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황위철
- 중앙국술관
- 팔극권
- 연청권
- 북소림권
- 미종권
- 태극당랑권
- 마영도
- 쥬세페 디 스테파노
- 소호연
- 칠성당랑권
- 사권
- 이서문
- 마스다 류지
- 유운초
- 알프레도 크라우스
- 누가복음
- 카를로 베르곤치
- 담퇴
- 곽전각
- 마태복음
- 대한쿵후협회
- 벽괘장
- 팔괘장
- 이소룡
- 정무체육회
- 나광옥
- 당수도
- 루치아노 파바로티
- 장권당랑권
- Today
- Total
濟世安民 bagtur khan
요동군, 낙랑군, 창려(昌黎), 험독(險瀆) 본문
역사서 사기(史記)에 대한 주석(註釋)으론 사기집해(史記集解), 사기색은(史記索隱), 사기정의(史記正義)가 있다. 이를 사기3가주(史記三家注)라고 칭한다.
사기3가주(史記三家注)는 전한(前漢) 때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를 후대의 학자들이 주석(註釋)한 내용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해 기술한 역사서는 이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을 때 저술한 역사서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존재했던 시대와 가까운 시대에 저술한 역사서가 신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석(註釋)은 동시대나 그와 가까운 시대에 기술한 내용은 아니다. 따라서 신뢰도는 그 당시나 가까운 시대에 기술한 역사서에 미치진 못한다. 하지만 주석(註釋)은 중요한 참고서 역할을 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 내용이다.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 내용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都王險。【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徐廣曰「昌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正義】臣瓚曰︰「主險在樂浪郡也。」]
|
도읍은 왕험이다. 【집해(史記集解)】서광(徐廣)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색은(史記索隱)】위소(韋昭)가 이르기를 「예전의 고을 이름이다」。서광(徐廣)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신찬(臣瓚)이 이르기를「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정의(史記正義)】신찬(臣瓚)이 말하기를︰「주험(主險, 주험[主險]은 왕험[王險]이라고 해석된다)은 낙랑군에 있다。」]
|
아래는 위의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 기재된 내용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史記集解
(사기집해)
|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서광(徐廣)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
史記索隱
(사기색은)
|
韋昭云: "古邑名."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예전의 고을 이름이다."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
|
史記正義
(사기정의)
|
臣瓚曰: "主險在樂浪郡也."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주험(主險, 주험[主險]은 왕험[王險]이라고 해석된다)은 낙랑군에 있다."
|
아래는 위의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 기재된 서광(徐廣)과 응소(應劭)의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에 대한 주석이다.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
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
|
서광(徐廣)은 서기 352년에서 425년까지 할동한 인물이며, 응소(應劭)는 조조가 하북성을 점령한 207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위의 두 인물이 기원전 108년도에 멸망한 위만조선과 위만조선 이전에 존재한 기자조선 도읍에 대해 주석한 것이니 완전히 신뢰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하지만 위만조선이 존재한 시기에서 가장 근접한 시기에 주석한 내용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응소(應劭)는 기자조선인지 위만조선인지 명확히 적시하진 않았지만 조선왕의 옛 도읍(朝鮮王舊都)이 요동험독현(遼東險瀆縣)에 있다고 주장했고,
서광(徐廣)은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주장하니 험독현(險瀆縣)은 창려(昌黎)에 소속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창려(昌黎)와 험독현(險瀆縣)의 위치를 파악하면 조선왕(朝鮮王)의 옛 도읍(舊都)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창려현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아래는 창려현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이다.
昌黎县地处中国河北省东部、濒临渤海,是秦皇岛市西部下辖的一个县,东临抚宁县,西接滦县。縣人民政府駐昌黎鎮。
|
창려현(昌黎县)은 중국 하북성 동부, 발해(Bohai sea) 연안에 위치하며 진황도시 서부 관할 일개의 현이며, 동쪽으로는 무영현, 서쪽으로는 란현과 접한다. 현의 인민정부는 창려진에 위치한다.
|
아래는 창려현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만일 이 지도에 기재된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었고 험독현(險瀆縣)이 조선왕의 옛 도읍(朝鮮王舊都)이라면 그리고 그곳이 바로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라면,
창려(昌黎)의 서쪽에 있는 난하(灤河)는 바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에 기재된 패수(浿水)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난하(灤河 Luan River)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험독현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아래는 험독현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险渎县,中国古县名。
西汉置,治所在今辽宁省台安县东南孙城子。属辽东郡。东汉后废。 据《汉书》地理志东汉应劭注记载,“县依水险,故曰‘险渎’”。
|
험독현(险渎县), 중국의 옛 현 이름이다.
