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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용천(龍泉)과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거란에서 고려국왕을 책봉하는 내용이다. (1097년의 기사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원문과 번역이다.
十二月 癸巳 遼遣耶律思齊·李湘, 來賜玉冊·圭印·冠冕·車輅·章服·鞍馬·匹叚等物. 冊曰, “朕以昊蒼眷祐, 祖宗貽範, 統臨天下, 四十有三載矣. 外康百姓, 內撫諸侯, 咸底于道. 而海隅立社, 北抵龍泉, 西極鴨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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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계사 요(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와 이상(李湘)을 파견하여 옥책(玉冊), 규(圭), 인(印), 관면(冠冕), 차로(車輅), 장복(章服), 안마(鞍馬), 필단(匹叚) 등의 물건을 보냈다. 책문(冊文)에서 말하기를,
“짐이 하늘에서 돌보아주심과 조종(祖宗)께서 남기신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 43년이 되었다. 밖으로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안으로는 제후를 어루만져 모두 바른 길로 가게 하였다.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鴨綠)에 닿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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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경계가 북쪽은 용천(龍泉)에 이른다고 거란의 황제가 직접 밝히고 있다(北抵龍泉, 西極鴨綠).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臣伏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甫叅於禹會. 獎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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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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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씀드린 거란의 황제가 직접 고려와 거란의 경계를 밝힌1097년보다 9년 전인 1088년도에 고려선종이 밝힌 내용이다.
따라서 두 내용은 같은 합의 내용을 밝힌 것이라고 본다.
고려선종은 거란의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때 확정된 양국의 경계를 거란의 황제에게 다시 한 번 언급한다(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당시 고려와 거란의 경계는 이 표문에 기재된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라는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이란 요동(遼東)에 있는 성을 뜻한다.
요동(遼東)은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중국 영토이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은 서해에서 의주 까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고,
의주에서 천황학주의 성까지는 요동(遼東)을 흐르는 압강(鴨江)을 경계로 하며,
다시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에서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까지 선을 그은 후 이 선의 서쪽은 거란의 땅 선의 동쪽은 고려의 영토로 했다.
결국 고려와 거란의 경계 중 북단은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이다.
거란의 황제는 고려와 거란의 경계 중 북단은 용천(龍泉)에 이른다고 밝힌다.
따라서 고려선종이 밝힌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와 거란황제가 지칭한 용천(龍泉)은 같은 지역을 다른 명칭으로 표현했거나,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는 용천(龍泉)에 이르는 장소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삼국지 위서 권100 열전 제 88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삼국지 위서 권100 열전 제 88 내용 중 일부이다.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棄夫餘東南走中道遇一大水欲濟無梁夫餘人追之甚急朱蒙告水曰我是日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兵垂及如何得濟於是魚鼈並浮為之成橋 |
위의 삼국지 내용은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부여 동남(夫餘東南)으로 도피하던 중 큰 강(大水)을 만난 내용이다.
주몽은 큰 강 앞에서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외친다(朱蒙告水曰我是日子).
그러자 강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준다(魚鼈並浮為之成橋).
위의 내용을 보면 日子(일자, 태양의 아들)와 鼈(별, 자라), 橋(교, 다리)가 등장한다.
즉, 고려에서 거란의 황제에게 보낸 표문에 등장하는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이라는 문구는 '주몽이 자라가 만들어 준 다리를 이용해서 건넌 강'이라는 의미이다.
위의 삼국지에선 강의 위치를 부여 동남(夫餘東南)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선 부여엄리대수(夫餘奄利大水)라고 기재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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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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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저술된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강의 이름을 엄사수(淹㴲水)라고 기재한 후
그 엄사수(淹㴲水)의 위치를 삼국사기 저자가 직접 주석하며 밝힌다.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在今鴨綠東北)'
즉, 압록강 동북쪽(鴨綠東北)에 주몽이 건넌 엄사수(淹㴲水)가 있음을 밝힌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과 번역이다.
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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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字) 불명(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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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다.
주몽이 건넌 강은 부여 엄리대수(夫餘奄利大水)라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주몽이 건넌 강을 부여 지역에 있는 강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삼국지 위서에선 부여 동남(夫餘東南)으로 기재한다.
