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협의의 진국(辰國)과 광의의 진국(辰國)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협의의 진국(辰國)과 광의의 진국(辰國)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11. 10. 18:24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漢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

zh.wikisource.org

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略
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亦與朝鮮真畨不相往來至王莽時亷斯鑡為辰韓右渠帥欲來降出其邑落見一人其語非韓人問之曰我等漢人名户來我等軰千五百人伐材木為韓所得積三年矣辰鑡因將户來出詣樂浪郡郡令鑡乗大船入辰韓取户來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辰韓曰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疋鑡収取直還郡
위략
옛날에 우거(조선왕 위만의 손자)가 아직 패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우거가 이를 듣지 아니하자, 그가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조선의 동쪽에 진국이 있다). 이때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 호였다. 이들 또한 조선(朝鮮) 진번(真畨)과는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였다(진국은 진번과는 구별된다). 왕망 때에 이르러 염사 사람 착이,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와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 읍락을 나왔을 때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말씨가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자 대답하되, "우리들은 한인(漢人)이며 이름은 호래입니다. 우리들 무리 천오백 명은 목재를 벌목하였는데, 한나라(韓)에 붙잡힌 지 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의 착이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에 이르렀다. 낙랑군에서는 착을 큰 배에 태워 진한에 들어가게 하여, 호래의 무리를 데려오게 하였는데 천 명을 거두었다. 나머지 오백 명은 이미 죽었다. 진한에서 말하길 "우리가 마땅히 보상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한에서 일만 오천 명이 변한포 만 오천 필을 내주자, 착이 이를 받아서 곧바로 돌아갔다.

위의 만주원류고에선 위략(魏略)을 인용해

"옛날에 우거(조선왕 위만의 손자)가 아직 패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우거가 이를 듣지 아니하자, 그가 동쪽의 진국(辰)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 호였다(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라고 기재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위만조선의 동쪽에 진국(辰國)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의 내용을 보면 진국(辰國)으로 표기했지 한국(韓國)이나 진한(辰)으로는 표기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원문과 번역 내용이다.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逺云, “馬韓麗也辰韓羅也 (㨿本紀, 則 ‘羅先起甲子麗後起甲申, 而此云者以王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已并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邑山)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위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위지(魏志)를 인용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위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인용한 위지(魏志)를 보면 진국(辰國)이라고 하지 않고 한땅(韓地)이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그 한땅(韓地)에 마한(馬韓)을 건국했다고 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漢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

zh.wikisource.org

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통전(通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通典
三韓後漢時通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晉梁二書作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另條詳後〉是其一國焉大者萬餘户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魏志作月支通考作自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
통전
삼한은 후한 때에 통교하였다. 그 첫째는 마한이고, 그 둘째는 진한이고, 그 셋째는 변한이다. ('진서', '양서'에는 변진[弁辰]으로 기록)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쉰네 개 나라가 있고,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닿았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고 그 남쪽은 또한 왜와 닿았다. 모두 일흔 여덟 개 나라가 있다. 백제(다른 조에서 상술)는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며 각기 산과 바다 사이 지역에 산다. 국토의 넓이가 합하여 사방 사천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모두 옛 진국이다(皆古之辰國也). 마한이 가장 커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 나라 출신을 진왕으로 세워 목지국('위지[魏志]'에는 월지[月支], '통고[通考]'에는 자지[自支]로 기록됨)에 도읍을 정하고 전체 삼한의 땅을 다스렸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마한 사람이다.

