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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와 거란의 완충지대 요동반도 여진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 본문과 번역이다. 남주성 박사님의 만주원류고(글모아 출판) 번역을 인용한다.
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往來謂之哈斯罕滿洲語藩籬也志云不得與本國往來寔有防閑之義舊作合蘓欵又作曷蘓館今改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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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을 합사한(哈斯罕)(만주어로 번리[藩籬 울타리 담장]이다. '지'에는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뜻이다. 이전에 합소관[合蘓欵] 또는 갈소관[曷蘓館]으로 썼던 것을 이제 고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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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遼陽)은 거란의 동경(東京)에 속한다. 거란은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여진(女真)인들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여진(女真)인들의 본거지는 요양(遼陽)의 남쪽이 아니다. 여진(女真)인들은 본거지를 떠나 거란인들에 의해 요양(遼陽) 남쪽으로 이주 된 것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의 경종(景宗) 5년(973) 기사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의 경종(景宗) 5년(973) 기사이다.
辛未,女直侵邊,殺都監達裏叠、拽剌斡裏魯,驅掠邊民牛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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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에(辛未), 여진(女直)이 변방(邊)을 침략했다, 도감(都監) 달리질(達裏叠)과 열랄(拽剌) 알리로(斡裏魯)를 죽이고, 변방사람들(邊民)의 소와 말을 약탈해서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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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3년 '거란의 변경을 여진이 침략한(女直侵邊)' 후 '거란의 변방사람들 소와 말을 약탈해서 가지고 갔다(驅掠邊民牛馬)'고 기재하고 있다.
여기서 가리키는 거란의 변경은 대금국지의 내용을 볼 때,
거란의 동경(東京)에 속한 요양(遼陽)보다 약간 남쪽 지역이라고 보며 거란에 의해 요양(遼陽) 남쪽에 거주하게 된 여진(女真, 여직[女直])인이 가해자다. 거란에선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이라고 칭했다.
내가 이렇게 보는 근거는 아래의 대금국지 본문과 만주원류고 편저자들이 주석한 내용 때문이다.
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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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로 번리[藩籬 울타리 담장]이다. '지'에는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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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遼陽)의 남쪽에 거주하던 여진(女真)인은 거란에 의해 본국(이 문장에서 여진의 본국은 지금의 길림시에서 북쪽의 하얼빈 주변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진인들의 실제 본국은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주변 지역이라고 본다)과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하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哈斯罕关别名苏州关关址 ,是辽圣宗统和九年(991) 所建关隘。初建时以木栅为关。
木栅在契丹语称“哈斯罕”,故名。
位于辽东半岛南端黄海与渤海之间的狭窄地带,现地属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
历史沿革
据《宋会要辑稿·番夷》记载,辽契丹太祖天显元年(926),辽灭渤海(国),但女真部族仍与宋朝保持经济往来,并向宋朝进贡。
辽“虑女真为患”,为“分其势,使不得相通”,便强制将女真人迁到熊岳至金州一带,并在辽南置扶州(后改复州),设怀德军节度;置苏州(今金州),设安复军节度。
但居于开原至松花江一带的女真部族仍通过海路与宋朝保持往来。
辽为绝其“贡献之路”,于辽圣宗统和九年(991)在金州地峡修筑关墙,派驻3000兵员防守。(现证实镇东海口长城为辽太祖登基初年修筑)
关墙初建时以木栅围成,金代至元代陆续改建为土石结构。
明代以后,此关渐废;亦有说法为废弃时间在金元之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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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사한관(哈斯罕关)으로도 알려진 소주관은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건설된 요충지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목책으로 지어졌었다. 목책은 거란어로 "합사한(hāsīhǎn)"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지어졌다. 요동반도 남단, 황해(우리나라의 서해)와 발해(Bohai sea) 사이의 좁은 지역(요동반도)에 위치하며 현재 대련시 감정자구대련만가도에 속한다.
