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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연나라, 요동, 패수, 조선의 서쪽변경 본문
아래는 사기(史記)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사기(史記)에 대한 두산백과의 내용이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한(漢)나라 무제 때 쓰여진 역사서로 본격적인 저술은 BC 108~BC 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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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는 기원전 108년에서 9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함락되고 멸망한 해도 기원전 108년이다. 사기(史記)는 위만조선 당시 생존했던 학자에 의해 쓰여진 내용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에 대해 가장 정확히 기술한 역사서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 본문과 번역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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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은 만(滿, 위만을 뜻한다)이다. 옛 연나라 사람이다. “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 진나라(秦)가 연나라(燕)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 밖 변방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漢)가 일어났지만('한나라[漢]가 진나라[秦]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으로 해석된다) 멀어서 다스리기 곤란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修) 패수(浿水)까지(至)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燕王 盧綰)이 배반하고 흉노의 영역으로 들어가자 만(滿, 위만을 뜻한다)도 망명하였다. 조직원(黨) 천여명을 모아 상투(魋結 추결)와 이방민족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서 진나라(秦)의 옛 개발되지 않은 땅(空地) 위아래 장애물(上下鄣)에 거주했다. 차츰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 이방인과 옛 연나라(燕)와 제나라(齊)의 망명자 무리들을 부리면서 왕(王)이 되었고,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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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기(史記)의 본문을 보면
'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至)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燕)에 속하게 하였다(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서 진나라(秦)의 옛 개발되지 않은 땅(空地) 위아래 장애물(上下鄣)에 거주했다(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險).'라고 기술되어 있다.
위의 사기(史記)의 본문은 아래와 같이 해석된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진나라가 천하통일(秦幷天下)을 하기 전 옛 연나라(全燕)는 자신들의 동쪽에 위치한 조선과 진번을 귀속시킨 후 이들 지역에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한나라가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연나라(燕)는 한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옛 연나라(全燕)가 요새(塞)를 설치한 조선과 진번 지역은 한나라 때 연나라(燕)의 영토로 확정되었고 그 요새(塞)가 설치된 지역은 요동이었다.
하지만 요동 밖의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 진번 지역은 장애물(鄣)만 설치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연나라(燕)의 영토가 아닌 조선과 진번의 영토이다.
즉, 장애물(鄣)만 설치된 조선과 진번 지역은 연나라의 영토로 귀속되지 않고 이전처럼 조선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는 패수(浿水)였다.
위만이 자신의 조직원 천여 명과 함께 요새(塞)를 나왔다는 것은 요동의 옛 요새(塞)를 나와 동쪽 방향으로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는 내용이다.
즉, 연나라에 귀속된 요동에서 동쪽 방향에 패수(浿水)가 있고 패수(浿水)의 동쪽 방향으로는 진번과 조선이 있다는 뜻이다.
아래는 한서(漢書)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한서(漢書)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이다.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전 100권으로 이루어졌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이다. 한 무제에서 끊긴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뒤를 이은 정사(正史)로 여겨지므로 '두 번째의 정사(正史)'라 하기도 한다.................
《사기》가 상고시대부터 무제까지의 통사(通史)인 데 비하여 《한서》는 전한(前漢)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 간의 기록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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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 기재된 반고(班固)에 대한 설명이다.
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 기재된 반고(班固)에 대한 설명이다.
班固(32年—92年),字孟堅,扶風安陵(今陝西咸陽)人,东汉史学家班彪之子,东汉历史学家,《汉书》作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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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32-92), 자는 맹견(孟建)이며, 부풍안릉(현 섬서성 함양) 출신으로, 동한(汉汉)의 역사가 반표(班彪)의 아들이다.동한(东汉, 우리나라에선 후한[後漢]으로 칭한다)시기의 역사학자이다. '한서'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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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 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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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築)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변방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사고(師古)가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임금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 (이(李)는 땅이름이라 하고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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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이고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인용한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최초의 기록인 사기(史記)를 인용하지 않고 후한 때 인물인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의 내용을 인용한다. 반고(班固)는 기원 후 32년에서 92년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따라서 사기(史記)보다는 기록의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추정된다.
위의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한서(漢書)의 본문을 보면 앞에서 올린 사기(史記)와 다른 부분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비교 내용이다.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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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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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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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築) 하였다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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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기(史記)의 내용을 보면,
전국(戰國)시대인 전연(全燕) 때 진번과 조선을 귀속시켜 그 지역에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고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한서(漢書)를 보면,
전국(戰國)시대 연나라(燕) 때 진번과 조선을 얻어 그 지역에 장애물(鄣)을 쌓았다(築)고 기재하고 있다.
