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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진(辰), 마한 본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 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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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처음에 연(燕)나라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에 [연나라가] 이 땅을 처음으로 침략해 얻었다.”라고 하였다)을 빼앗아 거기에 관리를 두고 장(障)새를 쌓게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변방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사고(師古)가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임금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障)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 (이(李)는 땅이름이라 하고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왕검성 서쪽에 패수가 있어야 한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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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서 근거로 제시한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의 문장을 분해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아직 진나라가 전국 7개 나라를 통일하기 전에 연나라(燕)는 주변의 진번(真畨)과 조선(朝鮮)을 얻어 그곳에 관리를 두고 장애물(障碍物)을 설치했다
(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이후 진나라(秦)가 연나라(燕)를 멸한 후 요동 외곽 변방에 속하게 하였다(秦滅燕屬遼東外徼).
전국시대 때(戦國時) 연나라(燕)가 획득(得)해서 장애물(障)을 설치한 진번(真畨)과 조선(朝鮮)지역은 전국(戦國)을 통일한 진나라(秦) 때엔 요동 밖 변방(遼東外徼)에 속한다고 해석된다.
한나라(漢)가 일어났지만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復修遼東故塞)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역사학자 안사고는 “패수(浿水)는 낙랑군에 있다.”라는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다.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망명하여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東走出塞) 패수(浿水)를 건너(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
진나라(秦) 빈 땅의 아래위 장애물에 거주하면서(居秦故空地上下障)
진번(真畨)·조선(朝鮮)의 이방세력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왕검(王儉)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真畨)·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나 되었다(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위의 내용을 보면 위만은 조선(朝鮮) 외에 주변의 진번(真畨)과 임둔(臨屯)을 복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패수(浿水)를 건너면 진번(真畨)과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요동에는 요새를 만들었고 요동 밖 조선과 진번엔 장애물을 설치했는데,
연나라의 장수 위만은 요동의 요새를 빠져나와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옛 진나라의 정복지였던 빈 땅(조선의 서쪽 외곽으로 추정)의 장애물에 거주하며 주변 조선과 진번 그리고 옛 제나라와 연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대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한사군(漢四郡)으로 조선(朝鮮)이 속한 낙랑군(樂浪郡),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속한 현도군(玄菟郡) 외에 진번군(眞蕃郡)과 임둔군(臨屯郡)이 세워지는 데
이 문장을 보면 진번(真畨)과 임둔(臨屯)이 위만조선(魏滿朝鮮)과 별개의 세력이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원문과 번역 내용이다.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逺云, “馬韓麗也辰韓羅也 (㨿本紀, 則 ‘羅先起甲子麗後起甲申, 而此云者以王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已并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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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邑山)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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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삼국유사의 저자는 위지(魏志)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기재한다.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지(魏志)에선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청나라 건륭제의 의견인
무릇 삼한(三韓)의 이름이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열거되어 있으나 그 뜻이 자세하지 않다.
당시 삼국에는 반드시 세 한(三汗)이 있어서 각기 그 하나를 다스렸을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한(汗)이 군장의 호칭인 것을 모르고 마침내 발음만 같은 것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若夫三韓命名 苐列辰韓 馬韓 弁韓 而不詳其義 意當時三國 必有三汗 各統其一 史家不知 汗為君長之稱 遂以音同誤譯)라는 견해와
삼국사기에 기재된,
거서간은 진한 말(辰言)로 ‘왕’이라는 뜻이다(居西干辰言王)는 내용을 대입하면 아래와 같이 해석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다'로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거서간[居西干]은 진국[辰]의 말[言]로 왕이다'로 번역된다).
즉, 건륭제의 의견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왕 준(準)은 바다를 건너 남쪽의 땅으로 갔고 그 땅은 한(汗)내지는 간(干)이 다스리는 땅이었다.
조선왕 준(準)은 바다 건너 남쪽 땅에서 군장(君長)이나 왕(王)의 호칭인 마한(馬汗)이나 마간(馬干)으로 불리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한[韓]의 땅은 이 당시 광의의 진[辰]에 해당된다.)
하지만 위지(魏志)의 저자는 그 땅에서 마한(馬汗)이나 마간(馬干)이라는 명칭이 군장(君長)이나 왕(王)의 호칭인 것을 모르고 나라이름이 마한(馬韓)인 것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해석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위만(魏滿:衛滿)조선(朝鮮)에 대한 내용이다.
傳子至孫右渠, (師古曰 “孫名右渠.”)真畨·辰國欲上書見天子雍閼不通. (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漢使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臨浿水, 使馭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師古曰送何者名也), 即渡水馭入塞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之部都尉. 朝鮮㤪何襲攻殺何. 天子遣楼舡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万. 左將軍荀彘岀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舡將軍將齊七千人先到王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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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이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러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이다.”라고 하였다)
'원봉(元封) 2년에 한(漢)나라에서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를 타일렀으나 끝내 그는 천자의 명령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떠나 국경까지 와서 패수에 이르자, 마부를 시켜 자기를 바래다 준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섭하를 바래다 준 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을 찔러 죽이게 하고는 곧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말을 달려 들어와 드디어 보고를 하였다.
