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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한나라 때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 패수(浿水)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8 영양왕(嬰陽王) 23년 06월의 기사이다. (음력 612년 06월)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8 영양왕(嬰陽王) 23년 06월의 본문과 번역이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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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612) 6월에〕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배들이 수백 리 꼬리를 물고 바다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 패수(浿水)로 들어갔다. 평양(平壤)에서 60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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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수나라(隋) 수군이 바다(海)에서 패수(浿水)로 들어가 고구려 평양(平壤)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한 후 더 공격을 감행하다가 고구려 매복군에 걸려 대패한 내용이다.
위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스스로 평양(平壤) 부근의 하천을 패수(浿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에서 패수(浿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광개토왕(廣開土王) 4년 서기로는 395년 음력 8월 기사에서도 등장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광개토왕(廣開土王) 4년의 기사이다. (395년 음력 8월)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광개토왕(廣開土王) 4년의 기사이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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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395) 가을 8월에 왕이 패수(浿水)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패배시키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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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를 보면 395년도에도 고구려에선 패수(浿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위의 삼국사기 395년도 기사에 기재된 패수(浿水)는 612년 기사에 기재된 고구려 평양(平壤) 근처의 패수(浿水)와 같은 하천(河川)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 국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내 생각과 달리 한반도 중부권에 위치한 강(江)이나 하천(河川)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과는 별개로 고구려는 612년보다 이전인 395년도에도 패수(浿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史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 본문과 번역이다. 한문실력이 부족해 번역이 틀릴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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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은 만(滿, 위만을 뜻한다)이다. 옛 연나라 사람이다. “전연(全燕)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귀속시켜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고 장애물(鄣)과 요새(塞)를 지었다(筑). 진나라(秦)가 연나라(燕)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 밖 변방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漢)가 일어났지만('한나라[漢]가 진나라[秦]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으로 해석된다) 멀어서 다스리기 곤란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修) 패수(浿水)까지(至)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燕王 盧綰)이 배반하고 흉노의 영역으로 들어가자 만(滿, 위만을 뜻한다)도 망명하였다. 조직원(黨) 천여명을 모아 상투(魋結 추결)와 이방민족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서 진나라(秦)의 옛 개발되지 않은 땅(空地) 위아래 장애물(上下鄣)에 거주했다. 차츰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 이방인과 옛 연나라(燕)와 제나라(齊)의 망명자 무리들을 부리면서 왕(王)이 되었고,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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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사기(史記)에 기재된 내용이다.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修) 패수(浿水)까지(至)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燕)에 속하게 하였다(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위의 사기(史記)를 보면, 패수(浿水)는 연나라(燕)와 기자조선(and 위만조선) 간에 국경(國境)역할을 하는 경계(界)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패수(浿水)는 나라와 나라 간의 경계(界)인 하천(河川)이지 지금의 한강(漢江)처럼 나라의 도읍(都)을 흐르는 강(江)이 아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 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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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築)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변방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사고(師古)가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임금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 (이(李)는 땅이름이라 하고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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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인용한 내용이다.