역사연혁(历史沿革)
《송회요집고:번이》에 의하면, 요나라 거란 태조 천현 원년(926년),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여진부족은 송나라와 경제적인 연관 때문에 교류를 유지하며 송나라에도 조공을 병행했다(발해국에 부속된 여진은 발해국이 거란에 멸망했으니 이후 거란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진은 송나라에게 경제적으로 연계돼 있어서 송나라에게 조공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요나라는 "여진족이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그 세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진족을 웅악에서 금주 일대까지 강제 이주시키고 아울러 요나라 남쪽에 부주(후에 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설치했다. 회덕군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다; 소주(현재의 금주)를 설치하고, 안복군 절도사를 두었다.
그러나 개원(开原)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부족은 여전히 바닷길을 통해 송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며 왕래했다.
요나라는 '공헌지로(아마도 생여진이 송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뜻한다고 본다)'을 차단하기 위해,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금주의 땅의 협곡에 성벽(关墙)을 쌓고 3000명의 병력을 배치해 방어했다. (정지진 동해구의 장성은 요태조가 즉위 초기에 축조한 것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다)
성벽(关墙)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금나라로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진 계속하여 흙과 석조로 구성된 건축물로 재건되었다.
명나라 이후, 이 관은 점차 폐기되었고, 폐기된 시기는 금나라에서 원나라로 바뀌던 시기였다고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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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면 거란은 발해 멸망 후인 926년 후부터 지금의 개원시와 송화강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족(女真)들 중에 일부를 이주시켜 요동반도의 대련시감정자구대련만가도(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에 거주케 한 후 991년부터는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하며 본격적으로 관리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백과사전에선 개원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부족(开原至松花江一带的女真部族)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곳은 생여진(지금의 하얼빈시와 길림시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을 지칭한다) 외에 생여진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까지 거주하던 지역이고
생여진은 길림시 주변과 하얼빈시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중요 세력 중 야라(耶懒)는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해안가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래는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거란은 이곳에 이주시킨 여진(女真)인들을 관할하는 소주(苏州)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 지역이 바로 거란에 의해 여진(女真)인들이 이주된 지역이다.
요동반도(辽东半岛)의 끝자락 귀퉁이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女真)인을 거란에선 합사한(哈斯罕)이라고 칭했다.
이 지역이 거란의 울타리 내지 담장으로 칭해진 것을 볼 때,
실질적으론 동경 요양(東京 遼陽) 부근까지가 거란의 완전한 영역이며 이 지역은 거란의 속번으로서 고려와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본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거란이 일부러 생여진을 동경 요양(東京 遼陽) 남쪽이자 압록강(鴨綠江) 바깥(外)인 요동반도(辽东半岛)에 이주시켜 고려와의 완충지대를 만든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갈소관(曷苏馆) 에 대한 중국 한어사전내용이다.
아래는 갈소관(曷苏馆) 에 대한 중국 한어사전내용의 원문과 번역이다.
曷苏馆
路名。又作遏速馆、合思罕、合苏款、苏馆。金置。治所在今辽宁复县西北。辖境相当今辽东半岛中部地区。明昌四年(1193年)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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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소관(hésūguăn)
도로 이름이다. 또한 알속관(èsùguǎn), 합사한(hésīhǎn), 합소관(hésūkuǎn), 소관(sūguăn)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나라에서 설치했다. 행정을 총괄하는 지역은 현재 요녕성 복현 북서쪽에 위치했었다. 관할 지역은 대략 지금의 요동반도의 중부지역에 해당된다. 명창 4년(1193 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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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의해 이주된 여진(女真)인들을 관할하던 곳이 금나라 때는 요동반도(辽东半岛) 중부라고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금나라 때는 갈소관(曷苏馆 hésūguăn)으로 칭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한 뜻은 아니며 거란어의 음차표기인 합사한(哈斯罕 hésīhǎn)을 여진어로 발음한 후 그 발음을 한문으로 음차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요녕복현(辽宁复县)으로 추정되는 복주성진(复州城镇)구글지도이다.
금나라 때는 거란 때보다 위치가 요동반도(辽东半岛) 중부로 올라간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음력 991년 10월 3일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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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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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서 요동반도(辽东半岛) 지역으로 여진(女真, 여직[女直])인들을 이주시킨 후 이들을 991년도부터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하면서 관리했는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바깥(鴨綠江外)에 여진(女眞)족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991년도 10월 기사에 등장한다.