서한(西汉)시대에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요녕성 태안현 남동쪽 손성자에 위치해 있다. 요동군에 속한다. 동한(东汉) 이후 폐지되었다. 『한서』지리지를 주석한 응소(應劭)에 따르면, “현은 물가에 기대어 있어 험독(险渎 위험한 도랑이라고 해석된다)으로 불렸다"고 기재되어 있다.
|
아래는 전한 때 험독현으로 추정되는 요녕성 안산시 태안현 구글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가리키는 요녕성 안산시 태안현(台安县)이 조선왕의 옛 도읍인 옛 험독현(險瀆縣)이며 왕험(王險)이라면 창려(昌黎)와 험독(險瀆)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즉, 서광(徐廣)이 주석한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는 내용은 지리적으로 맞지가 않다.
따라서 지금의 창려(昌黎)와 지금의 태안현(台安县) 중 하나는 조선왕의 옛 도읍(朝鮮王舊都)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만일 태안현(台安县)이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라고 가정하면 패수(浿水)는 지금의 대릉하(大凌河)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대릉하(大凌河 Daling River)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 기재된 신찬(臣瓚)의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에 대한 주석이다.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
|
臣瓚曰: "主險在樂浪郡也."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주험(主險, 주험[主險]은 왕험[王險]이라고 해석된다)은 낙랑군에 있다."
|
신찬(臣瓚)의 생몰연대는 모른다고 한다. 다만, 서진(西晉) 때인 266년에서 316년에 활동한 인물이다.
신찬(臣瓚)은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을 위만조선 멸망 후 등장한 한나라의 낙랑군(樂浪郡)과 연계시킨다.
신 찬(臣 瓚)의 견해에 따르면,
패수(浿水)에서 동쪽 인근에 위치한 조선의 서쪽변경과 조선서쪽변경에서 동쪽에 위치한 조선의 도읍 왕험(王險)은 위만조선 멸망 후 모두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한나라 낙랑군 = {....패수, 왕험(王險 조선의 도읍)....}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현도군(玄菟郡)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遼東郡(요동군)은 한사군(漢四郡)에 포함되진 않지만 참고로 올려드린다.
遼東郡(요동군),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
玄菟郡(현도군),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
樂浪郡(낙랑군),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
한나라(漢) 행정구역엔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요동(遼東)은 옛 연나라(全燕)가 전국(戦國)시대 때 조선(기자조선이라고 본다)의 영토를 획득해서 얻은 영토였다.
그리고 진나라(秦) 때도 요동(遼東)은 진나라(秦)의 영토였고,
한나라(漢)가 진나라(秦)의 지위를 이어받았 때 역시 요동(遼東)은 한나라(漢)에 귀속된 연나라(燕)의 영토였다.
따라서 한나라(漢) 요동군(遼東郡)이 연나라(燕)에 속한 요동(遼東)이라면 요동군(遼東郡)은 한나라(漢)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얻은 영토는 아니다.
한나라(漢)와 위만조선이 전쟁을 할 당시 이미 요동(遼東)은 한나라(漢)에 귀속된 연나라(燕)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나라(燕) 요동(遼東)으로 추정되는 요동군(遼東郡)과 달리,
현도군(玄菟郡)과 낙랑군(樂浪郡)은 한나라(漢)가 위만조선을 멸한 후 한나라(漢)가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의 부속지역에다 한나라(漢)의 행정구역인 군(郡)으로 설치한 지역이다.
위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내용을 아래와 같은 집합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
요동군 = {....험독 ,....}
현도군 = {....고구려 ,....}
낙랑군 = {....조선, 패수 ,....}
|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
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 |
그런데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를 보면 험독(險瀆)은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되어 있고 조선의 도읍은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있다.