위의 통전(通典)을 인용한 내용을 보면 삼한(三韓)'모두 옛 진국이다(皆古之辰國也)'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모두 옛 진국(辰國)이었다고 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其地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各有長帥大者名臣智散在山海間無城郭凡五十餘國總十萬餘户辰王治月支國魏景初中明帝宻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部從事吴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﨑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위지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쪽은 왜와 닿았고 그 지방은 사방 사천리이다.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이 서쪽이 있는데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한다. 각기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라 부른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모두 오십여 개 나라이고 합해서 십만여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위나라 경초 연간에 명제(위[魏]의 2대 황제이며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204년에 출생해서 239년에 사망했다)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주고, 그 다음 지위의 자들에게는 읍장의 관직을 주어 비로소 두 군을 안정화시켰다. 부의 종사인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다스렸으므로, 진한의 여덟 개 나라를 나누어 낙랑에 주려고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의 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자, 신지들이 한나라(韓) 지역민들을 격분시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웠다.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개 군은 마침내 한을 쳐서 없앴다(한나라 지역민이 격분했다고 하니 없어진 곳 역시 한의 지역민이라고 본다. 마한 전체가 아니라고 본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섯 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서 열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었는데, 모든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모두 4~5만 호이다. 그 열두 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는데, 항상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졌다. 토지는 비옥하고 좋다. 변진과 한은 함께 산다. 또한 성곽이 있고 의복과 사는 집은 진한과 같다. 그 중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닿아 있다. 열두 개 나라 또한 왕이 있다.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지(魏志)를 보면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고 기술하고 있다.

통전(通典)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 모두 옛 진국(皆古之辰國也)이라고 기술했는데 위지(魏志)에서는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고 기재한 것이다.

따라서 위지(魏志)에선 진한(辰韓)만이 진국(辰國)의 후예라고 기술했는데 통전(通典)에선 삼한(三韓) 모두가 진국(辰國)의 후예라고 기술한 것이다.

결국, 위지(魏志)와 통전(通典)의 내용을 종합하면 진국(辰國)은 '협의의 진국(辰國)'과 '광의의 진국(辰國)'으로 구분 됨을 볼 수 있다.

'협의의 진국(辰國)'은 진국(辰國)이 후에 삼한(三韓)으로 갈리게 되었을 때 진한(辰韓)으로 불리게 된 정치세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삼한[三韓]으로 갈린 후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으로 불리게 된 세력들은 삼한[三韓]으로 갈리기 전엔 진국[辰國]의 중심세력이 아닌, 진국[辰國]에 복속된 진국[辰國]의 주변세력이었다고 본다.
다만 '협의의 진국[辰國]'을 포함한 '광의의 진국[辰國]'은 그들의 지도자를 한[汗]으로 칭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본다)
'광의의 진국(辰國)'은 진국(辰國)후에 삼한(三韓)으로 인식되기 전 정치세력이라고 본다. 즉,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완전히 삼분되어 인식되기 전의 정치세력이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漢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

zh.wikisource.org

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後漢書
馬韓邑落雜居無城郭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諸小别邑各有渠帥貿易以鐡為貨兒生欲其頭扁皆押之以石弁辰與韓辰雜居城郭衣服皆同其人形皆長大美髪而刑罰嚴峻
후한서
마한은 읍과 촌락에 잡거하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秦)에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여 오니, 마한(馬韓)이 동쪽 지방을 떼어 주었다". 그래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책과 집이 있다. 여러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무역을 할 때에 철을 화폐로 삼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평평하게 하기 위하여 돌로 머리를 눌러 둔다. 변진(弁辰)과 진한(辰)은 서로 섞여 살며, 성곽 의복은 서로 형태가 같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형벌은 엄준하다.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선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진나라(秦)에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여 오니, 마한(馬韓)이 동쪽 지방을 떼어 주었다(馬韓邑落雜居無城郭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

위의 후한서(後漢書)에선 한국(韓國)이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위지에서 한지(韓地)라고 표기했다.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는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삼한(三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세명의 한(三汗)이 다스리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학자들이 국호가 삼한(三韓)인 것으로 착각해서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건륭제(乾隆帝)의 주장을 바탕으로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진나라(秦) 사람들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당시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도피했는데

그 도피한 지역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쪽 지역에서 살라며 진나라(秦) 망명자들을 동쪽 땅으로 보냈다는 뜻이다.

