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두 개의 고구려, 다물(多勿), 기자조선, 우북평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두 개의 고구려, 다물(多勿), 기자조선, 우북평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10. 24. 20:38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모본왕(慕本王)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49년의 기사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후한의 우북평 등을 습격하였다가 다시 화친하다 ( 49년 (음) )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모본왕(慕本王)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도에 주몽이 졸본(卒本)에서 건국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서기 49년도이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건국한지 86년이 된 시점이다.

그런데 서기 49년도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高句麗)는 북평(北平)을 습격(襲)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아래는 위에 기재된 북평(北平)에 대해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주석한 내용이다.

북평(北平)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우북평(右北平)으로 나온다. 우북평군은 전국 연나라가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공격하여 동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한 다음, 연(燕) 소왕(昭王) 희평(姬平) 29년(B.C. 283)에 설치했다는 5군(郡) 가운데 하나이다. 우북평군의 치소는 평강(平剛)이었는데, 네이멍구[内蒙古] 닝청현[寕城縣] 흑성고성(黑城古城)으로 비정되며, 롼허[灤河] 강 중상류의 동북방에서 라오하허[老哈河] 강 중상류의 서남방 일대를 관할했다. 진(秦)도 우북평군을 설치했지만 그 속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한(前漢)의 우북평군 치소도 평강이었고, 속현을 16개나 두었는데, 북방 흉노를 방어하는 전진기지로 관원과 군대를 파견해 주둔시켰다. 후한(後漢) 시기에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의 공격을 받아 관할구역이 롼허 강 유역으로 크게 축소되었으며, 관할 현도 4개로 줄었다(『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우북평군; 『후한서』 지23 군국5 유주 우북평군).

국사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된 북평(北平)에 대한 주석을 보면,

삼국사기에서 북평(北平)이라고 기재한 것과 달리 후한서(後漢書)에는 우북평(右北平)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후한서가 삼국사기보다 먼저 기록된 것을 볼 때 후한서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우북평(右北平)은,

기원전 283년 전국시대 때 연나라가 동호(東胡, 선비족과 몽골족의 조상이다)와 고조선(古朝鮮, 기자조선으로 추정된다) 공격해서 연나라(燕) 영토로 만들었고 그곳에 군(郡)을 설치한 지역이라고 한다.

 

아마도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에 기재된 전국(戰國)시대 때,

연나라(全燕)가 조선(朝鮮, 기자조선으로 추정된다)의 서쪽 영토를 공격해 얻어서 그 지역에 요새(塞)를 짓고 장애물(鄣)을 설치했다는 사건과 지역은 바로 이때의 사건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우북평(右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右北平郡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

zh.wikipedia.org

래는 위의 우북평(右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 본문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右北平郡,中國古郡名。戰國時燕國置。秦代郡治在無終縣(今天津市蓟州区)。西漢移治平剛縣(今內蒙古寧城縣甸子鎮黑城村黑城古城),隸屬于幽州刺史部。王莽時改稱北順。東漢時移治土垠縣(今河北省唐山市豐潤區東南)
우북평군(右北平郡)은 고대 중국 군(郡)의 이름이다. 전국시대(戰國時) 연나라(燕國)가 설치했다. 진나라 때 군의 치소(지역의 사무를 관장하는 중심지)는 무종현(현재의 천진시 계주구)에 있었다. 서한 때는 평강현(현재의 내몽골 영성현 전자진 흑성촌 흑성고성)으로 옮겼고, 유주자사부에 예속되었다. 왕망 재위 기간(왕망의 신[新]나라 때) 동안 북순(北順)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한시대(東漢時)에 토은현(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 남동쪽)으로 이주했다.

의 중국유기백과의 내용을 보면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전국시대(戰國時) 때 연나라(燕)에 의해 군(郡)이 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 때 우북평군(右北平郡) 치소는 토은현(土垠縣)이며 현재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河北省唐山市豐潤區) 동남쪽이라고 한다.

아래 구글지도에서 표시된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에서 동남쪽이라고 하니 지도를 보고 참작하시기 바란다.

 

펑룬 구 ·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www.google.co.kr

곳은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이니 이 지역만을 한정하지 않고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까지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역을 고구려(高句麗)가 서기 49년도인 후한(後漢, 東漢) 때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우북평군(右北平郡) 치소는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으로 추정하는 창려(昌黎)의 인근이다.

아래는 창려(昌黎)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보면 서광(徐廣)은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을 주석하면서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라고 기재했다.

현재 중국유기백과를 보면 중국학자들이 추정한 창려의 위치와 험독의 위치는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다.

