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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辰), 진한(辰韓), 진한(秦韓), 계림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통전(通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通典
三韓後漢時通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晉梁二書作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另條詳後〉是其一國焉大者萬餘户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魏志作月支通考作自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 |
통전
삼한은 후한 때에 통교하였다. 그 첫째는 마한이고, 그 둘째는 진한이고, 그 셋째는 변한이다. ('진서', '양서'에는 변진[弁辰]으로 기록)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쉰네 개 나라가 있고,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닿았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고 그 남쪽은 또한 왜와 닿았다. 모두 일흔 여덟 개 나라가 있다. 백제(다른 조에서 상술)는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며 각기 산과 바다 사이 지역에 산다. 국토의 넓이가 합하여 사방 사천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모두 옛 진국이다(皆古之辰國也). 마한이 가장 커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 나라 출신을 진왕으로 세워 목지국('위지[魏志]'에는 월지[月支], '통고[通考]'에는 자지[自支]로 기록됨)에 도읍을 정하고 전체 삼한의 땅을 다스렸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마한 사람이다. |
하지만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라고 기재되어 있다.
위의 통전(通典)과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모두 옛 진국(辰國)이었지만 엄격히 구별해서 옛 진국(辰國)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은 후에 진한(辰韓)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고 본다.
아마도 통전(通典)과 위지(魏志)에서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으로 칭한 지역은
진한(辰韓)의 전성기 때엔 진한(辰韓)의 영향권에 속했던 진한(辰韓)의 종속세력이었고
중국에선 진한(辰韓)의 영향권에 속한 이 지역들과 세력들을 통칭해서 진국(辰國)으로 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의 통전(通典)을 인용한 내용을 보면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쉰네 개 나라가 있고,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닿았다(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라고 기재되어있다.
고려 때 제왕운기에 보면 고려 서경은 옛 마한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근처의 비류국 역시 후에 고구려가 되었다.
고려 서경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비류국은 현재 중국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약진촌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로 국내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당시 비류국은 길림 통화시 금창진약진촌에서 서쪽 방향에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진한(辰韓)이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는 사서를 볼 때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동쪽 방향인 길림성 지역과 현재 두만강 아래 지역은 진한(辰韓)영토였다고 본다.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其北與濊貊接)'라고 통전(通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진한(辰韓)의 북쪽 영역은 지금의 길림시까지거나 길림시보다는 아래지역까지였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 권8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吉林
謹按吉林周以前為肅慎地漢以後屬挹婁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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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조심스럽게 살펴보건대,
길림은 주나라 이전엔 숙신의 땅이었고
한나라 이후로는 읍루와 말갈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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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내가 설명드렸을 때 길림은 금와(金蛙)의 동부여(東夫餘)로 추정된다고 말씀드렸었다.
만주원류고를 기술한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살펴보건대, 길림은 주나라 이전엔 숙신의 땅이었고 한나라 이후로는 읍루와 말갈의 땅이었다(謹按吉林周以前為肅慎地漢以後屬挹婁靺鞨)라고 기재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 설명드릴 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금와(金蛙)의 동부여(東夫餘)는 부여(扶餘)화된 숙신(肅慎)계
즉, 예맥(濊貊)화된 숙신(肅慎)계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길림(吉林)은 주나라(周) 때엔 숙신(肅慎)의 땅이었거나 숙신(肅慎)의 영향권에 속한 숙신(肅慎) 계열의 지역이었지만 진나라(秦)에서 전한(前漢)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 진나라(秦) 유민과 위만조선(衛滿朝鮮)유민들이 이주하면서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인 숙신(肅慎) 계열들과 함께 거주하며 진한(辰韓)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지금의 길림시 구글지도이다.
길림시 위 11시 방향에 쑹위안시(松原市)가 있고 쑹위안시(松原市) 북쪽에 치치하얼 (齐齐哈尔)이 있다.
옛 탁리국(橐離國)과 북부여(北扶餘)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는 지역이며 탁리국(橐離國)과 북부여(北扶餘)는 예맥(濊貊)계통의 나라로 본다.
따라서 진한(辰韓)의 북쪽 경계는 예맥(濊貊)과 닿은 길림까지거나 길림이 예맥(濊貊)화된 숙신(肅慎)이라면 길림의 남쪽 지역까지라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後漢書
馬韓邑落雜居無城郭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諸小别邑各有渠帥貿易以鐡為貨兒生欲其頭扁皆押之以石弁辰與韓辰雜居城郭衣服皆同其人形皆長大美髪而刑罰嚴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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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마한은 읍과 촌락에 잡거하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秦)에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하여 오니, 마한(馬韓)이 동쪽 지방을 떼어 주었다". 그래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책과 집이 있다. 여러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무역을 할 때에 철을 화폐로 삼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평평하게 하기 위하여 돌로 머리를 눌러 둔다. 변진(弁辰)과 진한(辰韓)은 서로 섞여 살며, 성곽 의복은 서로 형태가 같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형벌은 엄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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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秦) 때 노역을 피해 진나라(秦)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망명하니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주었다고 한다.
이 문장에 대한 내 개인적인 해석은,
진나라(秦) 사람들이 중국의 사서에서 마한(馬韓)으로 칭하는 지역으로 망명했었고
중국사서에서 마한(馬韓)으로 칭하던 지역에선 진나라(秦) 망명자들에게 동쪽 땅을 떼어 주었으며
이들 진나라(秦) 망명자들이 동쪽 땅에서 거주하게 된 후 그들은 진한(秦韓)으로 불리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진한(秦韓)은 진한(辰韓)으로도 불리었다고 해석된다
위의 후한서(後漢書) 내용을 보면 마한(馬韓)과 한국(韓國)을 병행해서 기재했다.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청나라 건륭제의 견해처럼
마한(馬韓)이나 진한(辰韓)은 나라의 명칭이 아니며 그 지역의 지도자 호칭이 한(汗, Khan, Han)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고 해석된다.