즉, 장애물(鄣)을 쌓은(築) 지역만 한서(漢書)에선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 요새(塞)를 지은(筑) 지역은 이 문장에선 언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기(史記)에 기재된 내용을 참고하지 않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한서(漢書)의 내용만으로는 전국(戰國)시대 연나라와 조선, 진번의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아래는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이다.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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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위략(魏略)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위략(魏略)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魏略》,共50卷,魏郎中魚豢私撰,為中國三國時代中記載魏國的史書。一般認為《典略》也是此書中的一部分所構成的,《三國志注》多引用《魏略》的內容來注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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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총 50권이다, 위랑중 어환(魚豢)이 사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중국 삼국시대 중 위나라의 사서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일반적으로 『전록』도 이 책의 일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주석』은 주석을 위해 『위록』의 내용을 대부분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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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어환(魚豢)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어환(魚豢)에 대한 내용이다.
魚豢(?—?),京兆郡(今河南洛阳)人,三國時期曹魏史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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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환(魚豢)(?—?), 경조군(지금의 하남성 낙양이다) 출신으로, 삼국시대 조위(曹魏)(위나라[魏], 220년에서 265년까지 존재한 나라이다)의 역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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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위략(魏略)'의 저자인 어환(魚豢)의 생몰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 위나라(魏) 때의 인물이면 대략 220년에서 265년 어환(魚豢)에 의해 '위략(魏略)'이 저술되었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의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侯準旣僭號稱王, 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爲燕亡人衛滿所攻奪, 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道益山郡.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校, 毛本, 下燕字, 作以.不攻. 攻, 疑作改.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趙一淸曰, 潘韓譌. 兩漢志, 俱作番汗.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趙一淸曰, 漢書地理志, 樂浪郡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 今大同江也. 溴字誤. 下同. 弼按漢書朝鮮傳云, 至浿水爲界. 浿水解見前高句麗傳.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亡字下, 似少一字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弼按, 魏略所云, 與史記漢書朝鮮傳, 略同而較詳, 可補史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 其國, 肇自檀君傳, 一千四十八年, 至周初, 箕子代興, 傳四十世, 爲燕人衛滿襲據其地. 班書, 記漢事, 故託始於滿. 眞番, 本朝鮮附屬番部, 七國時爲燕所略. 武帝, 破朝鮮, 改爲郡. 治霅縣, 在今奉天興廳邊外, 東南至鴨緣江地. 浿水有二, 唐書高麗傳, 南涯浿水, 指大同江, 而此傳浿水, 均指鴨綠江. 今攷據家, 但知大同江爲浿水, 不知鴨綠江亦有浿水之名. 蓋大同江, 在平壤南, 衛滿所都王險城, 卽平壤. 滿渡浿水, 而後居此, 則水在平壤之北可知, 證一. 涉何, 諭右渠還朝, 必經浿水, 證二. 左將軍, 擊破浿水西軍, 方得至王險, 證三. 右渠太子, 入謝天子, 至浿水引歸, 證四. 觀此, 傳中浿水, 皆指鴨綠江, 明矣. 臨屯亦番部. 後爲郡, 治東暆, 今爲朝鮮道江原道江陵府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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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侯 準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역격, 반격과 비슷한 뜻이다)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에 이르는(至)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몽염)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부)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燕[연], 齊[제], 趙[조 ]이 나라들은 모두 조선 내의 서쪽지역과 가까웠다고 본다, 따라서 이 나라들은 당시 조선의 서쪽 내지는 서남쪽에 위치했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 저자가 조선에 속한 고구려[후에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이 되는 지역이다]를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爲胡服)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번병, 직역하면 '울타리의 병풍'이라는 뜻으로 최전방에서 복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규, 제후를 봉할 때 사용하던 도장을 뜻한다)를 下賜(하사)하며, 百里의 땅을 封(봉, 대략 땅이나 직분을 주어 관리하게 하거나 다스리게 한다는 뜻이다)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숙위, 대략 '거주하면서 호위하다'는 뜻이다)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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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위략(魏略)을 인용한 내용이다.