즉, 현재 중국학자들이 추정한 지역을 대입하면 험독현은 창려에 속할 수 없을 정도로 위치가 떨어져있으며 결국 두 지역은 행정구역상 서로 별개의 지역이라는 뜻이고 두 지역 중에 하나가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곳 창려(昌黎)에 옛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 있었다고 본다. 고구려(高句麗)가 47년에 공격한 우북평(右北平)의 치소와 인접해 있다.

 

창리 현 ·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www.google.co.kr

일 이 지도에 기재된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었고 험독현(險瀆縣)이 조선왕의 옛 도읍(朝鮮王舊都)이라면 그리고 그곳이 바로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라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아직 강국이 되기 전인데,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벌써 옛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지역이었던 우북평(右北平) 직접 공격했다고 보긴 힘들다고 본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기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원래 고구려(고죽국의 후예인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내지는 그 주변에 거주하는 예맥족(濊貊族)에게 군사적 지원을 했거나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이들과 함께 군사행동을 해서 우북평(右北平)을 공격했다고 본다.

 

바로 삼국사기 저자가 밝힌 고구려(高句麗)의 잘못 중의 하나가 주몽이 한나라(漢) 영토인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에 도읍(都)하고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었다(侵其封埸以讎)는 내용과 궤가 같다.

 

 

아래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옛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는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喀左縣) 구산(孤山) 구글지도이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은 이 부근이었고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건국한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 주변의 고구려(高句驪), 예맥(濊貊)을 지원해서,

아니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이들 고구려(高句驪), 예맥(濊貊)과 함께 한나라(漢)에 군사행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Gushan · 중국 차오양 시 카라친쭤이 몽골족 자치현 邮政编码: 122314

Terrain

www.google.co.kr

 

 

러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왜 우북평군(右北平郡) 등 옛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을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주몽이 처음부터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 송양의 비류국은 기자조선의 후예와 위만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된 세력이라고 본다)과 연합해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따라서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조선의 옛 땅(옛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영토이다) 회복'이라는 기치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았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의 제왕운기에 보면 주몽은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에서 고구려현(高句麗縣,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과 한자가 다르다)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마한(馬韓)은 삼한(三韓)의 하나이며, 삼한(三韓)은 위만조선 유민들이 위만조선을 떠나 다른 지역에 세운 연맹체 국가들이다.

 

따라서 옛 위만조선 지역인 한나라(漢)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에 주몽이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저자의 주장과

위만조선을 떠난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거주하는 마한(馬韓)에 주몽이 고구려현(高句麗縣,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과 한자가 다르다)을 세웠다는 제왕운기 저자의 주장은 서로 내용도 다르고 지역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은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이 아니다.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은 위만조선의 실향민들이 옛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과 같은 명칭으로 다른 지역인 마한(馬韓)에 세운 지역명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沸流稱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 日淺, 爲我附庸, 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膺.
비류(沸流)(『동명본기(東明本紀)』에 이르기를, “비류왕 송양(松讓)이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으로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으나, 지금 너희들이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기대는 것[附庸]이 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즉 이 또한 의심컨대 단군의 후손일 것이다)를 칭하며, 다음으로는 시라(尸羅)와 고례(高禮)가 있었으며, 남북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이 이어졌도다.

송양은 '선인(仙人)​의 후손'이라고 제왕운기에선 소개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는 선인(仙人)을 단군(檀君)으로 해석해서 송양을 단군의 후손(檀君之後)일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선인(仙人)은 단군(檀君)이 아닌 기자(箕子)를 지칭한다'고 본다. 따라서 송양(松讓)과 그의 비류국(沸流國)은 기자조선의 후예와 위만조선유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풍속은 淫祀가 많고,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을 섬긴다. 國城 동쪽에 큰 굴이 있어 神隧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王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 습속은 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말먹

db.history.go.kr

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其俗多淫祀,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國城東有大穴, 名神隧, 皆以十月, 王自祭之. 俗愛書籍, 至於衡門廝養之家, 各於街衢造大屋, 謂之扃堂, 子弟未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 其書有五經及史記·漢書·范曄後漢書·三國志·孫盛晉春秋·玉篇·字統·字林; 又有文選, 尤愛重之.
其王高建武, 卽前王高元異母弟也.
풍속은 淫祀가 많고, 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을 섬긴다. 國城 동쪽에 큰 굴이 있어 神隧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王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
습속은 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扃堂」이라 부른다. 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책은 5經 및 『史記』·『漢書』·范曄의 『後漢書』·『三國志』· 孫盛의 『晋春秋』·『玉篇』·『字統』·『字林』이 있다. 또 『文選』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王은 高建武이니, 바로 前王 高元의 이복동생이다.

의 구당서에서 고구려(高句麗)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면,

'풍속은 淫祀(음사)가 많고, 靈星神(영성신)·日神(일신)·可汗神(가한신)·箕子神(기자신)을 섬긴다(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일신(日神)은 일자(日子)를 뜻하는 주몽을 가리키거나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東明?)를 가리킨다고 해석된다.

