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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동북경계와 복간수(僕幹水), 야라(耶懒) (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원문과 번역이다.
“‘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者, 靑木松也, 謂松嶽郡人, 以龍爲名者之子孫, 可以爲君主也. 王侍中, 有王侯之相, 豈謂是歟? 黑金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初盛於此, 殆終滅於此乎! 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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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가운데 사유 아래로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체를 드러낸다.’라는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이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에게 왕후(王侯)의 상이 있으니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바인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께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끝내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로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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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있을 당시의 예언을 풀이하는 내용이다.
'왕시중(王侍中, 왕건)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계림(鷄林)은 지금의 길림시 지역을 뜻하며 압록강(鴨綠江)은 지금의 환인만주족 자치현을 뜻한다고 본다.
이 예언에서 지칭하는 계림(鷄林)은 신라의 도읍인 경주(慶州)가 아니다.
위의 내용은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볼 때 실제 실현된 내용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다면 고려의 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거다.
태조 왕건이 반드시 황제가 되는 것은 천명임을 나타낸 예언이기 때문에 이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왕건의 황제 득위 정당성은 없어진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이다.(921년 10월 20일(음) 임신(壬申))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壬申 幸西京. |
임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
따라서 왕건이 황제가 된지 4년 후인 921년에 마한(馬韓)과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예언은 실현이 되었다.
그런데 예언의 순서를 보면,
진한(辰韓)에 속하는 계림(鷄林 지금의 길림시)을 얻는 것은 마한(馬韓)과 압록강(鴨綠江)을 얻는 것보다 먼저 실현되었어야 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며 후삼국시대의 일리천 전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大相庾黔弼, 元尹官茂·官憲等, 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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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
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의 정예 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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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서는 길림(吉林)보다 북쪽에 위치한 철륵(鐵勒)과 흑수(黑水)를 고려태조 왕건이 치룬 일리천 전투 때 고려(高麗)의 제번(諸蕃)이라고 기재한다.
따라서 이 당시 계림(鷄林 지금의 길림시)은 이미 고려의 영토였거나 간접적으로 고려의 제번(諸蕃)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내용 중 철리(鐵利)에 대한 내용이다. (936년 9월 8일)
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원문과 번역이다.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陳. 太祖與尚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竒彦等, 領歩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鐡·洪儒·守郷·將軍王順·俊良等, 領歩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鐡騎二萬·歩卒三千及黒水·鐡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皷行而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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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맞서 진을 쳤다. 태조는 상보(尙父) 견훤과 함께 열병하였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좌익(左翼)으로 삼았다. 대상 김철(金鐵), 홍유(洪儒), 수경(守卿), 장군 왕순(王順), 준량(俊良) 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우익(右翼)으로 삼았다. 대광(大匡) 순식(順式), 대상 긍준(兢俊), 왕겸(王謙), 왕예(王乂), 금필(黔弼), 장군 정순(貞順), 종희(宗熙) 등으로 하여금 철기(鐵騎) 20,000, 보병 3,000 및 흑수(黑水), 철리(鐵利) 등 여러 도(道)의 날랜 기병 9,5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중군으로 삼았다. 대장군 공훤(公萱), 장군 왕함윤(王含允)으로 하여금 군사 15,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다.註 028〔군사들은〕 북을 치며 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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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재된 일리천 전투는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선 고려사에 기재된 철륵(鐵勒)을 철리(鐵利)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사에 기재된 철륵(鐵勒)은 바로 철리(鐵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에선 철륵(鐵勒)을 고려의 울타리 내지는 부속이라는 뜻의 번(蕃)으로 기재하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철리(鐵利)를 지역의 고려에 부속된 지역인 도(道)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와 고려사 모두 철륵(鐵勒, 철리[鐵利])과 흑수(黑水)는 고려의 부속이라는 뜻이며 고려에 종속된 지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 파란색 글씨는 내가 해설한 내용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兄阿古廼好佛,留高麗不肯從,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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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왔다, 당시 나이는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내(阿古廼)는 불교를 좋아해서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후세의 후손들은 분명 모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갈 수 없다"며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오직 동생 보활리(保活里)만 함께 갔다.
시조(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완안부족(完顏部) 복간수(僕幹水)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保活里)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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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시조는 함보(函普 hán pǔ)이다. 우리나라에선 함보(函普)가 신라 김씨라고 인식하고 김함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성은 기록에 없고 함보(函普 hán pǔ)만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따라선 합부(哈富 hā fù), 감복(龕福 kān fú) 등 여러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고 후에 청나라에선 샨푸(ᠰᠸᠶᠠᠠ ᡦᡠ Siyan Pu)라는 발음으로 표기한 것을 볼 때
위의 한자들로 표기된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며 만주어 샨푸(ᠰᠸᠶᠠᠠ ᡦᡠ Siyan Pu)와 비슷한 여진어 발음을 당시에 들리는 데로 한자로 표기한 음차표기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의 내용이다.
아래는 금나라 역사를 다룬 금사(金史)를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이 해설한 만주원류고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이다.