위략(魏略)은 위나라 역사학자 어환(魚豢)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위나라(魏)는 서기 220년에서 265년까지 존재한 나라이기 때문에 기원전 108년 때 멸망한 위만조선의 일을 정확히 기술했는지는 의문이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도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했을 수도 있고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래는 위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위략(魏略)을 인용한 내용이다.
'燕(연)은 장군 秦開(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漢(한)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노관)으로 燕王(연왕)을 삼으니, 朝鮮(조선)과 燕(연)은 浿水(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중국)의 亡命者(망명자)를 거두어 朝鮮(조선)의 藩屏(번병)이 되겠다고 準(준, 조선왕)을 설득하였다. 準(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박사)에 임명하고 圭(규)를 下賜(하사)하며, 百里(백리)의 땅을 封(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위의 위략(魏略)의 내용을 보면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내용과 다르다. 아래는 이 세권에 기술된 문장을 비교한 내용이다.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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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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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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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築) 하였다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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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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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연)은 장군 秦開(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만번한)에 이르는(至)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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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을 보면 위략(魏略)이 사기(史記), 한서(漢書)보다 더 구체적이다.
위략(魏略)에선 '그 서쪽 지방을 공격했다(攻其西方)'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진번(眞番)·조선(朝鮮)의 전 영토를 공격하는 전면전을 치뤄서 진번(眞番)·조선(朝鮮)의 서쪽지역을 빼았은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된다.
위략(魏略)에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만번한)에 이르는(至)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전연(全燕)이 획득한 滿番汗(만번한) 지역은(만번한[滿番汗]까지에 이르는 지역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연(全燕)이 요새(塞)를 짓고(筑) 장애물(障)을 쌓은(築) 진번(眞番)·조선(朝鮮)의 영토였다.
그 만번한(滿番汗)엔('만번한[滿番汗]까지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요동(遼東)과 패수(浿水), 후에 위만조선의 영토에 포함되는 패수(浿水)의 동쪽 지역이자 조선(朝鮮)과 진번(眞番)의 서쪽 변방 일부가 포함되었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후에 다시 언급드리겠지만 이 문장에서 요동(遼東)은 지금의 중국 요동(遼東)과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석된다(보하이[Bohai Sea 渤海] 위에 왕험[王險]이 있고 왕험[王險] 서쪽에 패수[浿水]가 있으며 패수[浿水] 서쪽엔 요동[遼東]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아래는 다시 위략(魏略)의 문장이다.
위략(魏略)에선 '朝鮮(조선)과 燕(연)은 浿水(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朝鮮與燕界於浿水).'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진나라(秦)와는 달리 한나라(漢)는 만번한(滿番汗) 지역 중에 패수(浿水)를 경계로 조선(朝鮮)의 서쪽 지역은 조선(朝鮮)에게 돌려주었다고 해석된다. 즉, 관리의 이유를 들어 패수(浿水)의 동쪽이자 조선(朝鮮)의 서쪽은 한나라(漢, 정확히는 한나라[漢]에 귀속된 연나라[燕]이다)가 영토로 포기했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패수(浿水)는 한나라(漢, 정확히는 한나라[漢]에 귀속된 연나라[燕]이다)와 조선(朝鮮)을 구분하는 나라의 경계이지 지금의 한강처럼 도읍(都)을 가로지르는 강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문장 비교이다.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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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서 진나라(秦)의 옛 개발되지 않은 땅(空地) 위아래 장애물(上下鄣)에 거주했다(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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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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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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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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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중국)의 亡命者(망명자)를 거두어 朝鮮(조선)의 藩屏(번병)이 되겠다고 準(준)을 설득하였다. 準(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박사)에 임명하고 圭(규)를 下賜(하사)하며, 百里(100리)의 땅을 封(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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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들을 모두 검토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보면,
위만(魏滿 or 衛滿)은 패수(浿水)를 건너 진나라(秦)의 '옛 공지 위아래 장애물(故空地上下鄣)'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위략(魏略)'을 보면,
'옛 공지 위아래 장애물(故空地上下鄣)'로 추정되는 지역을 조선(朝鮮)의 '서쪽 변경(西邊)'이라고 칭한 후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봉해(封) 주어 지키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패수(浿水)를 건너 등장하는 조선(朝鮮)의 빈 땅(空地)은 전연(全燕)이 전국시대에 설치한 장애물 위아래(故空地上下鄣)이고 이곳은 조선의 서쪽 변경(西邊)이지 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이 아니다.
조선의 도읍 왕험(王險)은 패수(浿水)를 건너서 더 동쪽으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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