고려에선 백두산 외(白頭山外)로 쫓아 내었다고 하는데 바로 백두산(白頭山)에서 위로 올라가면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가 있고 동북쪽으로 가면 여진(女眞)족들이 흑수말갈(黑水靺鞨)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연해주이다.
요동반도(辽东半岛)에 거주하는 여진(女真, 여직[女直])인 입장에서는 거란에 의해 요동반도(辽东半岛)로 이주했었는데 고려에 의해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래는 압록강(鴨綠江)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지금의 금주(金州)에 근거지를 둔 여진(女真, 女眞, 여직[女直])인들이 부근에 있는 고려의 영역인 압록강(鴨綠江) 외(外)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 이전까진 고려의 영토는 지금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인 청천강(淸川江)까지라는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류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고 본다.
아래는 백두산(白頭山)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백두산에서 북쪽에 지금의 길림시와 하얼빈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94 열전 제신(諸臣) 서희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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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가주에 투항한 여진을 동번으로 보냈다는 고려사 기사나 서경 반군을 다루는 기사에 가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가주는 압강에서 서경 사이에 위치하고 압강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압강, 가주, 안북부, 서경 순서로 위치해있다고 해석된다)·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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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동경(東京)에 요양(遼陽)이 속해 있다. 따라서 대금국지에 기재된 '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往來)'는 내용과 서로 일치한다.
고려사에선 요동반도(辽东半岛)에 거주하는 여진(女真, 여직[女直])인을 생여진(生女眞)으로 표현했는데 이들은 원래 요동반도(辽东半岛) 출신이 아닌 생여진(生女眞)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은 동경 요양(東京 遼陽) 남쪽에서 고려 땅인 안북부(安北府)까지 거주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안북부(安北府)가 어딘지 알면 여진(女真, 女眞)족들이 무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을 알 수 있다.
아래는 다시 위의 고려사 기록이다.
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 契丹東京留守蕭遜寧, 攻破蓬山郡, 獲我先鋒軍使·給事中尹庶顔等, 成宗聞之, 不得進乃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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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도 친히 방어하고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까지 가서 머물렀다. 〈그 때〉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하고, 아군의 선봉군사(先鋒軍使)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顔) 등을 포로로 삼자, 성종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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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에 기재된 이 문장을 보면,
성종(成宗)은 거란을 방어하고자 직접 고려 서경(西京)에 행차한 후 안북부(安北府)까지 머물었다(成宗欲自將禦之, 幸西京, 進次安北府)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안북부(安北府)는 고려에선 최전방이며 서경(西京)과 가까운 지역이다.
고려 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에 보면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고 기재했다.
즉, 지금의 중국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보는 지역이다.
따라서 안북부(安北府)는 중국환인만주족자치현 부근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내용이다. 994년 2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3년 2월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甲午)十三年 春二月 蕭孫寧致書曰, “近奉宣命, ‘但以彼國信好早通, 境土相接. 雖以小事大, 固有規儀, 而原始要終, 須存悠久. 若不設於預備, 慮中阻於使人. 遂與彼國相議, 便於要衝路陌, 創築城池者.’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修築. 伏請, 大王預先指揮, 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踏行穩便田地, 酌量地里遠近, 幷令築城, 發遣役夫, 同時下手, 其合築城數, 早與回報. 所貴, 交通車馬, 長開貢覲之途, 永奉朝廷, 自協安康之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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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요즈음 받든 우리 황제의 명령[宣命]에 말씀하시길, ‘다만 고려(高麗)와는 좋은 우호관계가 일찍부터 통하였고 국경이 서로 맞닿았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事大)에 진실로 합당한 규범과 의례가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을 살펴본다면 모름지기 오래도록 〈우호관계를〉 남겨야 한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신의 〈길이〉 도중에 막힐까 걱정이다. 따라서 고려와 서로 상의하여 길의 요충지에 성곽과 해자를 쌓아 만들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 쌓는 공사를 착수할까 합니다. 삼가 요청하건대 〈고려의〉 대왕(大王)께서 미리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을 했다. 원문엔 압록강이 아닌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지금의 계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10km이다)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성들 사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게 하시고, 아울러 성을 쌓을 일꾼들을 보내 〈우리 측과〉 같이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며, 쌓을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 빨리 회보(回報)하여 주십시오. 귀한 것은 거마(車馬)가 오가며 통함으로써 길이 조공(朝貢)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과 영원히 우리 조정을 받들어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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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선 모두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했지만 실제 원문은 모두 압강(鴨江)이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지금의 의주 위인 압록강(鴨綠江)에서 요동(辽东)방면으로 즉, 북쪽에 있는 지류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서로 구분한다.
