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책봉, 기자조선, 요동, 압강 (수정된 내용)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책봉, 기자조선, 요동, 압강 (수정된 내용)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8. 15. 19:15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 16년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933년 3월 5일 신사(辛巳))

 

고려시대 사료 DB

(癸巳)十六年 春三月 辛巳 唐遣王瓊·楊昭業來冊王, 詔曰 “王者法天而育兆庶, 體地而安八紘, 允執大中, 式彰無外. 斗極正而衆星咸拱, 溟渤廣而百谷皆宗. 所以居戴履之倫, 窮照臨之境, 弘道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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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 16년에 대한 내용 중 일부 원문과 번역이다.

其有地, 稱平壤, 師擅兼材. 統五族之强宗, 控三韓之奧壤, 務權鎭靜, 志奉聲明, 爰協彛章, 是加寵數. 咨! 爾權知高麗國王事建! 身資雄勇, 智達機鈴, 冠邊城以挺生, 負壯圖而閒出. 山河有授, 基址克豊.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그대는 차지한 땅을 평양(平壤)이라 일컬었으며 군사를 장악하고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족(五族)의 강한 우두머리를 통합하고 삼한(三韓)의 비옥한 땅을 지배하여, 〈혼란한 판국을〉 진정시키는 데 힘쓰고 〈상국의〉 성명(聲明)을 받들고자 뜻하였으니 이에 상례[彛章]를 따라 은총의 예를 더한다.
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王建)은 자질이 웅대하고 용맹하며 지혜는 기략[機鈴]에 통달하였고, 변방에서 으뜸으로 빼어나게 태어났고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드러내었다. 산하(山河)가 내려준 바, 터전이 지극히 풍요하다. 주몽(朱蒙)이 건국한 상서로움을 계승하여 저들의 왕이 되고, 기자(箕子)가 번국(蕃國)을 이룬 자취를 밟아서 은혜와 조화를 펼치고 있다.

933년 후당으로부터 왕건이 고려국왕으로 책봉을 받는 내용이다.

 

후당에서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할 때

'그대는 차지한 땅을 평양이라고 일컬었으며(其有地, 稱平壤)',

'주몽이 건국한 상서로움을 계승하여(踵朱蒙啓土之禎)',

'기자가 번국을 이룬 자취를 밟아서(履箕子作蕃之跡)',라는 문장이 기재되어 있다.

 

태조왕건이 후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당시 중국에선 '고구려 평양'과 '주몽이 건국한 지역' 그리고 '기자의 번국'은 모두 고려 때 요동(遼東)을 뜻하는 단어였다.

물론 '주몽이 건국한 지역'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요나라 동경의 서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견해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기자의 번국(기자조선)이 있던 곳이 고려 때 요동(遼東)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당시 중국은 고려에게 '요동(遼東)에 기자의 번국(기자조선)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여기에 대해선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이 책봉에 기재된 내용은 고려와 후당 간의 계약이다. 서로 간에 영토와 경계를 확실히 하는 계약 문서이다.

고려는 요동(遼東)을 넘어서 후당을 침범해선 안되고 후당 역시 요동(遼東)으로 침범해선 안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어기면 책봉관계는 파기되고 평화는 끝나며 전쟁으로 확장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5년 3월의 내용이다. 996년 3월 미상(음)

 

고려시대 사료 DB

(丙申)十五年 春三月 契丹遣翰林學士張幹, 忠正軍節度使蕭熟葛, 來冊王曰, “漢重呼韓, 位列侯王之上, 周尊熊繹, 世開土宇之封. 朕法古爲君, 推恩及遠. 惟東溟之外域, 順北極以來王, 歲月屢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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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3 세가 성종 15년 3월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咨! 爾高麗國王王治, 地臨鯷壑, 勢壓蕃隅. 繼先人之茂勳, 理君子之舊國, 文而有禮, 智以識機. 能全事大之儀, 盡協酌中之体. 鴨江西限, 曾無恃險之心, 鳳扆北瞻, 克備以時之貢. 言念忠敬, 宜示封崇, 升一品之貴階, 正獨坐之榮秩. 仍䟽王爵, 益表國恩, 冊爾爲開府儀同三司尙書令高麗國王. 於戱! 海岱之表, 汝惟獨尊, 辰卞之區, 汝惟全有.
아아! 그대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는 그 땅이 메기가 사는 골짜기[鯷壑, 고려의 별칭]에 있으면서 다른 나라들[蕃隅]을 위세로 눌렀다. 선인(先人)의 뛰어난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군자(君子)의 옛 나라를 다스리니,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사대(事大)의 의례가 능히 온전하였으며 조절하는 요체(要體)가 모두 〈그를〉 도왔다.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일찍이 그 험한 지세를 믿는 마음이 없었으며, 황제가 있는[鳳扆] 북쪽을 우러러보며 때를 맞추어 조공(朝貢)을 보냈다. 그대의 충성과 공경함을 말하고 생각하자면 마땅히 높은 관작(官爵)에 봉하여 1품의 귀한 자리에 올리고 바로 홀로 앉는 영예로운 직위를 받아야 한다. 이에 국왕의 작위를 주어 더욱 나라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그대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는다.
아아!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바깥 지역에서는 오직 그대만이 홀로 존귀하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거란에서 고려국왕을 책봉하는 내용이다.