삼국지 위서에서 부여 밖의 지역으로 기재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고구려인은 북부여(北扶餘)와 동부여(東夫餘)를 나눈 후 동부여(東夫餘)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으로 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비에선 동부여(東夫餘)도 북부여(北扶餘)의 영토로 본 후 주몽이 건넌 엄리대수(奄利大水)는 부여(扶餘)에 있는 것으로 기재했다고 본다.
하지만 삼국지 위서의 저자는,
부여(夫餘)는 하나이고 고구려인들이 인식하는 동부여(東夫餘)는 부여(夫餘)가 아니라 숙신(후에 읍루의 영역이 되었다고 본다)계열로 봤기 때문에,
숙신 (후에 읍루의 영역이 되었다고 본다) 계열인 동부여(東夫餘)는 부여(夫餘)로 기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아래는 압록강(鴨綠江)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개사수는 압록강 동북쪽(鴨綠東北)에 있다고 기재했다.
압록강 동북쪽(鴨綠東北)이면 현재 길림시(吉林市)에서 약간 아래 지역이다.
아래는 중국 길림시(吉林市)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동부여(東夫餘)로 해석되는 길림시(吉林市)에서 남쪽 지역에 있는 제2송화강의 어느 지점이 주몽이 건넌 강인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용천부(龙泉府)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에 기재된 용천부(龙泉府)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龙泉府為遠東地區中世紀古國渤海国五都之一,稱上京,位于今中国黑龙江省宁安市西南之渤海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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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부(龙泉府)는 극동의 고대 중세 국가인 발해국(渤海国)의 다섯 개 수도(都) 중 하나이다. 상경(上京)이라고 불리며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서남쪽 발해진(黑龙江省宁安市西南之渤海镇)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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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려사에 보면 거란의 황제는 고려국왕에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北抵龍泉)'라고 발언하면서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 고려의 북단은 용천(龍泉)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거란의 황제가 밝힌 고려와 거란의 북쪽 경계인 용천(龍泉)에 이른 지역은 옛 발해의 용천부(龍泉府)에 접한 지역이라고 본다.
아래는 흑룡강성모단강시영안발해진(黑龙江省牡丹江市宁安渤海镇)구글지도이다.
옛 발해국(渤海国)의 수도 중 하나인 용천(龍泉)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내가 주몽이 건넌 강의 지점으로 추정하는 길림시(吉林市) 남쪽이 아니다.
고려에선 주몽이 건넌 강을 내가 생각한 제2송화강이 아닌 모단강(牡丹江)으로 보고,
모단강(牡丹江)이 흐르는 이 지역을 일자별교의 수(日子鼈橋之水)로 해석한 후 고려와 거란의 국경으로 정했다고 본다.
아래는 영문위키페디아에서 설명하는 발해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영문위키페디아에서 제공하는 발해의 행정지역 지도이다.
연해주 오른쪽에 바다를 접한 곳은 안변부(安邊府, ANBIAN)이고 안변부(安邊府, ANBIAN) 서쪽방향에 용천부(龍泉府,LONGQUAN)가 있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고려와 거란 전쟁 후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려와 거란의 국경 중 고려의 최북단인 용천(龍泉)에 이르는 지역은 옛 발해국의 용천(龍泉)에 접하고 있는 용천(龍泉)에 닿은 지역이고,
옛 발해국의 안변부(安邊府)와 고려의 안변부(安邊府)는 위치가 다르다고 본다.
고려의 안변부(安邊府)는 발해국으로 추정되는 연해주 해안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두만강(豆滿江) 북쪽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어느 지역이라고 본다.
고려의 여진정벌로 고려가 동여진으로부터 획득한 지역은 동여진의 요청으로 고려가 동여진에게 돌려주었고,
금나라 멸망 후 원나라 간섭기엔 고려의 동계와 테무게오치긴(鐵木哥斡赤斤) 영역 중 겹치는 영역이 발생하면서 고려사에도 기재되어 있듯이 그 지역은 99년간 원나라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주원장이 원나라의 계승성을 주장하고 조선 초인 1400년 대 초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에 의해
두만강(豆滿江) 주변엔 알타리(斡朶里)출신들의 건주위(建州衛), 오랑캐(兀良哈)출신들의 모련위(毛憐衛) 등의 명나라 위소(衛所)가 설치되면서,
명나라 영락제 때인 조선 초기에 조선의 영향력은 두만강(豆滿江) 주변과 그 건너 지역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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