'다시 요동의 옛 요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위의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한서(漢書)에서도 패수(浿水)는 연나라(燕)와 기자조선(and 위만조선) 간에 국경(國境)역할을 하는 경계(界)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패수(浿水)는 도읍(都)을 흐르는 강(江)이 아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의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侯準旣僭號稱王, 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爲燕亡人衛滿所攻奪, 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道益山郡.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校, 毛本, 下燕字, 作以.不攻. 攻, 疑作改.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趙一淸曰, 潘韓譌. 兩漢志, 俱作番汗.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趙一淸曰, 漢書地理志, 樂浪郡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 今大同江也. 溴字誤. 下同. 弼按漢書朝鮮傳云, 至浿水爲界. 浿水解見前高句麗傳.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亡字下, 似少一字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弼按, 魏略所云, 與史記漢書朝鮮傳, 略同而較詳, 可補史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 其國, 肇自檀君傳, 一千四十八年, 至周初, 箕子代興, 傳四十世, 爲燕人衛滿襲據其地. 班書, 記漢事, 故託始於滿. 眞番, 本朝鮮附屬番部, 七國時爲燕所略. 武帝, 破朝鮮, 改爲郡. 治霅縣, 在今奉天興廳邊外, 東南至鴨緣江地. 浿水有二, 唐書高麗傳, 南涯浿水, 指大同江, 而此傳浿水, 均指鴨綠江. 今攷據家, 但知大同江爲浿水, 不知鴨綠江亦有浿水之名. 蓋大同江, 在平壤南, 衛滿所都王險城, 卽平壤. 滿渡浿水, 而後居此, 則水在平壤之北可知, 證一. 涉何, 諭右渠還朝, 必經浿水, 證二. 左將軍, 擊破浿水西軍, 方得至王險, 證三. 右渠太子, 入謝天子, 至浿水引歸, 證四. 觀此, 傳中浿水, 皆指鴨綠江, 明矣. 臨屯亦番部. 後爲郡, 治東暆, 今爲朝鮮道江原道江陵府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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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侯 準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역격)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에 이르는(至)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번병)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규)를 下賜(하사)하며, 百里의 땅을 封(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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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의 내용이다.
'漢(한)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노관)으로 燕王(연왕)을 삼으니, 朝鮮(조선)과 燕(연)은 浿水(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위의 내용을 보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에서도 패수(浿水)는 漢(한)나라에 속한 연나라(燕)와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경계(界 or 국경[國境])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패수(浿水)는 나라와 나라 간의 국경(國境)인 하천(河川)이지 북한 평양의 대동강(大同江)처럼 도읍(都)에 위치한 강(江)이 아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427년 음력)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都囯内歴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歴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歴八十三年, 寳臧王二十七年而滅 (古人記録, 自始祖朱蒙王寳臧王, 歴年丁寧纎悉若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亰,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壖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艫千里, 髙㠶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逺近, 則不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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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이 지나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朱蒙王)으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歷年)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년)에 (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고려] 서경(西京)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 입구의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수양제(隋煬帝)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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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저자가 당서(唐書)에 기재된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라는 내용을 참고해서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라고 삼국사기 저자가 직접 결론을 내린 내용이다.(平壤城)
즉, 삼국사기 저자는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은 고려의 서경(西京)이며 평양성(平壤城) 남쪽의 패수(浿水)는 고려 서경(西京)을 흐르는 대동강(大同江)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 저자가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라고 해석한 고려 서경(西京)과 평양성(平壤城)의 남쪽 패수(浿水)라고 해석한 고려 서경(西京) 부근의 대동강(大同江)은 현재 북한의 평양(平壤)과 대동강(大同江)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고려(高麗)의 서경(西京)은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 자치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서경(西京) 남쪽에 흐르던 대동강(大同江)은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흐르는 혼강(渾江)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혼강(Hunjiang 渾江)의 구글지도이다. 고려 때는 대동강(大同江)으로 불렸다고 본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을 보면,
전한(前漢, 西漢), 후한(後漢, 東漢), 서진(西晉) 때까지 패수(浿水)는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위의 사서들의 내용을 보면 왕험(王險) 남쪽에 패수(浿水)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
삼국유사에서 한서(漢書)를 인용할 때 서진(西晉) 시대에 신 찬(臣 瓒)이 주석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기재하고 있다.
물론, 서진(西晉)은 266년에서 316년까지 존재한 나라이다.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위만조선의 지리에 대해 서진(西晉) 때 인물이 정확히 인식하고 기술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위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을 보면 동쪽에는 왕험(王險)이 있는 것으로 기술하거나 그렇게 해석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상세히 표현하면, 위의 사서들을 볼 때,
패수(浿水)를 건너 동쪽은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영토지만 조선의 도읍 왕험(王險)은 아니며 조선의 서쪽 변경(西邊)에 해당된다.
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은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 서쪽 변경(西邊)을 지나서 더 동쪽으로 이동해야 위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삼국사기의 저자가 당서(唐書)를 인용해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한나라(漢)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사서나 지도를 볼 때 맞지가 않는다.