 

고구려(高句麗)에서 기자신(箕子神)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면 고구려(高句麗)의 구성원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高句麗)에서 가한신(可汗神)을 숭배하는 것은 결국 주몽이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곳은 한나라 현도군(漢 玄菟郡)이 아니라

 

청나라 건륭제가 '삼한(三韓)의 한(韓)은 나라의 명칭이 아닌 지도자 호칭인 한(汗, 가한[可汗]으로도 쓴다)이다'라는 주장에 따라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마한(馬韓)지역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나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 주장과 달리 고구려(高句麗) 역시 삼한(三韓)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저자의 견해와 논리에 의하면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마한[韓]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에서 기원해서 후에 마한[韓]지역까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를 넓힌 것이 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본문이다. (기원전 36년 음력 6월 기사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 기원전 36년 06월 )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2년(B.C.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主]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의 삼국사기를 보면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主]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라고 기재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는 송양(松讓)이 스스로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으로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으나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라고 발언한 내용을 근거로 '즉 이 또한 의심컨대 단군의 후손일 것이다(則此亦疑檀君之後也).'라고 주석하며 송양(松讓)을 단군의 후예로 추정한다.

 

물론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지금의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약진촌 부근이었을 것으로 우리나라에선 추정하고 있고 이 지역은 단군조선의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대략 6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제왕운기 저자의 주장처럼 비류국(沸流國)의 송양(松讓)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송양(松讓)이 단군의 후손(檀君之後)이라면,

단군조선의 도읍인 평양성(삼국유사 저자는 단군조선 평양성이 고려의 서경[西京]이라고 주석했다. 제왕운기의 저자는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고 주석했으며 이곳은 현재 중국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본다)에서 63km 떨어진 곳에 거주한 송양(松讓)과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 무슨 옛 땅을 회복해야 한다며 주몽이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을 다물(多勿)로 정해주었겠는가?

이미 단군의 후손인 송양(松讓)이 단군조선 도읍에서 63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은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북쪽에 위치했었다고 본다.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대략 18~19km 떨어진 거리이다.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내 의견처럼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면 송양(松讓)이 회복해야 할 땅은 존재하지가 않는다.

단군의 후예(檀君之後)가 단군조선의 평양성 근처에 거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양(松讓)이 스스로 '선인의 후예(仙人之後)'라고 밝힌 선인(仙人)은 단군조선의 단군이 아니라 옛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기자(箕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夫余)출신인 주몽이 송양(松讓)에게 옛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을 다물(多勿)로 정해주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고구려(高句麗)의 태생적 성격 때문에,

이후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는 한나라(漢) 우북평(右北平)을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이나 그 주변의 예맥족(濊貊族)에게 군사지원을 해서 공격하게 했거나

아니면 그들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면서 우북평(右北平) 등 한나라(漢) 지역을 공격한 것이라고 본다.

또는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의 봉기를 유도나 지원했을 수도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산해경 해내동경에 대한 내용이다.

 

山海經/海內東經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海內東經[编辑]   海內東北陬以南者。   鉅燕在東北陬。   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   

zh.wikisource.org

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산해경 해내동경에 대한 내용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潦水出衛臯東出塞外衛臯山。玄莬高句驪縣有潦山,小潦水所出西河注大潦,音遼,東南注渤海,入遼陽潦陽縣屬潦東
요수는 위고 동쪽에서 나와[변방 밖의 위고산에서 나온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요산에 있다, 소요수는 서하에서 나와 대요로 흐른다, '요'로 불린다] 발해(Bohai sea를 뜻한다)를 향해 동남쪽으로 흘러, 요양으로 들어간다[요양현은 요동에 속한다]

위의 산해경(山海經)은 진나라(秦) 이전에 저술된 책이지만 춘추(春秋)시대 때부터 한나라(漢) 때까지 학자들이 계속 내용을 첨부했다고 한다.

위의 문장에서 현도군과 고구려현(玄莬高句驪縣)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 내용은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이 등장한 이후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산해경 해내동경의 내용을 보면

'현도군 고구려현은 요산에 있다(玄莬高句驪縣有潦山)'라고 기재하고 있다.

