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우라산성, 오녀산성, 황성, 서경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우라산성, 오녀산성, 황성, 서경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8. 23. 01:02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恭愍王十九年庚戌正月, 太祖以騎兵五千、步兵一萬, 自東北面踰黃草嶺, 行六百餘里, 至雪寒嶺, 又行七百餘里, 渡鴨綠江。 是夕, 京城西北方紫氣漫空, 影皆南。 書雲觀言猛將之氣。 王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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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의 원문과 번역이다.

〔○〕恭愍王十九年庚戌正月, 太祖以騎兵五千、步兵一萬, 自東北面踰黃草嶺, 行六百餘里, 至雪寒嶺, 又行七百餘里, 渡鴨綠江。 是夕, 京城西北方紫氣漫空, 影皆南。 書雲觀言猛將之氣。 王喜曰: "予遣李, 【太祖舊諱。】 必其應也。"
時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兒, 聞太祖來, 移保亏羅山城, 欲據路以拒。 太祖至也頓村, 李原景來挑戰。 【原景卽吾魯帖木兒。】 俄而棄甲再拜曰: "吾先, 本高麗人, 願爲臣僕。" 率三百餘戶來降。 其酋高安慰猶據城不降, 我師圍之。 時太祖不御弓矢, 取從者弓, 用片箭射之, 凡七十餘發, 皆正中其面, 城中奪氣。 安慰不能支, 棄妻孥, 縋城夜遁。 明日, 頭目二十餘人, 率百姓出降, 諸山城望風皆降, 得戶凡萬餘。 以所獲牛二千餘頭、馬數百餘匹, 悉還其主, 北人大悅, 歸之如市。 於是, 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海, 南至鴨綠江, 爲之一空。
皇城, 古女眞皇帝城也。 太祖以元樞密副使拜住及東寧府 李原景、李伯顔、李長壽、李天祐、玄多士、金阿、魯丁等三百餘戶來獻。 太祖之入亏羅也, 聞毁垣中有哭聲, 使人就視之, 有一人裸立而泣曰: "我元朝壯元及第拜住也。 貴國李仁復, 吾同年。" 太祖一聞壯元之名, 卽解衣衣之, 與馬騎之, 遂與俱來, 王賜拜住姓名韓復。 復事太祖甚謹。
공민왕 19년(1370) 경술 정월, 태조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울의 서북방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용감한 장수의 기상입니다."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感應)일 것이다."하였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 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원경(李原景) 【원경(元景)은 곧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이다.】 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이 당시의 동녕부의 위치는 서경이 아니라 요양이다. 실제 원나라의 동녕부는 아니고 기사인테무르와 원나라 지방관리들이 가짜동녕부라를 만든 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이곳이라며 고려를 압박하던 것으로 보인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이 부분은 고려사에 없는 내용이다. 전후사정으로 보면 서경에 해당되는 데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여진이 황제를 칭한 것은 금나라 때이고 금나라의 도읍 중에 이 지역에 도읍은 없었다) 태조는 원(元)나라 추밀 부사(樞密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東寧府)의 이원경(李原景)·이백안(李伯顔)·이장수(李長壽)·이천우(李天祐)·현다사(玄多士)·김아(金阿)·노정(魯丁) 등 3백여 호(戶)가 와서 〈왕에게〉 바쳤다. 태조가 우라(亐羅)에 들어갈 적에 무너진 담안에서 곡성(哭聲)이 있음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원(元)나라 조정에서 장원 급제(壯元及第)한 배주(拜住)인데, 귀국(貴國)의 이인복(李仁復)도 나와 동년(同年)입니다."하였다. 태조는 장원(壯元)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를 입히고, 말을 주어서 그를 타게 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오니, 왕이 배주(拜住)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姓名)을 내려 주었다. 한복이 태조를 섬기되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내용이지만 이미 고려사에서도 기재된 내용이다.

 

후반부에 보면 고려사에 기재되지 않은 문장도 등장한다.

