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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秦韓),대조영의 진단(震旦), 궁예의 마진(摩震)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진한(秦韓),대조영의 진단(震旦), 궁예의 마진(摩震)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11. 11. 19:33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漢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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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其地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各有長帥大者名臣智散在山海間無城郭凡五十餘國總十萬餘户辰王治月支國魏景初中明帝宻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部從事吴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﨑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위지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쪽은 왜와 닿았고 그 지방은 사방 사천리이다.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이 서쪽이 있는데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한다. 각기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라 부른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모두 오십여 개 나라이고 합해서 십만여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위나라 경초 연간에 명제(위[魏]의 2대 황제이며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204년에 출생해서 239년에 사망했다)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주고, 그 다음 지위의 자들에게는 읍장의 관직을 주어 비로소 두 군을 안정화시켰다. 부의 종사인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다스렸으므로, 진한의 여덟 개 나라를 나누어 낙랑에 주려고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의 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자, 신지들이 한나라(韓) 지역민들을 격분시켜(臣智激韓忿)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웠다.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개 군은 마침내 한을 쳐서 없앴다(滅韓, 위지[魏志]에 따르면 한국[韓國]이 멸망한 것은 204년에서 239년이 된다).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秦)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섯 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서 열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었는데, 모든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모두 4~5만 호이다. 그 열두 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는데, 항상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졌다. 토지는 비옥하고 좋다. 변진과 한은 함께 산다. 또한 성곽이 있고 의복과 사는 집은 진한과 같다. 그 중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닿아 있다. 열두 개 나라 또한 왕이 있다.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지(魏志)를 보면 아래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진한(辰韓)의 조상은 진나라(秦) 출신의 망명자들인 것을 볼 수 있다(自言避秦役來適韓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음을 볼 수 있다(辰韓在馬韓東).
진한(辰韓)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진한(秦韓)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今有名之為秦韓者).
진한(辰韓)은 6개의 나라의 연맹체였다가 후에는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맹체 국가가 된 것을 볼 수 있다(始有六國分為十二國).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後漢書
馬韓邑落雜居無城郭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諸小别邑各有渠帥貿易以鐡為貨兒生欲其頭扁皆押之以石弁辰與韓辰雜居城郭衣服皆同其人形皆長大美髪而刑罰嚴峻
후한서
마한은 읍과 촌락에 잡거하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秦)에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여 오니, 마한(馬韓)이 동쪽 지방을 떼어 주었다". 그래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책과 집이 있다. 여러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무역을 할 때에 철을 화폐로 삼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평평하게 하기 위하여 돌로 머리를 눌러 둔다. 변진(弁辰)과 진한(辰)은 서로 섞여 살며, 성곽 의복은 서로 형태가 같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형벌은 엄준하다.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는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삼한(三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세명의 한(三汗)이 다스리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학자들은 국호가 삼한(三韓)인 것으로 착각해서 사서에 기술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건륭제(乾隆帝)의 주장을 바탕으로,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후한서(後漢書)의 문장인 '진한(辰韓)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秦)에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여 오니, 마한(馬韓)이 동쪽 지방을 떼어 주었다". 그래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르기도 하고(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이 해석된다.

진나라(秦) 사람들이 진나라(秦)의 노역을 피해 당시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도피했는데

​도피한 땅의 지도자인 마한(馬汗)이 진나라(秦) 망명자들에게 동쪽 지방을 떼어주었다.

그래서 동쪽 지방으로 이주한 진나라(秦) 망명자들은 그 지역의 관습에 따라 자신들의 지도자도 한(汗)이라 칭했고,

진나라(秦) 망명자들의 한(汗)이라는 뜻에서 진한(秦汗)으로 칭했다.

그리고 후에 진한(秦汗)은 진한(辰汗)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내용을 오인해서,

이 지역의 나라 국명이 한(汗)과 같은 발음인 한(韓)인 줄 알고 중국의 역사서에 한국(韓國)이나 삼한(三韓)으로 기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 지역의 지도자 명칭인 진한(辰汗 or 秦汗) 역시 진한(秦韓)이나 진한(辰韓)으로 기재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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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의 해석을 적용하면,

주몽이 고구려현을 세운 곳은 '마한(馬汗)을 지도자로 삼은 곳'인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추정하는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 구글지도이다.

즉, 이곳이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환런 만족 자치현 ·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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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가 있는 구글지도이다.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이 지역에 송양의 비류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치원의 학설이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보면,

이 지역은 후에 고구려가 되는 마한(馬韓)이기 때문에 마한(馬汗)이 다스리던 영토라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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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과 길림성 통화시 만발발자유지에서 동쪽에 진나라(秦) 망명자의 영토인 진한(辰韓)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4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28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port Parsed by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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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顯慶五年命蘇定方為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自是新羅漸有髙麗百濟之地其界益大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때)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까닭, 이유)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授法敏為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垂拱二年遣使來朝天授三年〈按册府元龜作長壽二年〉政明卒立其子理洪為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
현경 5년(660)에 명을 내려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삼고 수구과 육군 10만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서 영을 내려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차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점령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
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수공 2년(686)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천수 3년(살펴보면, '책부원구'에는 장수 2년으로 되어 있다)에 정명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효소왕)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은 장안 2년(702)에 죽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들인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라고 주석한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구당서(舊唐書)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신라(新羅)의 계림(雞林)을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로 해석했음을 볼 수 있다.