주몽의 고구려가 아닌 현도군 고구려현(玄莬高句驪縣)엔 요산(潦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4 인종 4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1126년 12월 12일, 양력 1127년 1월 26일)

 

고려시대 사료 DB

癸酉 遣衛尉卿金子鏐, 刑部郞中柳德文, 如金謝宣諭. 表曰, “高伯淑至, 密傳聖旨, ‘保州城地許屬高麗, 更不收復.’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逮我祖宗, 値北國

db.history.go.kr

래는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勾麗]의 본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였는데(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번역하면 고구려 평양은 압록강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해석된다. 마치 한반도 내 압록강 주변에 고구려 평양이 있었던 것처럼 이해된다),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

위의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국왕이 금나라황제에게 한 발언을 보면

구려(勾麗)는 요산(潦山)을 중심으로 한 구려(뉘앙스로 볼 때 산해경[山海經]에도 기재된 요산에 있는 현도군고구려현[玄莬高句驪縣有潦山]을 지칭한다)

압록강(鴨綠江) 주변의 구려(뉘앙스를 볼 때 주몽이 세운 고구려[高句麗]를 지칭한다)가 있다고 발언하는 모습을 볼 수있다.

위의 고려국왕의 발언에 등장하는

요산(潦山)을 중심으로 하는 구려(勾麗)는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을 지칭한 것이며,

압록강(鴨綠江)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구려(勾麗)는 주몽의 고구려(高句麗)를 지칭한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論曰. 玄莬·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

db.history.go.kr

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보장왕(寶藏王)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論曰. 玄莬·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盗,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皆天子有司, 亂丗則英雄特起, 僭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埸以讎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歳. 及其東遷, 值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圡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竒以䧟大軍, 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太國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以福, 其亡也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有味哉斯言也. 夫然則凢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強宗之聚歛,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強酒而惡醉者乎.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지 않으며, 부인은 지조가 굳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한 것이 3방(三方)과 달랐으므로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는 “2는 칭찬이 많고, 4는 두려움이 많아 가깝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조선은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인 전국시대 때도 연나라에 속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은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라고 기재했다고 본다. 주몽이 졸본부여를 세운 것은 기원전 37년도이다. 즉, 전한 때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진나라 때부터 고구려가 있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주몽이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 전한 때 일이라고 김부식 자신이 기록했으니 착각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의도적인 기술이라고 본다. 주몽의 졸본부여를 현도군에 세웠다고 보는 것이다),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현도군의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주몽의 졸본부여가 현도군의 고구려현에 속한 지역으로 김부식은 보기 때문에 주몽이 현도군 소속의 고구려에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자체가 침략이라고 보는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현도군 소속의 고구려가 있던 요양의 서쪽 요산에서 압록강부근으로 고구려의 도읍을 옮겼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는 아무리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의롭지 않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의 원망을 일으키게 되면서 무너져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좌씨(左氏)는 말하기를, “나라를 일으키는 것은 복이 있기 때문이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일으킬 때에는 백성을 보는 것을 다친 사람 보는 것처럼 하니 이것이 그 복이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흙이나 먼지처럼 하찮게 여기니 이것이 그 재앙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의미가 깊도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가진 자가 포악한 관리가 〔백성을〕구박하는 것과 강한 종족이 남의 재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내버려 두어 인심을 잃는다면, 아무리 잘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또 어찌 강한 술을 마시고 취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리오

위에서 삼국사기의 저자의 주장을 보면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而無謙巽之意, 侵其封埸以讎之, 入其郡縣以居之).'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及其東遷, 值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圡室).'

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나는 삼국사기의 저자와 달리 주몽의 고구려(髙句麗)는 원래부터 한나라(漢)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驪縣)이 아닌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도읍했다고 보기 때문에,

삼국사기 저자가 주장하듯이 주몽이 한나라(漢) 군현에 들어가 살아 그 곳에서 나라를 세워 한나라(漢) 강역을 침략한 후 원수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주몽이 압록강(鴨綠江) 이북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도읍한 후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漢 玄菟郡 高句驪縣) 주변의 고구려(高句驪) 계통 예맥인(濊貊族)들에게 군사지원 내지는 그들과 군사협력을 해서 한나라(漢)를 공격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5호 16국, 수나라(隋)를 거쳐 당나라(唐)가 등장하게 되면서 당나라(唐)가 고구려(高句麗)에게 군사적 공격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국,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삼한(三韓) 통일 이후 고려와 후당(後唐), 고려와 송나라 간에 책봉 및 칙서를 통해,

기자의 나라(箕子作蕃)와 주몽이 건국한 곳(朱蒙啓土)은 같은 지역이고 기자의 나라(箕子啓封)가 요동(遼東)에 있었다는 내용을 명문으로 확정했다.

 

이는 주몽 고구려(高句麗)의 빠른 확장과 몰락이라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고려왕건과 후당(後唐), 고려와 송나라(宋) 간의 외교적 합의라고 본다.

 

쉽게 이야기 해서

"이젠 고려와 중국은 요하(遼河)를 경계로 확정하자!

그리고 나는 고구려(高句麗)처럼 고토회복이라며 네 땅 건드리다 멸망하는 결과는 내지는 않을 테니 너도 내 땅 건들지 마라!"라는 외교적 합의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