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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낙랑군, 현도군 고구려현, 고려의 정체성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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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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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삼국사기 저자는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저자는 한사군(漢四郡) 중에 하나인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인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주몽이 한나라(漢) 현도군 속현(玄菟屬縣)에서 도읍한 것이니 주몽은 한나라(漢) 영토에서 고구려(졸본부여)를 건국한 것이 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구당서(舊唐書)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구당서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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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句麗, 이 문장의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 출신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都)하였다, 즉 한나라 낙랑군(漢 樂浪郡)의 옛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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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구당서(舊唐書)의 저자는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平壤城)을 옛 한사군(漢四郡) 중에 하나인 한나라(漢) 낙랑군(樂浪郡) 지역이었다고 보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427년 음력)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都囯内歴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歴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歴八十三年, 寳臧王二十七年而滅 (古人記録, 自始祖朱蒙王寳臧王, 歴年丁寧纎悉若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亰,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壖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艫千里, 髙㠶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逺近, 則不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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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이 지나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朱蒙王)으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歷年)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년)에 (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고려] 서경(西京)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 입구의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수양제(隋煬帝)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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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저자는 당서(唐書)의 내용인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라는 구절을 인용한 후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고려의 서경(西京)이며 고려 서경은 바로 옛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지역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을 읽었을 삼국사기 저자가 고구려 평양성이 한사군(漢四郡) 지역인 낙랑군(樂浪郡)이라는 당서(唐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삼국사기 저자의 역사관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모순된 행동이다.
즉, 삼국사기 저자가 밝힌 역사관이라면 당서(唐書)의 내용을 부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 저자는 당서(唐書)의 내용을 인정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論曰. 玄莬·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皆天子有司, 亂丗則英雄特起, 僭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埸以讎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歳. 及其東遷, 值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圡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竒以䧟大軍, 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太國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以福, 其亡也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有味哉斯言也. 夫然則凢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強宗之聚歛,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強酒而惡醉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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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지 않으며, 부인은 지조가 굳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한 것이 3방(三方)과 달랐으므로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는 “2는 칭찬이 많고, 4는 두려움이 많아 가깝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현도군 소속의 고구려가 있던 요양의 서쪽 요산에서 압록강부근으로 고구려의 도읍을 옮겼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는 아무리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의롭지 않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의 원망을 일으키게 되면서 무너져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좌씨(左氏)는 말하기를, “나라를 일으키는 것은 복이 있기 때문이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일으킬 때에는 백성을 보는 것을 다친 사람 보는 것처럼 하니 이것이 그 복이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흙이나 먼지처럼 하찮게 여기니 이것이 그 재앙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의미가 깊도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가진 자가 포악한 관리가 〔백성을〕구박하는 것과 강한 종족이 남의 재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내버려 두어 인심을 잃는다면, 아무리 잘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또 어찌 강한 술을 마시고 취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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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자조선이라고 본다)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연나라(全燕)에게 서쪽 영토 일부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주몽이 전한(前漢) 때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것과는 별개로(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를 물려받았다고도 본다)
고죽국(孤竹國)의 후예로 추정되는 고구려(高句驪)는 조선(기자조선이라고 본다)에 귀속되었다가
위만조선 멸망 후 한나라(漢) 현도군(玄菟郡)에 속했던 것을 볼 때 고죽국(孤竹國)의 후예 고구려(高句驪)는 중국의 변방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위의 삼국사기 저자는
'고구려는 진한(중국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이다)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라고 기재했다고 본다.
그리고 삼국사기 저자는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侵其封埸以讎之, 入其郡縣以居之).라고 기재하면서
삼국사기의 저자는 삼국사기에서 주몽이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에서 고구려(高句麗, 졸본부여)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주몽이 한나라 현도군(漢 玄菟郡) 안에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자체가 한나라(漢)를 침략한 것이라고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의 고구려(高句麗) 건국을 해석한다.
또한 삼국사기 저자는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及其東遷)'라고 기재하면서 고구려(高句麗)가 주몽이 건국한 한나라 현도군(漢 玄菟郡) 지역에서 도읍을 동쪽으로 옮겼다고 밝히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髙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 “昔髙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則可謂地勝而兵強. 至于季末, 君臣昏虐失道, 大唐再出師, 新羅援肋, 討平之. 其地多入㪍海靺鞨, 新羅亦得其南境,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 以備九州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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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 발해인 무예(武藝)가 말하기를 “옛 고려(高麗)의 강성하였을 때에는 병사 30만으로 당(唐)과 겨루어 적이 되었다.”라 하였으니, 곧 가히 지세가 유리하고 병사가 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왕과 신하가 어리석고 포학하여 도리를 잃자, 대당(大唐)이 다시 군사를 보내고, 신라가 도움을 주어,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말갈(渤海靺鞨)로 편입되고, 신라 또한 그 남쪽 지경을 차지하여, 한(漢)·삭(朔)·명(溟)의 3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9주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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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髙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라고 기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고려인종(仁宗)이 금나라 황제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고구려 평양은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있던 것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국사기 저자가 가리키는 '패수의 근처(浿水之側)'는 압록강(鴨綠江) 주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구려 패수[浿水]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지류인 혼강[渾江]이라고 보며 고려 때는 대동강[大同江]으로 불렸다고 본다).
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이 고구려(髙句麗)를 건국한 곳이 한나라(漢) 영토인 '현도군의 경계(玄菟郡之界)'에 속한 곳이고 그 '현도군의 경계(玄菟郡之界)'에 속한 고구려(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의 위치)는 대요국(大遼國)의 동경(東亰) 서쪽에 있었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을 읽어보면 현도군(玄菟郡)은 낙랑군(樂浪郡)의 동쪽에 있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당서(唐書)에 기재된 것처럼 고구려 평양성을 낙랑군(樂浪郡)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현도군(玄菟郡)에 도읍한 주몽 고구려(髙句麗)의 도읍이 후에 중국과의 충돌에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바로 그 현도군(玄菟郡)에서 동쪽에 위치한 평양성이 낙랑군(樂浪郡)이 되는 것이다.