('도피한 땅의 지도자 마한[馬汗]이 진나라[秦] 망명자들에게 동쪽 지방을 떼어주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 동쪽 땅도 한(汗)이 다스리던 영토였기 때문에,

그 동쪽 땅에 진나라(秦) 망명자들이 진출한 후 그 동쪽 땅의 진나라(秦) 망명자 세력의 지도자를 진한(秦韓)으로 불렀고 후에는 진한(辰韓)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진나라(秦) 망명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한(汗)이 다스리던 땅(진한[辰韓]에서 서쪽 지역이다)은,

후에 마한(馬韓)이라는 지도자가 다스리는 세력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사서에서는 마한(馬韓)으로 기록되고 불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결국, 위지, 후한서, 통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진나라(秦) 시기
(기자조선 때로 추정되는 시기)
중국의 진나라(秦) 때 조선(기자조선이라고 본다)의 동쪽에는 한(汗)을 지도자의 호칭으로 하던 땅이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동쪽의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도피하자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 안에서 서쪽에 위치한 세력이 도피한 진나라 사람들에게 동쪽 지역의 땅을 주었다.
그렇게 동쪽 지역에 거주하게 된 진나라 출신 망명자들은 그 지역의 관례에 따라 지도자 명칭을 한(汗)이라고 칭하면서,
이 지도자는 진한(秦韓)으로 불리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진한(秦韓)은 진한(辰韓)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진한(辰韓)은 한(汗)이 다스리던 영역에서 최고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고,
진한(辰韓) 주변의 한(汗)이 다스리던 세력이나 나라들은 진한(辰韓)에 종속되게 되었다.
결국, 진한(辰韓)이 진국(辰國)이며 주변의 종속 세력은 진국(辰國)으로도 불리지만 실제로는 진국(辰國)의 속국이었다고 해석된다.
진국(辰國, 협의의 진국, 후에 진한[辰韓]으로 불리는 세력) 주변의 종속세력이 후에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으로 사서에 기록된 세력이다.
위만조선이 등장한 시기(전한[前漢] 시기)
기자조선은 전한(前漢) 때 위만의 반란으로 위만조선이 되었고,
기자조선의 준왕은 위만의 반란을 피해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이주했고,
준왕은 한반도 내의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이주한 후 나라를 세우고 준왕은 이제 마한(馬韓)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아니면 준왕이 정복한 한[汗]이 다스리던 땅의 지도자 호칭이 원래 마한[馬韓]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준왕은 한[汗]이 다스리던 땅을 정복한 후 그 지역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지도자 호칭인 마한[馬韓]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된다)
위만조선이 전한(前漢)에 병합된 후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광의의 진국(辰國)'으로 이주해서 삼한을 형성한 시기
그리고 다시 위만조선은 한나라(前漢)에 병합되면서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동쪽의 한(汗)이 다스리던 나라로 이주했는데,
이미 동쪽의 한(汗)이 다스리던 지역엔 마한(馬韓)과 진한(辰韓)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만조선 유민들은 각각 마한(辰韓)과 진한(辰韓) 그리고 진한(辰韓)의 남쪽이며 사서에 변한(弁韓)이라고 기록된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 삼한(三韓)은 그 윗대로 올라가면 진국(광의의 진국)의 후예인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의 본문 번역 일부이다.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歳,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위의 삼국사기에 보면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위의 내용을 보면,

조선(위만조선으로 추정된다)의 유민들이 진한(辰韓) 안에서 6촌(六村)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해서 서나벌(徐那伐)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을 보면

서나벌(徐那伐)은 진한(辰韓) 안에 소속된 나라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한(辰韓)은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연맹체 국가인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삼국사기에 보면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辰人謂瓠爲朴),'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居西干辰言王).'

따라서 위의 삼국사기의 내용을 볼 때,

삼국사기 원문엔 辰人(진국 사람) 辰言(진국의 언어)로 표기해서 문자로만 보면 '진국(辰國, 삼한[三韓]으로 불리던 지역 전체를 뜻한다) 사람'이나 '진국(辰國)의 언어'라고 번역되지만 뉘앙스로 볼 땐 이 문장은 진국(辰國)이 아닌 진한(辰韓)을 뜻한다고 본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진한(辰韓)지도자 호칭이 한(韓, 실제 뉘앙스는 한[汗]이라고 본다)이고,

진한(辰韓)에 포함된 소국가(小國)인 서나벌(徐那伐)의 지도자 명칭이 거서간(居西干, 삼국유사에선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표기했다)이라는 문장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