한나라(漢) 요동군(遼東郡)이 위만조선 이전 연나라(燕) 영토의 요동(遼東)이라면 요동군(遼東郡)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얻은 영토는 아니다.
요동군(遼東郡)은 이미 한나라(漢)에 귀속된 연나라(燕)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나라(漢)가 위만조선을 복속시키고 얻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王險)이 기존의 한나라(漢) 행정구역인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될 수는 없다.
한나라(漢)는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의 부속세력인 고구려(高句驪, 주몽의 고구려[高句麗]가 아닌 주몽 이전에 존재하던 고구려), 임둔(臨屯), 진번(眞蕃)지역을 한나라(漢)가 새로 만든 행정구역인 한사군(漢四郡)에 배속하는 구조였다.
아래는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 기재된 응소(應劭)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王險)을 주석한 내용이다.
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응소(應劭)가 주석하기를: "지리지 요동험독현, 조선왕의 예전 도읍이다."
|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은 위만조선 멸망 후 낙랑군(樂浪郡)에 위치하게 되었고 낙랑군(樂浪郡)과 별개로 요동군(遼東郡)은 이미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만일, 위만조선 때가 아닌 전국(戰國)시대 때 전연(全燕)에게 영토를 빼앗기기 전,
조선(기자조선이라고 해석된다)의 도읍이 요동(遼東)에 있었고 이 지역을 전연(全燕)에 빼앗겨서 이후 도읍을 이주한 곳이 패수(浿水) 동쪽이었다면 조선왕의 예전 도읍(朝鮮王舊都)이 요동(遼東)이라는 이 주석은 맞을 수 있다.
(즉, 요동[遼東]에 조선왕의 옛 도읍[舊都]이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기자조선으로 해석된다]이 전연[全燕]에게 요동[遼東]을 빼앗기기 전 조선[기자조선으로 해석된다]의 옛 도읍[舊都]일 거라는 말씀이다)
위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와 집합기호를 보면 낙랑군(樂浪郡)에 조선과 패수(浿水)가 포함되었으니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재된 조선이라는 명칭이 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까지 포함된 명칭이라면
신찬(臣瓚)의 주석인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라는 주장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나 위의 집합기호에 합치한다.
또한 서광(徐廣)이 주석한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는 주장은 험독현(險瀆縣)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태안현(台安县)이 창려(昌黎)로 추정되는 지금의 창려현(昌黎县)과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험독현(險瀆縣)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지금의 태안현(台安县)은 옛 험독현(險瀆縣)이 아닐 거라고 본다.
결국 응소(應劭)가 주석한 요동험독현(遼東險瀆縣)과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재된 낙랑군(樂浪郡)에 소속 조선(도읍 왕험[王險]으로 해석된다)은 확실히 해석하긴 곤란하다. 응소(應劭)만이 험독(險瀆)에 요동(遼東)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응소(應劭)의 실수일 수도 있다.
아래는 중국 랴오닝성 진시시 소황지 구글지도이다.
이 지역에서 1994년도에 임둔군태수(臨屯郡太守)의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한사군(漢四郡) 중 임둔군(臨屯郡)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곳이 한나라(漢)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나라 행정구역이 된 임둔군(臨屯郡)이라면 임둔(臨屯)은 조선에 속했던 세력(or 지역)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연나라(燕) 동쪽 패수(浿水)를 건너면 바로 조선이기 때문에 조선에 귀속된 임둔(臨屯)은 위치상 위만조선보다는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이 지역은 위만조선의 왕험(王險)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창려(昌黎)에서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창려(昌黎)가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험(王險)이라고 본다.
'태조왕건과 삼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개의 고구려, 다물(多勿), 기자조선, 우북평 (2) | 2023.10.24 |
---|---|
낙랑군, 현도군 고구려현, 고려의 정체성 (2) | 2023.10.22 |
한나라 때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 패수(浿水) (2) | 2023.10.10 |
연나라, 요동, 패수, 조선의 서쪽변경 (2) | 2023.10.03 |
단군조선, 아사달, 평양성, 당장경 (2) | 2023.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