거란의 책봉문서엔 기자의 나라(箕子之國)라는 문구가 없다. 다만 모호한 문구가 등장한다.

'선인(先人)의 뛰어난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군자(君子)의 옛 나라를 다스리니(繼先人之茂勳, 理君子之舊國)'

옛 선인(先人), 군자(君子)는 기자(箕子)를 뜻하는 문장으로 보이지만 기자(箕子)나 요동(遼東)을 명확하게 적시하질 않았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미 요동(遼東) 일부를 소유한 거란이 고려가 기자의 번국(箕子之國)을 온전히 계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본다

즉, 고려의 요동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문장이라고 본다.

(당시 고려는 압록강[鴨綠江] 위 지역인 고려서경을, 거란은 요동 일부를 소유하며 요동을 서로 완전히 소유하지는 못한 상태였다고 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鴨江西限)'라고 위의 책봉내용을 번역했는데 이 문장 역시 원문과 일치하지 않은 번역이다.

고려사 원문엔 '鴨江西限'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압강(鴨江) 서쪽을 한계로 한다'이다.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과 연결된 지류이기 때문에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엄연히 다른 강이며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북쪽에 위치한 강으로 보인다고 이전에 올린 글에서 말씀드렸다.

거란의 책봉문서를 보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辰卞之區, 汝惟全有)'라고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옛 마한지역에 대한 소유여부는 현재 고려와 다툼이 있다'는 뜻으로 '고려가 고구려 영토(옛 마한지역) 모두를 소유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7 세가 문종 9년 7월의 내용이다.1055년 7월 1일(음) 정사(丁巳)

 

고려시대 사료 DB

秋七月 丁巳朔 都兵馬使奏, “契丹前太后皇帝, 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然或置城橋, 或置弓口欄子, 漸踰舊限, 是謂不厭. 今又創立郵亭, 蠶食我疆, 魯史所謂, ‘無使滋蔓, 蔓難圖也.’ 宜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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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7 세가 문종 9년 7월의 내용 중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秋七月 丁巳朔 都兵馬使奏, “契丹前太后皇帝, 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然或置城橋, 或置弓口欄子, 漸踰舊限, 是謂不厭. 今又創立郵亭, 蠶食我疆, 魯史所謂, ‘無使滋蔓, 蔓難圖也.’ 宜送國書於東京留守, 陳其不可, 若其不聽, 遣使告奏.” 於是, 致書東京留守曰,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矧前太后皇帝, 玉冊頒恩, 賜茅裂壤, 亦限其江. 頃者, 上國入我封界, 排置橋壘. 梯航納款, 益勤於朝天, 霤闥抗章, 乞復其舊土, 至今未沐兪允, 方切禱祈. 又被近日來遠城軍夫, 逼邇我城, 移設弓口門, 又欲創亭舍, 材石旣峙, 邊民騷駭, 未知何意. 伏冀, 大王親隣軫念, 懷遠宣慈, 善奏黈聰, 還前賜地, 其城橋弓欄亭舍, 悉令毁罷.”
가을 7월 정사 초하루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거란(契丹)의 전 태후황제(太后皇帝)가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이동 지역을 하사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城)과 다리[橋]를 설치하거나 궁구난자(弓口欄子)를 설치하기도 하여 점차 옛 경계선을 넘어오니 이는 속이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을 설치하여 우리 강토를 잠식하니, 『춘추[魯史]』에 이른바 ‘만연하게 하지 말라. 만연하면 도모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그 불가함을 말하고, 만약 듣지 않으면 〈거란 황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실정을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동경유수에게 국서를 보내기를,
본국은 기자(箕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원문엔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원문과 다른 번역이다)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도 옥책(玉冊)으로 은혜를 내려 봉토를 하사하여 땅을 나누고 또 압록강(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원문엔 其江[기강]으로 기재되어 있다. 其江[기강]은 번역하면 '그 강'이다. 따라서 其江[기강]은 압강[鴨江]을 가리킨다)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요사이 상국에서 우리 영토의 경계에 들어와서 다리와 보루를 설치하였습니다. 먼 곳까지 가서 정성을 다하고 〈귀국의〉 황제를 뵙기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전(御前)에 장주(章奏)를 보내 옛 영토 회복을 빌었으나 지금까지 허락을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또 요즈음 내원성(來遠城)의 군부(軍夫)가 우리 성 가까이 다가와 궁구문(弓口門)을 옮겨 설치하고, 또 정사(亭舍)를 세우려고 목재와 석재를 이미 쌓아놓아 변방 백성이 놀라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이웃 나라와의 친선을 잘 고려하여 먼 땅에 자비를 베풀고, 귀국 황제에게 잘 아뢰어 전에 하사한 땅을 돌리도록 하며 그 성과 다리, 궁란(弓欄)과 정사(亭舍)는 모두 철거하여 없애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은 고려가 거란이 압강을 넘어와 다리와 보루를 건설한 것에 대한 항의하는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문장이다.