'皇城, 古女眞皇帝城也(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라는 문장이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역사학자나 강의를 하는 분들이,

공민왕의 명을 받고 동녕부를 공격하러 간 이성계가 지금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함락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즉, 위의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우라산성(亐羅山城)이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해석한 후 이성계가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함락했다고 주장한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현재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위치한 산성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이 당시는 고려가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군이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함락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즉, 고려는 이미 80년 전 원나라로부터 동녕부를 돌려받아 고려서경(옛 원나라 동녕부[or 동녕로])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이성계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함락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정리하면, 이성계가 동녕부를 공격하러 간 시기는 1370년도이고 동녕부(고려서경,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된다)는 이미 80년 전인 1290년 충렬왕 때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기 때문에 고려서경은 고려가 소유하고 있어 오녀산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즉, 이성계가 함락시킨 우라산성은(亐羅山城)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당시 공민왕에 의해 이성계가 공격하러 간 동녕부는 진짜동녕부가 아니라고 이미 올려드린 글에서 말씀드렸다.

 

당시 기황후의 혈족인 기사인테무르와 원나라 지방관리들이 서로 결탁해서 요양부근에 (가짜)동녕부를 만든 후,

"이 동녕부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다. 따라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은 근거가 약하다."라며 고려와 공민왕을 압박하던 수단으로 활용하던 게 (가짜)동녕부였다고 해석된다.

 

결국, 기사인테무르와 원나라 지방관리가 만든 (가짜)동녕부를 공격하기 위해 고려공민왕의 명을 받은 이성계는 요양부근으로 진군하던 중 우라산성(亐羅山城)을 함락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우라산성(亐羅山城)의 우라(亐羅)는 여진어 울라(Ula)의 한문음차표기이다.

누르하치 당시 하질귀(何叱貴부잔타이[布占泰])의 영역인 현재 길림시 역시 당시엔 울라(Ula)로 불렸으며 한문음차표기론 烏喇(오랍)으로 표기했었다.

Ula(亐羅[우라], 烏喇[오랍])는 강(江)이라는 뜻의 여진어이다.

 

즉, 우라산성(亐羅山城)의 의미는 '강 옆의 성'이라는 뜻이며, 우라산성(亐羅山城)은 그러한 성들 중에 고유명사가 된 성이었다고 본다.

 

우라산성(亐羅山城)이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아닐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고려사를 그대로 옮긴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위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성계가 이원경의 항복을 받고 우라산성을 공략하자 주변에서 이성계에게 모여들어 귀순했고 때문에 주변의 동서남북이 텅 비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오로테무르는 이원경의 몽골식 이름이다. 이원경의 손자는 조선 세조 때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의 이시애이다)

 

조선왕조실록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於是, 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海, 南至鴨綠江, 爲之一空).'

 

위의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내용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이성계가 있던 우라산성(亐羅山城)에서 동쪽으론 황성(皇城)이 있다.
그리고 고려사에 보면 황성(皇城)은 고려서경(西京)에 있다.
이성계가 있던 우라산성(亐羅山城)에서 북쪽으론 동녕부가 있다.
동녕부는 기사인테무르의 소굴인 요양(遼陽)부근에 있다.
이성계가 있던 우라산성(亐羅山城)에서 남쪽으론 압록강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있던 우라산성(亐羅山城)에서 서쪽으론 바다라고 한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아래와 같은 정의가 내려진다.

황성(皇城)이 있는 서경(西京)은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한다.
고려서경(西京)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그런데 이성계가 함락한 우라산성(亐羅山城)의 동쪽엔 황성(皇城, 고려서경)이 있다.
따라서 위치로 볼 때 이성계가 함락한 우라산성(亐羅山城)은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아니고
오녀산성(五女山城)부근에 위치한 서경(西京)에서 서쪽방향의 성이다.
이성계가 함락한 우라산성(亐羅山城)의 북쪽 지역에 동녕부가 있다.
그리고 그 동녕부는 요양
(遼陽) 부근에 있다고 추정된다.
(우라산성[亐羅山城] 북쪽에 요양[遼陽]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일 우라산성(亐羅山城)이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가정한다면
오녀산성
(五女山城)의 북쪽에 요양(遼陽)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녀산성(五女山城) 북쪽엔 요양(遼陽)이 없다.
요양
(遼陽)은 오녀산성(五女山城)의 서쪽에 있다.