신라(新羅)가 진한(辰韓)을 구성하는 소국 중에 하나인 서라벌(徐那伐)로 시작했고 신라(新羅) 김씨의 시조가 A.D 65년에 태어난 곳은 계림(雞林)이니 계림(雞林)은 진한(辰韓)의 영토 안에 있는 지금의 길림(吉林)으로 해석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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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통전(通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通典
三韓後漢時通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晉梁二書作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另條詳後〉是其一國焉大者萬餘户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魏志作月支通考作自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
통전
삼한은 후한 때에 통교하였다. 그 첫째는 마한이고, 그 둘째는 진한이고, 그 셋째는 변한이다. ('진서', '양서'에는 변진[弁辰]으로 기록)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쉰네 개 나라가 있고,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닿았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고 그 남쪽은 또한 왜와 닿았다. 모두 일흔 여덟 개 나라가 있다. 백제(다른 조에서 상술)는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며 각기 산과 바다 사이 지역에 산다. 국토의 넓이가 합하여 사방 사천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모두 옛 진국이다(皆古之辰國也). 마한이 가장 커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 나라 출신을 진왕으로 세워 목지국('위지[魏志]'에는 월지[月支], '통고[通考]'에는 자지[自支]로 기록됨)에 도읍을 정하고 전체 삼한의 땅을 다스렸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마한 사람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통전(通典)의 내용을 보면,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라고 기재되어있다.

지금의 송원시(松原市)는 예맥(濊貊) 계열인 부여(扶餘)가 있었던 곳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송원시(松原市) 남쪽의 길림(吉林)이 예맥(濊貊)과 맞닿은 진한(辰韓)의 최북방으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인 청나라(大淸) 한림원 학자들은 해석한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 송원시(松原市)에 있었던 예맥(濊貊)은 북부여(北扶餘)이며, 아래의 길림(吉林)에 있었던 예맥(濊貊)화된 숙신(肅愼)은 동부여(東夫餘)라고 본다.

아래는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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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松原市)에서 남쪽 5시 방향에 길림시(吉林市)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송원시(松原市)에 예맥(濊貊)의 나라인 북부여(北扶餘)가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진한(辰韓)의 북쪽 경계는 예맥(濊貊)과 닿았다고 하니 송원시(松原市)에서 남쪽인 길림시(吉林市)가 진한(辰韓)의 최북방이었거나

예맥(濊貊)화된 숙신(肅愼)인 동부여(東夫餘)가 길림시(吉林市)에 있었고 예맥(濊貊)화된 동부여(東夫餘)를 숙신(肅愼)이 아닌 예맥(濊貊)으로 분류한다면,

지금의 길림시(吉林市)에서 남쪽 지역이 진한(辰韓)의 최북방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卷 第一) 기이(紀異)의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법률>행정>시호 정치>행정>군현>주·부 정치>행정>군현>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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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卷 第一) 기이(紀異)의 원문과 번역이다.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夲栗末靺鞨至其酋祚榮立國自號震旦, 先天中(玄宗王子)始去靺鞨號專稱渤海. 開元七年 己未祚榮死謚爲髙王. 世子襲立明皇賜典冊襲王, 私攺年號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亰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契丹攻破之其後爲丹所制.”
말갈(靺鞨)(물길(勿吉)이라고도 한다)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그 추장 조영(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창건하고 자칭 진단(震旦)이라 부르더니 선천(先天) 연간(현종(玄宗)의 임자(壬子)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불렀다. 개원(開元) 7년 기미(己未)(719년)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세자(世子)가 이어서 왕위에 오르니 명황(明皇)이 왕위 계승의 책문을 내리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던 바, 사사로이 연호(年號)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어 이 지역에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 나라를 부수고 그 후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통전(通典)을 인용해서 아래와 같이 기재한다.

'그 추장 조영(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창건하고 자칭 진단(震旦)이라 부르더니(其酋祚榮立國自號震旦)'

즉, 대조영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진단(震旦)으로 칭했다고 한다.

아래는 두산백과에서 진단(震旦)을 설명한 내용이다.

 

진단

고대에 인도에서 중국을 부르던 별칭. 진(震)은 진(秦)의 음이 전와(轉訛)한 것이며 '진토(秦土)', 즉 '진나라 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치나스타나(Chīnasthāna)에 중국인이 한자를 갖다맞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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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두산백과에서 진단(震旦)을 설명한 내용 중 일부이다.