천자는 섭하를 요동(遼東)의 [동]부도위(部都尉)로 임명하였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천자가 누선장군(樓舡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니 군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에서 나와 우거를 치니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은 제나라[땅 출신]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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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다.
그런데 한나라에서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제나라(齊) 땅에서 발해(Bohai Sea)를 건너게 했다고 한다. 이후 누선장군은 왕검에 도착했다고 한다.
여기서 제나라(齊)는 지금의 산동성이다. 그리고 발해(渤海)는 지금도 'Bohai Sea'로 불린다.
(이 문장에서 발해는 대조영이 세운 국가인 발해가 아니라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움푹 들어간 바다를 뜻한다)
만일 위만조선이 압록강 북쪽인 지금의 요령성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있었거나 지금의 북한 평양에 있었다면 황해(서해)를 건너지 발해(Bohai Sea)로 북상할 이유가 없다.
즉, 산동성에서 북상해 발해(Bohai Sea)를 거쳐야 위만조선의 왕검(王儉)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본다.
또한 누선장군이 산동에서 발해(Bohai Sea)로
즉,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왕검으로 향했고 좌장군이 요동에서 나와 위만조선의 왕 우거를 쳤다고 하니
지금의 요동으로 계산하면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지역이 아니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제(齊)나라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제나라 위에 보하이 만(Bohai Sea 발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제나라(齊) 땅에서 누선장군 양복이 발해(Bohai Sea 보하이 만)를 건너 위만조선의 왕검에 도착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발해(渤海 Bo Hai)지도이다. 지도를 보면 발해(渤海 Bo Hai)가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喀左縣) 구산(孤山)의 구글지도이다.
고죽(孤竹)과 기후(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상나라(商) 때 청동기가 1973년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아래는 중국 랴오닝성 진시시 소황지 구글지도이다.
임둔군태수(臨屯郡太守)의 봉니(封泥)가 이 지역에서 1994년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것 하나만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면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 고죽국(孤竹國)으로 인정되는 지역이고,
왕검(王儉)을 치기 위해 산동의 제나라(齊)에서 발해(渤海 Bo Hai)로 북상했다는 기록을 검토해보면 조선(朝鮮),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은 대략 이 지역들 주변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지역들의 서쪽에 당시의 요동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즉, 이 당시의 요동과 지금의 요동은 같은 지역이 아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魏略
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亦與朝鮮真畨不相往來至王莽時亷斯鑡為辰韓右渠帥欲來降出其邑落見一人其語非韓人問之曰我等漢人名户來我等軰千五百人伐材木為韓所得積三年矣辰鑡因將户來出詣樂浪郡郡令鑡乗大船入辰韓取户來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辰韓曰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疋鑡収取直還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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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옛날에 우거(조선왕 위만의 손자)가 아직 패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우거가 이를 듣지 아니하자, 그가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조선의 동쪽에 진국이 있다). 이때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 호였다. 이들 또한 조선(朝鮮) 진번(真畨)과는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였다(진국은 진번과는 구별된다). 왕망 때에 이르러 염사 사람 착이,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와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 읍락을 나왔을 때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말씨가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자 대답하되, "우리들은 한인(漢人)이며 이름은 호래입니다. 우리들 무리 천오백 명은 목재를 벌목하였는데, 한나라(韓)에 붙잡힌 지 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辰)의 착이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에 이르렀다. 낙랑군에서는 착을 큰 배에 태워 진한에 들어가게 하여, 호래의 무리를 데려오게 하였는데 천 명을 거두었다. 나머지 오백 명은 이미 죽었다. 진한에서 말하길 "우리가 마땅히 보상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한에서 일만 오천 명이 변한포 만 오천 필을 내주자, 착이 이를 받아서 곧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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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만주원류고에선 위략(魏略)을 인용해
옛날에 우거(조선왕 위만의 손자)가 아직 패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우거가 이를 듣지 아니하자, 그가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 호였다(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라고 기재했다.
위의 위략(魏略)을 보면 조선의 동쪽에 진국(辰國)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보면 왕검(王儉)의 남쪽은 발해(渤海 Bo Hai)로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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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에선 주몽이 고구려현을 세운 곳을 옛 위만조선의 지역이 아닌 진국(辰國)의 영토였던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위만조선의 실향민들의 나라인 마한(馬韓) 땅이다.
다만,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과 같은 명칭을 사용해서 마한(馬韓) 땅이 옛 위만조선의 실향민 거주지역임을 내세운다.
아래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추정하는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 구글지도이다.
위만조선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발해(渤海 Bo Hai) 위의 요서지역과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과 그 부근에서 동쪽지역에 지금의 요령성 환인만주족자치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위략(魏略)에 기재된 것처럼 위만조선의 동쪽에 진국(辰國)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옛 진국(辰國)이었으며 마한(馬韓)에 속한 지역이 된다.
위만조선 멸망 후 진국(辰國)의 영토인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은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이 되었고 그 주변의 비류국 역시 옛 기자조선의 후예인 송양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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