"압록강(鴨綠江) 이동 지역을 하사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이 되었습니다(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을 보면 압강(鴨江)으로 기재되어있다.

이 문장에서 보듯 압강(鴨江)은 고려와 거란의 경계인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고려에선 기자의 나라(기자조선)를 근거로 압강(鴨江)이 고려와 거란의 경계라고 밝히는 문장이 등장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문장이다.

"본국은 기자(箕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위의 문장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압강(鴨江)으로 기재된 원문과 달리 압록강(鴨綠江)으로 번역하고 있다.

번역자가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인 것으로 해석된다'고 가정을 해도 번역자가 번역할 때는 자신의 주관은 제하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선 한 단원에 첫 번째 문장에선 압록강(鴨綠江)으로 두 번째 문장에선 압강(鴨江)으로 기재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장은 고려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이런 경우 모두 압록강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아래의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의 내용을 보면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과 달리 요동(遼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고려사를 보면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서 압록강(鴨綠江)의 북쪽에 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고려시대 사료 DB

九月 遣太僕少卿金先錫如遼, 乞罷榷場. 表曰, “三瀆靡從, 雖懼冒煩之非禮, 一方所願, 豈當緘黙以不言? 况昔者, 投匭上書, 萬姓悉通於窮告, 呌閽檛鼓, 四聰勿閡於登聞. 幸遭宸鑑之至公, 盍寫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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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선종5년 9월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臣伏審承天皇太后, 臨朝稱制, 賜履劃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甫叅於禹會. 獎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엎드려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국정을 맡아 섭정할 때에 봉토를 나누어 내려 주었으니, 순(舜)의 문덕(文德)에 따라 방패를 들고 춤추듯[舞干] 하였고 우(禹)의 회합에 옥(玉)을 들고 참여한 듯하였습니다. 신하의 절개를 칭찬하여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주었으니, 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위의 내용은 거란이 각장(榷場)을 설치하려는 정보를 듣고 고려에서 거란의 황제에게 항의하는 내용이다.

앞의 압강(鴨江)의 내용보다 더 구체적으로 고려에서 거란에게 이전의 합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의 서쪽 지점에서 주몽이 자라가 놓아준 다리를 건넌 강(日子鼈橋之水)까지를 선으로 그은 다음,

그 선의 서쪽이 거란의 땅, 그 선의 동쪽이 고려의 땅이라고 거란의 승천황태후 때 서로 합의를 본 것을 상기시킨다.

 

주몽(日子)이 자라(鼈)가 놓아준 다리(橋)가 있는 강(水)(日子鼈橋之水) 옛 부여 땅에 있다고 광개토대왕릉비나 중국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

 

천황학주(天皇鶴柱)는 요동(遼東)을 뜻하고 천황학주의 성(天皇鶴柱之城)은 요동지역의 성을 뜻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9 문종 26년 6월 내용이다. (음력 1072년 6월 26일)

 