즉,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도 어긋나게 현도군(玄菟郡)과 낙랑군(樂浪郡)의 동서(東西)가 뒤바뀐 것이다.
또한 이렇게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 다른 당서(唐書)의 내용을 삼국사기 저자가 인정한 것도 이상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는 위만조선의 동쪽에 진국(辰國)이 있는 것으로 기재한 위략(魏略)의 내용과도 어긋난다.
제왕운기 저자도 옛 고구려 평양성에 포함된 고려 서경을 진국(辰國)의 후신인 마한(馬韓) 지역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위략(魏略)과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한나라(漢) 현도군(玄菟郡)과 동경 요양(東京 遼陽)에서 동쪽은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진국(辰國)의 영역이자 후에 마한(馬韓), 진한(辰韓)의 영토가 되는 곳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원문과 번역이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真·臨·樂·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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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한서(漢書)≫에는 곧 진(眞)(番)·임(臨)(屯)·낙(樂)(浪)·현(玄)(菟)의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삼국유사 저자는 당나라 관리인 배구(裵矩)가 '고려는 본시 고죽국(高麗本孤竹國)'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즉, 현도군의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은 '옛 고죽국의 후예'라고 당나라 관리인 배구(裵矩)가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삼국유사 저자는 배구(裵矩)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아래는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喀左縣) 구산(孤山)의 구글지도이다. 이곳을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곳으로 한국, 중국 학자들이 추정한다. 따라서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驪縣)은 이곳이거나 인근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 요양시(遼陽市)의 구글지도이다. 이곳이 고구려 평양성이고 낙랑군(樂浪郡)이라고 가정하면 현도군(玄菟郡) 내지 고죽국(孤竹國)으로 추정되는 객좌현(喀左縣) 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에 보면 낙랑군(樂浪郡)은 현도군(玄菟郡)의 서쪽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 어긋난다.
아래는 길림성 집안시 구글지도이다. 이곳이 고구려 평양성이고 낙랑군(樂浪郡)이라고 가정하면 현도군(玄菟郡) 내지 고죽국(孤竹國)으로 추정되는 객좌현(喀左縣) 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에 보면 낙랑군(樂浪郡)은 현도군(玄菟郡)의 서쪽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 어긋난다.
아래는 북한 평양시 구글지도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북한 평양을 낙랑군(樂浪郡)이라고 보며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면 삼국사기의 내용과 맞지가 않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경(東京)서쪽에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북한 평양은 현도군(玄菟郡) 추정지역에서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도 어긋난다.
결국,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국내외에서 주장하는 지역인 지금의 요양(遼陽), 집안(集安), 북한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이라고 주장하면 이 지역은 삼국사기 저자가 주장한 현도군(玄菟郡)에서 동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 어긋난다.
위만조선의 서쪽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연나라(燕) 영토이기 때문에 낙랑군(樂浪郡)의 서쪽은 패수(浿水)와 연나라(燕)이지 현도군(玄菟郡)이 아니다.
삼국사기 저자가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을 읽었다고 보기 때문에
삼국사기 저자가 위의 사서와 어긋나고 삼국사기에서 밝힌 자신의 역사관과도 어긋나는 내용인 당서(唐書)를 인정한 것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이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고 위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다.
고려는 고구려 평양성을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삼국사기 저자가 고구려 평양성을 낙랑군(樂浪郡)이라고 인식한 것은 역사적인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따른 주장이라고 본다.
결국, 삼국사기 저자는 요하(遼河) 동쪽이자 압록강(鴨綠江) 이북인 요동(遼東)에 기자조선(箕子之國)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삼국사기 저자의 사견이 아니라 고려의 역사관이고 고려의 정치적 정체성이다.
고려황제 왕건(王建)이 후당(後唐)에게 책봉을 받을 때
지금 요하(遼河) 동쪽이자 압록강(鴨綠江) 북쪽인 요동(遼東)을 옛 '기자가 이룬 번(箕子作蕃)'이라고 인정받은 후
이 지역은 더불어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고 확정받고 이 지역을 고려왕건(王建)이 획득했다고 고려와 후당(後唐)은 서로 확정했다.
또한 고려문종(文宗)이 송나라(宋)에게 칙서를 받을 때
지금의 요동(遼東)을 '기자의 봉토(箕子啓封)'라고 확정한 후 고려국왕이 대대로 기자의 나라(箕子之國) 요동(遼東)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송나라(宋)로부터 인정 받았다.
이는 결국, 주몽과 고구려가 고토회복이라며 중국영토에 있는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麗縣)을 지원하며 한나라(漢), 수나라(隋), 당나라(唐)를 상대로 공격하다가 고구려가 당나라(唐)에게 멸망을 당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해서
왕건(王建)에 의해 고려와 후당(後唐) 간 외교적 합의를 한 것이라 본다.
또한 후에 말씀드리겠지만
백제도 역시 주몽이나 고구려와 비슷하게 옛 기자조선 지역에서 고토회복 성격의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는 왕건(王建)과 고려에서 지금의 요하(遼河)를 고려와 후당(後唐) 간의 경계(국경)로 하는 외교적 합의를 보게 되었고
이후 고려문종(文宗)과 송나라(宋) 때도 이 외교적 합의를 그대로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러한 외교적 합의와 고려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삼국사기가 저술되었고
이에 따라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낙랑군(樂浪郡)이라는 당서(唐書)의 내용을 삼국사기 저자가 삼국사기를 통해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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