만일 삼국사기 저자 입장에서 사서들을 검토한다면,
당서(唐書)가 아닌 위만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기록된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을 먼저 검토했어야 했다.
당서(唐書)가 아닌 위의 사서들을 보면,
패수(浿水)는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이어진 강이며 패수(浿水)를 기준으로 서쪽은 연나라(燕)이고 패수(浿水)의 동쪽은 조선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는 수직선(그래프상 y축) 형태이지 수평선(그래프상 x축) 형태의 강(江)이나 하천(河川)이 아니다. 패수(浿水)를 기준으로 동서로 갈리지 남북으로 갈리진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당서(唐書)가 구당서(舊唐書)인지 신당서(新唐書)인지는 잘 모르지만
당서(唐書)에서 평양성(平壤城)이 낙랑군(樂浪郡)이라면 평양성(平壤城) 남쪽에 패수(浿水)가 있다는 내용은 위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의 내용과 어긋난다.
아래는 북한 평양시의 구글지도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중 많은 수는 지금의 북한 평양과 대동강을 한나라 낙랑군(樂浪郡)과 패수(浿水)라고 주장한다.
위의 삼국사기의 저자는 고구려 평양성(平壤城)과 패수(浿水)를 고려 서경(西京)과 대동강(大同江)으로 해석했고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이며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남쪽의 패수(浿水)가
옛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浿水)라고 해석한 것인데
이를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중 많은 수는 현재 북한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으로 패수(浿水)를 북한 평양의 대동강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나는 삼국사기의 저자가 기재한 고려 서경(西京)과 대동강(大同江)은 지금의 북한 평양과 대동강이 아니고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과 혼강(渾江)과 압록강(鴨綠江)이 만나는 지점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북한 평양이 낙랑군(樂浪郡)이고 대동강이 패수(浿水)라는 주장을 인정하진 않는다.
그리고 위의 구글지도를 보아도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사료로 보거나 논리적으로도 맞지가 않음을 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면 현재 북한의 대동강은 평양을 가로지르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지나간다.
만일 지금 우리나라의 역사학계 주장처럼 북한 평양의 대동강이 연나라(燕)와 조선의 국경이 되는 패수(浿水)라면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 위서(魏書)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의 내용처럼 대각선으로 흐르는 북한 대동강의 서북쪽이 연나라(燕) 영토에 속한 요동(遼東)이고 북한 대동강의 동남쪽이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서쪽 변경이자 위만조선 멸망 후 패수(浿水)가 속한 한나라(漢) 낙랑군(樂浪郡)이어야 한다.
또한 그곳에서 더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옛 조선의 도읍인 왕험(王險)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반도 압록강 이남에서 북한 대동강 이북까지가 요동(遼東)이었고 전국시대 옛 연나라(全燕) 영토였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나 중국의 사서에서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북한 평양의 대동강은 연나라(燕)와 조선의 경계(界)인 패수(浿水)가 될 수 없다.
또한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기 때문에 현재 북한 대동강의 서북쪽은 요동군(遼東郡)이고 대동강 동남쪽은 낙랑군(樂浪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동강에서 동남쪽으로 100리는 더 이동해야 조선의 왕험(王險)이 있다고 해석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위략(魏略)에 따르면, 그 왕험(王險)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면 마한(馬韓)이 있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후한서(後漢書)와 통전(通典)에 따르면, 그 마한(馬韓)에서 또 다시 동쪽에 진한(辰韓)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함경도나 강원도에 마한(馬韓)이 있었고 동해바다에 진한(馬韓)이 있었거나 동해바다에 마한(馬韓)과 진한(馬韓)이 있었어야 한다.
또한,
삼한(三韓)의 영토가 사방 사천리(地合方四千餘里)라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통전(通典)의 내용과도 서로 부합하지가 않는다.
결국, 구글지도를 놓고 보면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은 사료와도 지도와도 맞지 않고 성립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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