고려시대 사료 DB

甲戌 金悌還自宋, 帝附勑五道. 其一曰, “卿繼奕世而有邦, 以勤王爲可願. 百名修貢, 旣申琛贄之儀, 累幅摛辭, 更致燠寒之問, 其勤至矣, 何慰如之!" 其二曰, “卿世綏三韓, 雄視諸部, 而能謹事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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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9 문종 26년 6월의 원문과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其四曰, “人使金悌至, 省所進奉,.............................. 卿世撫遼東, 寔冠帶禮義之國, 心存闕下, 希文物聲明之風. 爰遣使人, 遐將貢篚, 承考惟孝, 事大則忠, 發於至誠, 輳是雙美, 覽閱之際, 嘉嘆良多. 今使回, 賜卿銀器等, 具如別幅, 至可領也.”
其五曰, “省人使金悌奏, ‘於普炤王寺等處, 納附銀設齋, 祝聖壽事.’ 箕子啓封, 肇於遼左, 僧伽演敎, 追在泗濱. 會使指之 來斯致齋, 修而勤甚, 載披善祝, 益炤端誠.”
帝以本國尙文, 每賜書詔, 必選詞臣著撰, 而擇其善者, 所遣使者, 其書狀官, 必召赴中書, 試以文, 乃遣之.
그 네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사신 김제가 이르러 올린 것을 살펴보니,.......................................... 경(卿)은 대대로 요동(遼東)을 다스렸는데 진실로 예의가 바른 나라[冠帶禮儀之國]이며, 마음을 우리 조정에 두어 문물이 밝게[聲明] 교화됨을 소망하였다. 이에 사신을 보내 멀리까지 공물을 바치고, 부친을 계승함에 효성스럽고 사대함에는 충성하여 진심으로 우러나니, 이것은 〈충효의〉 두 가지 미덕이 모인 것이어서 표문을 읽을 때에 감탄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았다. 이제 사신이 돌아가므로 그대에게 은기(銀器) 등을 별지[別幅]와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거든 수령하라.”
라고 하였다.
그 다섯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사신 김제가 아뢴 것을 살펴보니, ‘보소왕사(普炤王寺) 같은 장소에서 은을 납부하고 재(齋)를 지내 황제의 장수[聖壽]를 축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봉토(封土)를 열어 요동에서 시작하였고, 승가(僧伽)가 가르침을 펴서 사수(泗水) 가에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마침 사신에게 명하여 이곳에 와서 재를 올림[齋修]이 매우 정성스러운데, 〈나를 위해〉 좋게 축원해주니 더욱 성의가 빛난다.”
라고 하였다.
황제는 우리나라가 문(文)을 숭상한다 하여 매번 조서를 보낼 때마다 반드시 사신(詞臣)을 뽑아서 짓도록 하고 그 중 잘 된 것을 택하였으며, 보낼 사신과 서장관(書狀官)도 반드시 중서성(中書省)에서 문장(文章)을 시험하고서야 파견하였다.

위의 문장은 송나라황제가 고려국왕 문종에게 칙서(勅書) 5통(道)과 예물을 보낸 내용이다.

고려와 거란이 요동에서 경계를 나누어 대치하고 있었지만 고려가 기자의 나라가 있던 요동을 대대로 다스리고 있었다며 송나라는 고려의 주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안익·김희선·권근 등이 황제의 칙위 조서, 선유 성지, 어제시, 예부의 자문을 받들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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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의 내용 중 원문과 번역이다.