즉, 오녀산성(五女山城)의 9시 방향에 요양(遼陽)이 있다.
따라서 오녀산성(五女山城)과 우라산성(亐羅山城)은 같은 산성(山城)이 아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82 지 권 36의 내용이다. (1011년 미상(음))
 

고려시대 사료 DB

志 卷第三十六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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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82 지 권 36의 내용 원문과 번역이다.

二年 增修松岳城, 築西京皇城.
〈현종(顯宗)〉 2년(1011)에 송악성(松岳城)을 크게 수축(修築)하고, 서경(西京)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서경(西京) 황성(皇城)을 쌓았다(築西京皇城)'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가 함락한 우라산성(亐羅山城)의 동쪽에 있다는 황성(皇城)은 바로 고려의 서경(西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서경(西京)은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는 환인만주족자치현 오녀산의 구글지도이다.

 

Wunvshan · 중국 번시 시 환런 만족 자치현 邮政编码: 117201

★★★★★ · 산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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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이성계가 함락한 우라산성(亐羅山城)이라면 이 오녀산성(五女山城) 북쪽에 동녕부(東寧府)가 있던 지금의 요양시(辽阳市)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양시(辽阳市)는 9시 방향에 있다. 즉, 서쪽에 있다.

 

 

아래는 중국 요양시(辽阳市)의 구글지도이다.

 

랴오양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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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왕 때 (가짜)동녕부가 있던 곳인 지금의 요양시(辽阳市)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엔 동녕부(요양부근) 남쪽에 우라산성(亐羅山城)이 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요양시(辽阳市)의 남쪽에 있을 우라산성(亐羅山城)의 동쪽 방향에 환인만주족자치현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우라산성(亐羅山城)과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서로 다른 성임을 알 수 있다.

 

구글지도를 보면 대략 요양과 평안북도 의주의 중간 지역에 우라산성(亐羅山城)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위의 조선왕조실록은 고려사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은 문장이 후반부에 등장한다.

'皇城, 古女眞皇帝城也(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라는 문장이다.

 

왜 조선왕조실록에선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은 이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 삽입했을까?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고려사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우라산성(亐羅山城) 동쪽에 황성(皇城)이 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재했는데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의 입장에선 고려가 황성(皇城)이라고 칭한 것은 참람한 행위이다.

 

따라서 고려사에도 없는 문장인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라는 문장을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요양시의 남쪽이고 압록강보다 북쪽에 있는 우라산성(亐羅山城)에서 동쪽에 금나라 황제의 황성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완안부여진이 황제를 칭한 것은 금나라 때이다. 그 이전인 생여진의 완안부 시절엔 완안부 지도자는 요나라의 절도사였다).

 

문장을 보면 요동으로 한정된 곳에 여진의 황성(皇城)이 있었다는 뜻인데 그러면 더욱 그런적은 없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때문에 고려서경(西京)인 황성(皇城)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표현 한 것이라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 세가 현종 2년 8월의 내용이다. (1011년 8월 미상(음))

 

고려시대 사료 DB

世家 卷第四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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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 세가 현종 2년 8월의 내용 원문과 번역이다.

是月, 增修松嶽城, 築西京皇城.
이 달에 송악성(松嶽城)을 더 수리하고, 서경(西京)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즉, 우라산성(亐羅山城) 동쪽에 있는 황성(皇城)은 고려서경(西京)을 뜻한다.

 

또한 우라산성(亐羅山城) 남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고 동쪽엔 황성(皇城)이 있다고 했으니 황성(皇城)이 있는 고려서경(西京)은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있다.

즉, 지금 북한의 평양이 고려서경(西京)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