金自始祖四遷至此後為上京故地實與今阿勒楚喀拉林河源相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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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는 시조로부터 네번 옮겨서 이곳에 이르렀으며 뒤에 강역이 되었다.
옛 땅은 실제로 지금의 아륵초객과 납림하의 수원과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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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한림원이 편찬한 만주원류고를 보면,
금나라는 시조 함보(函普)로부터 그의 후예가 지금의 하얼빈시 아성구에 거주하기까지 네 번에 걸쳐 거주지가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금나라를 세운 것으로 청나라에선 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완안부(完顏部)의 거주지 중 납림하(拉林河) 수원(발원지)이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나는 금사(金史)에서 완안부(完顏部)의 초기 거주지 위치 기록을 못 봤는데 아마도 청나라나 여진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납림하(拉林河)의 구글지도이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사의 내용을 풀이한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함보(函普)가 거주한 복간수(僕幹水)를 현재의 납림하(拉林河) 발원지로 해석한다.
구글지도를 보면 복간수(僕幹水) 서쪽 8시 방향에 길림시가 있고 동쪽 4시 방향에 영안시(宁安市 발해의 용천부[龍泉府])가 있다.
영안시(宁安市)는 거란황제가 밝힌 '고려의 최북단은 용천(龍泉)에 이른다'는 바로 그 용천(龍泉)이 있던 곳으로 해석되는 지역이다.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가 고려를 나와서 완안부(完顏部)에 거주했는데 고려 밖인 완안부(完顏部) 초기 거주지인 지금의 납림하(복간수)가 지금의 길림시(계림)나 영안시(용천) 보다 북쪽 지역인 것을 볼 수 있다.
중국백도백과에서 소개하는 완안부(完颜部)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서 소개하는 완안부(完颜部)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서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 파란색 글씨는 내가 해설한 내용이다.
耶懒部,完颜保活里之后,居于耶懒之地,今俄罗斯联邦滨海边疆区游击队城苏昌河流域,今谓之帕尔季赞斯克河(r.Partizanskaya)。
史载:“昭祖耀武至于青岭、白山,顺者抚之,不从者讨伐之,入于苏滨、耶懒之地,所至克捷。”
苏滨即率宾、绥芬,在今绥芬河流域。金景祖完颜乌古乃时期,耶懒部归附完颜部。
“景祖稍役属诸部,自白山、耶悔、统门、耶懒、土骨论之属,以至五国之长,皆听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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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라부(耶懒部),완안보활리(完颜保活里) 이후 야라부(耶懒)의 영역이 되었다, 지금의 러시아연방빈해변강구유격대성소창하류역(俄罗斯联邦滨海边疆区游击队城苏昌河流域),위지말리계찬사극하(谓之帕尔季赞斯克河) 현재 파르티잔강이다 (r.Partizanskaya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발음으로 하면 빨치산강이다).
사료: "소조(昭祖 금나라의 추존황제 완안석노[完顔石魯] 추장재위기간 1005~1021)가 예로부터 무력을 드러내며 청령(青岭)과 백산(白山)에 갔는데, 순종하는 자는 위무를 받고, 따르지 않는 자는 공격을 당하였다. 소빈(苏滨)과 야라(耶懒)의 땅에 들어가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소빈(苏滨)은 솔빈(率宾)이다, 지금의 수분하(绥芬河) 유역이다. 금경조 완안오고내(金景祖完颜乌古乃 1021~1074) 때, 야라부(耶懒部)는 완안부(完颜部)에 귀부했다.
"경조(金景祖完颜乌古乃)는 다양한 부족을 복속시켰고, 백산(白山)、야회(耶悔)、통문(统门)、야라(耶懒)、토골논(土骨论) 다섯 부족국가의 추장들은 모두 명령에 복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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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부(完顏部)는 3개 세력으로 나뉜다고 한다. 이 중에 야라부(耶懒部)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백도백과에서는 야라(耶懒)의 강역을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빨치산강) 유역으로 본다.
만주원류고와 백도백과에선 통문(统门)을 두만(豆滿)으로 해석하는 데 나는 이 견해를 따르진 않는다.
통문(统门)은 두만강(豆滿江, 중국간체자 图们江)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두만강(豆滿江, 만주발음Tumen Bira, 중국간체자 图们江)의 두만(豆滿)은 투르크어 두만(豆漫, tümen)에서 유래한 한문이기 때문이다.
통문(统门)의 중국발음은 tǒngmén으로 투르크어 tümen이나 만주발음 Tumen과 다르다.
즉, 통문(统门)은 투르크어 tümen이나 만주발음 Tumen과 유사한 여진어를 음차한 것이 아니다.
투르크어 투멘(tümen)의 음차표기가 바로 두만강(豆滿江) 내지 토문강(土門江 Tǔmén jiāng)이라고 말씀드렸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토문강(土門江) 세력으로 분류한 오랑캐 유파아손은 두만강(豆滿江) 부근에서 거주했다.
아래는 러시아 파르티잔강(빨치산강)의 구글지도 내용이다.
중국백도백과에선 이곳에 야라(耶懒)가 있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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