즉, 나라 명칭이 한국(韓國)은 아니며 정확히는 한(汗, Khan, Han)이 우두머리인 지역이었고
중국의 사서에서 삼한(三韓)으로 칭하고 기재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의 지도자 명칭은 한(汗, Khan, Han)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其地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各有長帥大者名臣智散在山海間無城郭凡五十餘國總十萬餘户辰王治月支國魏景初中明帝宻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部從事吴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﨑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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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쪽은 왜와 닿았고 그 지방은 사방 사천리이다.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이 서쪽이 있는데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한다. 각기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라 부른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 모두 오십여 개 나라이고 합해서 십만여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위나라 경초 연간에 명제(위[魏]의 2대 황제이며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204년에 출생해서 239년에 사망했다)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주고, 그 다음 지위의 자들에게는 읍장의 관직을 주어 비로소 두 군을 안정화시켰다. 부의 종사인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다스렸으므로, 진한의 여덟 개 나라를 나누어 낙랑에 주려고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의 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자, 신지들이 한나라(韓) 지역민들을 격분시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웠다.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개 군은 마침내 한을 쳐서 없앴다(滅韓, 위지[魏志]에 따르면 한국[韓國]이 멸망한 것은 204년에서 239년이 된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 노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섯 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서 열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두 개 나라가 있었는데, 모든 작은 읍에는 각기 거수가 있고 모두 4~5만 호이다. 그 열두 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는데, 항상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졌다. 토지는 비옥하고 좋다. 변진과 한은 함께 산다. 또한 성곽이 있고 의복과 사는 집은 진한과 같다. 그 중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닿아 있다. 열두 개 나라 또한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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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세 부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고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라고 기재되어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진한(辰韓)이 원래 진국(辰國)의 중심이었다고 해석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후에 삼한의 구성원으로서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으로 알려진 세력은 삼한(三韓)이라는 명칭으로 중국에 알려지기 이전엔 넓은 의미에서 진한(辰韓)의 영향권 안에 있던 진한(辰韓)에 종속된 지역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중국에선 이들을 포괄해서 진국(辰國)으로 칭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마한(馬韓)으로 알려진 세력은 위만조선 유민들이 마한(馬韓)의 지역으로 이주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성장한 세력이었다고 해석된다.
즉, 마한(馬韓)이 땅을 떼어 주어 진한(辰韓)이 형성되었지만 진한(辰韓)이 후에 삼한(三韓)으로 불리게 되는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아서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으로 칭한 지역도 진한(辰韓)의 전성기엔 진국(辰國)으로 칭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위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다스렸으므로(樂浪本統韓國)'라고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한사군이(漢四郡) 등장한 후 동쪽의 한국(韓國, 삼한[三韓])은 낙랑(樂浪)의 통치나 통제를 받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顯慶五年命蘇定方為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自是新羅漸有髙麗百濟之地其界益大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때)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까닭, 이유)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授法敏為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垂拱二年遣使來朝天授三年〈按册府元龜作長壽二年〉政明卒立其子理洪為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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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5년(660)에 명을 내려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삼고 수구과 육군 10만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서 영을 내려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차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점령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
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수공 2년(686)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천수 3년(살펴보면, '책부원구'에는 장수 2년으로 되어 있다)에 정명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효소왕)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은 장안 2년(702)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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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라고 기재하고 있다.
인용된 구당서(舊唐書)의 내용을 보면 당나라가 신라왕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았다.
인용된 위지(魏志)에 기재되었듯이 '낙랑이 본래 한국을 다스렸다(樂浪本統韓國)'는 문장을 근거로
당나라에서 신라왕에게 내린 관직이라고 본다.
또한 당나라 입장에서는 신라는 낙랑군과 같은 당나라의 일개 지역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위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라고 기재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주석하기를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라고 주석했다.
즉,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주도독부(雞林州都督府)로 삼은 것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이미 신라는 고구려 남쪽 영토를 흡수해서 신라의 영토가 말갈(靺鞨)과 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스스로 계림(雞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당나라가 계림(雞林)이라는 단어를 신라에게 수여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의 만주원류고 편찬자는 계림(雞林)을 청나라 때의 길림(吉林)이라고 본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던 당시
즉, 663년 신라가 계림(청나라 때의 길림)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전투 때 신라가 계림(청나라 때의 길림)을 공격해서 확보하라는 뜻을
당나라에서 신라왕에게 전한 것이라고 본다.
(신라가 길림을 확보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이며 신라가 길림을 잃은 것은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것처럼 발해가 이 지역의 패권자가 되었을 때라고 본다)
당나라에선 삼국사기에도 기재된 A.D 65년 사건인 김알지의 등장과 계림(雞林)을 현재의 길림(吉林)으로 봤다고 본다.
통전(通典)에 기록된
'진한은 동쪽에 있고 열 두 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았다.(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라는 문장에서
진한(辰韓)의 최북방지역인 예맥(濊貊)과 맞닿은 지역을 지금의 길림(吉林)시 지역이라고 보았고
그 지역을 김알지가 등장한 계림(雞林)이라고 해석했거나 당나라 당시 그 지역명칭이 계림(雞林)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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