..................宣諭聖旨曰:
朝鮮國王, 我上出氣力。 洪武二十一年, 爾小國軍馬到鴨綠江, 起將來打這中國。 那時節, 李諱一發回去。 如今得了王高麗國, 改號朝鮮,.............................
御製詩曰:
鴨綠江淸界古封, 强無詐息樂時雄。 逋逃不納千年祚, 禮義咸修百世功。 漢代可稽明在冊, 遼征須考照遺蹤。 情懷造到天心處, 水勢無波戍不攻。 【右鴨綠江。】
遷遺井邑市荒涼, 莽蒼盈眸過客傷。 園苑有花蜂釀蜜, 殿臺無主兔爲鄕。 行商枉道從新郭, 坐賈移居慕舊坊。 此是昔時王氏業, 檀君逝久幾更張。 【右高麗故京。】
入境聞耕滿野謳, 罷兵耨種幾春秋? 樓懸邊鐸生銅綠, 堠集煙薪化土丘。 驛吏喜迎安遠至, 馹夫忻送穩長遊。 際天極地中華界, 禾黍盈疇歲歲收。 【右使經遼左。】....................
..............선유 성지(宣諭聖旨)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이여! 나는 아직도 기운이 난다. 홍무(洪武) 21년에 그대의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 하였다. 그 시절에 이(李) 【휘(諱).】 가 한 번에 회군하여 지금 고려국에 왕노릇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쳤으니........................
어제시(御製詩)에는,
"압록강 맑고 지경은 옛 정한 대로,
강했어도 거짓 없이 시대의 영웅이라 즐겨한다.
도망친 죄인을 들이지 않는 1천 년의 복지,
예절과 의리 모두 백세의 공적 이루었네.
한나라의 정벌은 분명히 책에 있어 상고하겠고,
요나라의 정벌한 것006) 남긴 자취 살펴야 할 것일세.
정회(情懷)는 하늘 중심에 성취된 듯,
물에는 파도 없고 수자리도 변동 없다." 【위는 압록강(鴨綠江).】
"우물과 동네 옮겨 가서 저자가 황량하여,
우거진 풀 눈에 가득 길손이 상심한다.
비원[園苑]에는 꽃이 있어 벌이 꿀 모아가고,
궁전과 누대(樓臺)에는 주인 없어 토끼의 고장 되었네.
행상(行商)은 길을 돌아서 새 성으로 가고,
앉은 장사 옮겨 살며 옛 동네 그리워한다.
이것이 옛날 왕씨의 기업(基業),
단군(檀君)이 가신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更張)하였노." 【위는 고려(高麗)의 고경(古京).】
"지경에 들어서면 들에 가득 농사하는 노래 들린다.
군사를 파하고 김매고 심은 지 몇 춘추(春秋)인가.
수루(戍樓)에 달린 변탁(邊鐸)이 녹슬고,
망보(望堡)에는 재와 낙엽 몰려서 흙더미 되었네.
역리(驛吏)는 먼 길 편히 온 것 기쁘게 마중하고,
일부(馹夫)들 기쁘게 놀라고 좋아서 전송한다.
하늘 끝 땅 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
벼와 기장 밭에 가득하여 해마다 거둔다." 【위는 사신이 요좌(遼左)를 지나며.】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조선의 이성계에게 보낸 선유성지(宣諭聖旨)의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 요동의 기자조선영역을 보장하는 기자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을 뜻하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게 승인받았으므로,

기자의 번국이 있던 요동도 확보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내심은 달랐다고 본다.

주원장의 선유성지(宣諭聖旨) 내용을 보면,

이성계는 압강(鴨江) 앞에서 군사를 돌렸는데 주원장은 이성계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고(到)

장차 중국을 치려했다고 언급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성계 부대는 부교(임시다리)를 이용해 압록강(鴨綠江)을 건넌(渡) 후 뗏목을 타고 압강(鴨江)을 거슬러 올라가다가(過)

압강(鴨江) 옆의 백사장(洲)에 내려서 둔(屯)을 치고 있었고 洲(백사장)에서 앞강(鴨江)을 바라보고 있던 상황인 것으로 그려진다.

이성계가 고려우왕의 명을 받아 명나라의 요양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군대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에 이른(到) 것도 맞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고 할 때가 아니라 명나라 치는 것을 포기하고 고려를 치려고 돌아올 때 압록강(鴨綠江)에 이른(到) 것으로 기재한다.

따라서 주원장의 선유성지(宣諭聖旨) 늬앙스는

"조선은 앞으로 압록강(鴨綠江)의 북쪽을 생각하지 말라!"로 해석된다.

'명나라는 기자의 번국에 해당되는 요동지역을 조선에게 보장해주지 않겠다'는 주원장의 마음을 내비친 것이라고 본다.

실제 역사진행도 조선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주변을 확실히 점유하지 못하고 명나라 영락제에 의해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모련위, 건주좌위, 건주우위, 건주위 등에게 점유를 잃게 된다.

그리고 주원장은 세 개의 시를 선물로 준다.

'압록강(鴨綠江)'과 '고려의 고경(高麗故京)' 그리고 '사신이 요좌를 지나며(使經遼左)'이다.

'요좌를 지나며'라는 시는 처음 문장에 국경에 들어선 내용을 밝힌다.

"지경(境)에 들어서면 들에 가득 농사하는 노래 들린다(入境聞耕滿野謳)."

(경, 국경, 경계)을 지나면 遼左(요좌, 遼東[요동])가 있음을 밝힌다.

즉, 요좌(遼左, 요동[遼東])가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압록강(鴨綠江)'이라는 제목에서 보듯 주원장은 조선에 계속 '압록강(鴨綠江)'을 언급한다.

또한 시에선 단군을 언급하지만 기자를 언급하진 않는다.

기자조선과 달리 단군조선은 활동배경이 한반도와 압록강(鴨綠江)과 가까운 고려 서경(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이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단군조선의 배경은 평안도의 묘향산, 황해도의 신천, 황해도의 연안, 배천, 개풍 그리고 고려 서경(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이다.

주원장의 내심은 이 영역까지만 앞으로 조선의 영역으로 보장해주겠다는 의도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