고려사에 보면 안북부(安北府)가 서경(西京)보다 고려에선 더 최전방이고 압강(지금의 애하[Aihe River]라고 본다) 동쪽에서 280리(대략 110km)에 안북부(安北府)가 있다고 하니 지도를 보고 계산하면 고려 서경(西京)으로 보이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과 인접한 서쪽 지역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고려 때 압강(鴨江)으로 추정되는 중국 애하(Aihe River)의 구글지도이다.
이 애하(Aihe River) 동쪽에서 280리(대략 110km) 거리를 계산하면 고려 때 서경(西京)으로 보이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서쪽부근에 해당한다.
즉, 고려사에서 고려 성종(成宗)이 서경(西京)을 지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렀다는 바로 안북부(安北府)는 환인만주족자치현의 서쪽부근인 것이다.
아래는 고려 서경(西京)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의 오녀산 구글지도이다.
고려와 거란의 승천황태후 때 서로 합의한 경계는 서해에서 의주까진 압록강(鴨綠江), 의주에서 천황학주의 성까진 압강(鴨江)이기 때문에 서경(西京)에선 서쪽에 위치한 압강(鴨江)에 가까이 갈수록 고려의 최전방이 되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제12 지리3(地理 三) 북계 안북대도호부 영주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지리지 권제12 지리3(地理 三) 북계 안북대도호부 영주에 대한 내용이다.
安北大都護府寧州本高麗彭原郡. 太祖十四年, 置安北府. 成宗二年, 稱寧州安北大都護府. 顯宗九年, 稱安北大都護府. 高宗四十三年, 避蒙兵, 入昌麟島. 後出陸. 恭愍王十八年, 置安州萬戶府. 後陞爲牧. 別號安陵【成廟所定】, 有淸川江【古稱薩水, 卽高句麗乙支文德敗隋兵百萬之地】. 領防禦郡二十五, 鎭十二, 縣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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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는 본래 고려의 팽원군(彭原郡)이다. 태조 14년(931)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 성종 2년(983)에 영주(寧州)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다. 현종 9년(1018)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다. 고종 43년(1256)에 몽고 병사를 피해 창린도(昌麟島)에 들어갔다가 뒤에 육지로 나왔다. 공민왕 18년(1369)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안릉(安陵)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청천강(淸川江)이 있다【옛날에 살수(薩水)라고 불렀는데, 곧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병사 1,000,000명을 격퇴한 곳이다.】. 관할하는 방어군(防禦郡)이 25개이고, 진(鎭)이 12개이고, 현(縣)이 6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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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지리지는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 때 기록을 보고 고려 때의 지역을 조선시대에 추정한 내용이다. 따라서 정확한 내용이 아니다.
더군다나 조선의 정치적인 문제가 걸린 경우 더욱 정확하지가 않다.
조선의 학자들은 고려사 지리지의 서문에서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鴨綠江)까지로 제한했다.
따라서 고려 때 사건을 기술할 때 고려의 압록강(鴨綠江) 위이며 압강(鴨江)의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압록강(鴨綠江) 아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기술하거나 사실과 다른 기술을 하는 경우가 보인다(강조[康兆]가 거란과 치룬 전투도 요사와 고려사 내용이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선 고려의 황성(皇城 서경)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도 기재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압록강(鴨綠江) 북쪽 요동지역에 여진 황제의 황성(皇城)은 없었다.
같은 이유로,
조선의 학자들은 안북대도호부(고려사에 기재된 안북부[安北府]이다)도 청천강(淸川江) 주변으로 해석해서 고려사 지리지에 기재하고 있다.
이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청수강(淸水江)을 청천강(淸川江)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청천강(淸川江)은 지금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하지만 고려사에 기재된 청수강(淸水江)을 청천강(淸川江)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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