 행차했을 때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순시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태조(太祖) 내용이다. (935년 9월 2일(음) 갑오(甲午))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태조(太祖) 18년 내용이다.
秋九月 甲午 幸西京, 歷巡黃·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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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9월 갑오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해주(海州)를 순시(巡視)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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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황주(黃州)는 서경(西京) 근처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 권제36 참역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 권제36 참역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興化道掌二十九. 長寧【黃州】, 安信【嘉州】, 新安·雲興【郭州】, 林畔·通陽【宣州】, 豐陽【鐵州】, 光池【寧州】, 昌泰【寧德】, 鴨綠【靜州】, 會元【義州】, 名駒【龍州】, 靈騏【麟州】, 從化【威遠】, 長興【泰州】, 城陽·三妓·通義·大平【龜州】, 寶峯·懷仁【安義】, 花田·臨川【定戎】, 銀嵒·榛田【寧朔】, 嵒舍【龜州】, 芳田·昌平【朔州】, 安富新驛【安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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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도(興化道)는 29역(驛)을 관장한다. 장녕(長寧)【황주(黃州)】, 안신(安信)【가주(嘉州)】, 신안(新安)·운흥(雲興)【곽주(郭州)】, 임반(林畔)·통양(通陽)【선주(宣州)】, 풍양(豐陽)【철주(鐵州)】, 광지(光池)【영주(寧州)】, 창태(昌泰)【영덕(寧德)】, 압록(鴨綠)【정주(靜州)】, 회원(會元)【의주(義州)】, 명구(名駒)【용주(龍州)】, 영기(靈騏)【인주(麟州)】, 종화(從化)【위원(威遠)】, 장흥(長興)【태주(泰州)】, 성양(城陽)·삼기(三妓)·통의(通義)·대평(大平)【구주(龜州)】, 보봉(寶峯)·회인(懷仁)【안의(安義)】, 화전(花田)·임천(臨川)【정융(定戎)】, 은암(銀嵒)·진전(榛田)【영삭(寧朔)】, 암사(嵒舍)【구주(龜州)】, 방전(芳田)·창평(昌平)【삭주(朔州)】, 안부신역(安富新驛)【안융(安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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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黃州)가 포함된 흥화도(興化道)엔 압록(鴨綠), 황주(黃州)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주(黃州)는 황해도가 아니라 압록강(鴨綠江)에서 멀지 않은 지역인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황주(黃州)는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인 혼강(渾江, 고구려 때는 평양성 남쪽을 흐르던 패수[浿水]라고 본다)이 흐르던 고려 서경(西京,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고구려 평양성)근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즉, 패서(浿西)가 고구려 패수(浿水)의 서쪽을 지칭한다면 황주(黃州)는 지금의 혼강(渾江)이 있는 환인만주족자치현(고려의 서경[西京]이다)에서 서쪽방향 이거나 그 부근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패서인(浿西人)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면 패서인(浿西人)은 단순히 고구려출신이라는 의미를 넘어선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사료와 고려의 삼국유사, 제왕운기를 함께 검토해서 해석하면 마한(馬韓)은 지금의 요동(遼東)지역을 포함하고 있고 진한(辰韓)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지역을 포함함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제왕운기를 보면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했을 때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에서 건국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후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 고구려는 옛 마한(馬韓) 지역 외에 옛 진한(辰韓)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즉, 패서(浿西)는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 주변이며 고구려를 건국한 중심지이다.
따라서 패서(浿西)는 고구려 건국 후 고구려에 병합 된 진한(辰韓, 지금의 길림성을 포함한 지역이다) 지역이 아니다.
패서인(浿西人)은 마한(馬韓)의 정통을 이은 고구려의 중심세력출신이라는 의미이다.(제왕운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도읍이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은 바로 마한의 왕검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부심을 가진 패서인(浿西人)에 의해 고려의 대왕으로 추대를 받은 궁예가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摩震)으로 바꾼 것은 패서인(浿西人) 입장에선 선을 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학자들은 인도어 마하진단(摩訶震旦)에서 유래한 명칭이 마진(摩震)이며, 마진(摩震)의 뜻을 '거대한 동방의 나라(大東方國)'라고만 해석하는데,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원래 뜻은 인도인에겐 당시 중국 진나라(秦)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인도인 입장에서 볼 때 중국 진나라(秦)는 동방의 커다란 국가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마진(摩震)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마진(摩震)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마진’은 범어(梵語)에서 크다[大]는 뜻을 가진 ‘마하(摩訶)’와 진인(秦人)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뜻의 ‘cinitana’를 음역한 ‘진단(震旦)’을 합성하여 만든 ‘마하진단’의 약칭이었다는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단’은 본래 인도인이 중국을 지칭하던 말이었으나 점차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마진은 대동방국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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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두산백과에서 진단(震旦)을 설명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두산백과에서 진단(震旦)을 설명한 내용 중 일부이다.
진(震)은 진(秦)의 음이 전와(轉訛)한 것이며 '진토(秦土)', 즉 '진나라 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치나스타나(Chīnasthāna)에 중국인이 한자를 갖다맞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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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백과사전들을 보면 마진(摩震)은 결국 커다란(大) 진나라 영토(秦土)라는 뜻임을 볼 수 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나라(秦)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자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진나라(秦) 망명자들에게 주어 진나라(秦) 망명자들이 마한(馬韓)의 동쪽 땅에 거주하게 되면서 등장한 명칭이다.
즉, 진한(辰韓)의 원래 명칭은 진나라(秦)의 한(汗)으로 해석되는 진한(秦韓)이었고 시간이 흘러 후에 진한(辰韓)으로 불리었지만 진한(辰韓)으로 칭하던 당시에도 진한(秦韓)으로 칭하는 경우 역시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志
.................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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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秦)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섯 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서 열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었는데, 모든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모두 4~5만 호이다. 그 열두 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는데, 항상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졌다. 토지는 비옥하고 좋다. 변진과 한은 함께 산다. 또한 성곽이 있고 의복과 사는 집은 진한과 같다. 그 중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닿아 있다. 열두 개 나라 또한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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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위지(魏志)를 보면 진한(辰韓)의 원래 명칭은 진한(秦韓)이고 진한(秦韓)은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진나라(秦)에서 유래한 명칭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진한(辰韓)에 속한 나라들 중에 하나였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신라가 탄생한 지역이었고 본래의 신라였다.
그러니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마진(摩震, 거대한 진나라)이라는 국호를 세운 것은 이제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본래의 신라’라는 국호로 바꾸겠다는 뉘앙스이기도 하다.
따라서 궁예대왕의 행위는 마한(馬韓)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며 고구려에서도 중심세력출신에 해당되는 패서(浿西) 출신 호족들에겐 선을 넘는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다.
궁예대왕이 후에 마진(摩震)에서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또 다시 바꾼 것은, 결국 패서(浿西)출신 호족의 반발에 의해 한 발 물러선 정치적 제스처라고 본다.
만일 우리나라학자들 주장처럼 패서(浿西)출신 호족이 황해도출신이라면 궁예가 마진(摩震)이라고 국호를 바꾼 것에 대해 큰 반감이나 거부감은 없었을 거다.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출신이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는 이전에 올린 글 중에 위의 내용을 기반해서 일부 수정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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