진(震)은 진(秦)의 음이 전와(轉訛)한 것이며 '진토(秦土)', 즉 '진나라 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치나스타나(Chīnasthāna)에 중국인이 한자를 갖다맞춘 것이다................

대조영이 칭한 국호인 진단(震旦)진나라(秦)인의 진나라 영토(秦土)라는 뜻인 것을 볼 수 있다.

즉,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면서 바로 그 지역의 옛 국가였던 진한(辰韓)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진한(辰韓)의 원래 유래이자 명칭인 진나라(秦) 망명자들의 땅 진한(秦韓)을 의식해서 지금의 길림성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나라이름을 진단(震旦)으로 정했다고 본다.

아래는 길림성 돈화시(敦化市)의 구글지도이다.

 

둔화 시 ·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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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들인 한림원 학자들은 진한(辰韓)의 최북단 영토를 지금의 길림시(吉林市)로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의 길림시(吉林市)에서 동쪽지역에 대조영이 진단(震旦, 해석하면 진나라 영토[秦土]이다)인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敦化市)가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와 지역민들은 진한(辰韓)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대조영은 진한(辰韓)의 선조인 진나라(秦) 망명자들의 땅 진한(秦韓)을 고려해서 자신이 세운 나라의 국호도 진단(震旦)으로 정했다고 보인다.

아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마진(摩震)에 대한 내용이다.

 

마진(摩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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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마진(摩震)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마진’은 범어(梵語)에서 크다[大]는 뜻을 가진 ‘마하(摩訶)’와 진인(秦人)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뜻의 ‘cinitana’를 음역한 ‘진단(震旦)’을 합성하여 만든 ‘마하진단’의 약칭이었다는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단’은 본래 인도인이 중국을 지칭하던 말이었으나 점차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마진은 대동방국을 뜻한다고 한다.................

위의 설명을 보면 마진(摩震) 역시 진단(震旦)과 같은 의미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 50 열전 궁예(弓裔)의 내용이다.(904년 (음))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무태라고 하다 ( 904년 (음) ) 천우(天祐) 원년 갑자(904)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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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 50 열전 궁예(弓裔)의 원문과 번역이다.

天祐元秊甲子, 立國號爲摩震, 秊号爲武泰.
천우(天祐) 원년 갑자(904)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궁예대왕은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즉, 대조영이 세운 나라인 진단(震旦)과 같은 의미로 국호를 바꾼 것이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궁예대왕은 신라 김씨의 후손이며 신라의 왕자 출신이고 898년 송악에 도읍한 후 901년엔 왕(호칭은 '대왕'으로 추정된다)을 칭했다.

송악(松嶽)에 도읍하기 전인 896년 송악군(松嶽郡)출신 용건을 만났을 때 궁예대왕은 용건에게 송악(松嶽)에 성을 쌓을 것(城松嶽)을 제안 받았다

(단순히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송악[松嶽]에 도읍을 세울 것을 제안받은 거라고 본다).

결국, 궁예대왕은 고구려유민의 정서를 반영해서 국호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미의 고려(高麗, 후고구려)로,

도읍은 송악출신 용건의 의견을 반영해서 송악(松嶽)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궁예대왕은 출신이 신라 김씨에 신라왕자이기 때문에,

무너지는 신라가 원래의 신라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신라 내에서 반정부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궁예대왕은 고려(高麗, 후고구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고구려유민이 원한 고려(高麗,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고 본다.

마진(摩震)이라는 국호가 원래의 진한(秦韓)이자 진한(辰韓)의 선조인 진단(震旦, 해석하면 진나라 영토[秦土]이다)을 뜻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고구려유민들의 반감을 일으키게 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송악(松嶽)출신 왕건은 고구려유민이 아니다.

따라서 왕건은 이 당시 제3자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 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권 제1(卷一) 세가(世家)의 원문과 번역이다.

“‘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者, 靑木松也, 謂松嶽郡人, 以龍爲名者之子孫, 可以爲君主也. 王侍中, 有王侯之相, 豈謂是歟? 黑金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初盛於此, 殆終滅於此乎! 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삼수 가운데 사유 아래로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사년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체를 드러낸다.’라는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龍)자 이름을 가진 이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에게 왕후(王侯)의 상이 있으니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바인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께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끝내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로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왕건이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있던 당시의 내용이다.

그 당시 예언을 풀이하는 내용인데 '왕시중(王侍中, 왕건)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계림(鷄林)은 지금의 길림성 지역을 뜻하며 압록강(鴨綠江)은 지금의 환인만주족 자치현을 뜻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주장하는 경주의 신라가 이 예언에서 지칭하는 계림(鷄林)은 아니다.

위의 내용은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볼 때실현된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즉, 고려태조 왕건이 후에 직간접으로 확보한 지역임을 뜻한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길림(吉林)보다 북쪽에 위치한 철륵(鐵勒)과 흑수(黑水)가 고려태조 왕건이 치룬 일리천 전투 때 고려(高麗)의 제번(諸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