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발해의 서경, 고려의 서경, 후당의 왕건 책봉(수정된 내용)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발해의 서경, 고려의 서경, 후당의 왕건 책봉(수정된 내용)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7. 29. 13:57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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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西京鴨緑府
新唐書 髙麗故地為西京曰鴨緑府領神桓豐正四州
新唐書 鴨緑朝鮮道也(朝鮮舊訛朝貢今據通考改)
遼史 渌州鴨緑軍本髙麗故國渤海號西京鴨緑府城髙三丈廣輪二十里都督神桓豐正四州事
서경압록부
신당서: (발해는) 옛 고구려 지역을 서경으로 삼고 압록부라 하였으며, 신(神), 환(), 풍(), 정() 네 주를 관할하였다.
신당서: 압록부는 조선도이다. (조선[朝鮮]을 이전에 조공[朝貢]으로 잘못 기록하였으므로 이제 통고[通考]를 근거로 고친다)
요사: 녹주(渌州) 압록군(鴨緑軍)본래 옛 고구려국으로서 발해에서 서경 압록부로 하였다. 성의 높이가 세 길이고 둘레가 20리이며 도독(都督)을 두었고, 신(神), 환(), 풍(),정() 네 주의 일을 관할한다.

해의 5경(五京) 중 하나인 서경압록부(西京鴨緑府)에 대한 내용이다.

발해 자체의 기록은 없지만 송나라 때 저작인 신당서에선 '옛 고구려 지역을 서경으로 삼고 압록부라 하였다(髙麗故地為西京曰鴨緑府)'라고 기재하고 있다.

 

만주원류고에선 '요사'를 인용해서 '본래 옛 고구려국으로서 발해에서 서경 압록부로 하였다(本髙麗故國渤海號西京鴨緑府)'라고 기재한다.

 

마진(摩震) 궁예 대왕은 905년 옛 고구려 평양을 확보한다.

그리고 왕건이 고려태조가 된 원년인 918년엔 평양의 건설을 명한다.

그러다가 발해가 멸망하기 5년 전 921년엔 고려에 서경이 등장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고려에서 평양과는 별개 지역인 서경이 등장한 것은 발해가 멸망하기 5년 전 고려가 발해 서경과 그 주변 발해영토를 고려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마진(摩震)의 궁예 대왕 때 얻은 평양은 옛 고구려의 평양 중 하나였고,

921년에 등장한 고려 서경은 고려태조 왕건이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획득한 후 그 곳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이라고 정하면서 지역명칭도 서경으로 선포한 것이라고 본다. (만일 발해 말기 발해의 서경이 지금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견해처럼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멀지 않은 임강시라고 한다면, 고려는 921년 당시 이 일대와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확보한 후 고려가 독자적으로 임강시가 아닌 그 서쪽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보고 이 지역을 발해의 서경과 차별된 고려의 서경으로 선포했다고 본다)

 

발해 서경(西京)은 '서경압록부(西京鴨緑府)'라는 명칭에서 보듯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압록강(鴨綠江)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학자들은 보고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고려 서경(西京)도 압록강(鴨綠江) 부근에 있었다고 본다.

즉,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고려 평양과 고려 서경이 위치한 곳은 압록강(鴨綠江) 부근인 요동이지 지금의 북한 평양지역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 중엔 서경압록부(西京鴨渌府)로도 기재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발해 말기 거란과 대치할 때라면 발해의 서경은 압록강(鴨綠江, 지금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다) 부근이었다고 보며 따라서 서경압록부(西京鴨緑府)라는 명칭이 맞다고 본다.

하지만 발해의 전성기 때라면 압록강(鴨渌江, 지금의 중국 요하[遼河]로 해석된다)을 지칭하는 서경압록부(西京鴨渌府)가 맞는 명칭이라고 본다.

즉, 발해의 서경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임강시(临江市) 구글지도이다.

 

린장 시 · 중국 지린 성 바이산 시

중국 지린 성 바이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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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학자들 대다수는 이 지역을 발해의 서경압록부로 보고 있다.

 

아래는 환인만주족자치현의 구글지도이다.

 

환런 만족 자치현 ·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www.google.co.kr

나는 이 지역을 고려의 서경으로 본다. 따라서 나는 고려 왕건 때 이 지역을 고려가 확보한 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첫 도읍지를 강조하기 위해 고려 서경을 세웠다고 본다.

그리고 만일 발해의 서경이 이 지역에서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임강시라면 고려 왕건은 그 지역 일대까지 확보한 후 발해 서경과 차별된 주몽의 첫 도읍지가 이 지역임을 선포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궁예(弓裔)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천우 2년 을축(905)〕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分定]. 평양의 성주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황의(黃衣)〔를 입는〕 도적 명귀(明貴)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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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궁예(弓裔)에 대한 내용이다.

分定浿西十三鎮. 平壌城主将軍黔用降, 甑城赤衣·黄衣賊明貴䓁歸服.
〔천우 2년 을축(905)〕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分定]. 평양의 성주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황의(黃衣)〔를 입는〕 도적 명귀(明貴) 등이 귀부하였다.

905년 마진(摩震)의 궁예대왕은 옛 고구려 평양을 확보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선 통일신라의 초기 영토는 서북으로, 지금의 요양보다 위인 철령과 개원 부근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다가 발해가 713년부터 이 지역의 강자가 되면서 통일신라는 압록강(鴨渌江) 아래로 물러났다고 기재하고 있다.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표기가 압록강[鴨渌]인 것을 볼 때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요하[遼河]로 해석된다. 그리고 발해 전성기엔 신라는 발해에 밀려 요동지역을 잃고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발해와 대치하고 있었다 본다.)

 

그리고 다시 통일신라와 발해 말기에 통일신라가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위의 옛 고구려 평양 중 하나인 지역을 다시 확보한 후 발해와 대치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진(摩震)이 옛 고구려 평양이라고 인식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평양의 성주(城主)는 장군검용(将軍黔用)이었다.

 

압록강(鴨綠江) 부근의 평양은 통일신라의 최전방이었고 장군검용(将軍黔用)이 통일신라의 최전방 성주(城主)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군검용(将軍黔用)은 신라와 발해 말기, 즉 양국의 혼란기에 어는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세력인 지역군벌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선 통일신라가 아닌 발해 출신으로 발해에서 이탈한 지역군벌일 수도 있다.

즉, 통일신라의 지역이 아닌 독자세력의 지역일 수도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918년 9월 26일, 양력 918년 11월 2일)

 

고려시대 사료 DB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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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丙申 諭群臣曰,平壤古,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병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堂弟]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다.

의 고려사 태조 원년(918년)의 내용은 고려태조 왕건이 905년 마진(摩震)이 확보한 옛 고구려 평양을 고려의 도시인 평양으로 만들도록 지시하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왕건이 평양의 건설을 명할 때 평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마진(摩震)의 궁예 대왕 때의 묘사와 비슷하게 다른 나라의 번성한 도시를 탈환한 모습으로 보이진 않는다. 황폐함을 묘사한 내용은 지금의 최전방 DMZ를 연상시킨다.

 

태봉에서 고려로 바뀐 시기이고 발해 말기이니 양국이 서로 어수선해서 치안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인(蕃人, 외국인)이 가시덤불 사이에서 사냥하고 변경 고을을 노략질 한다고 태조왕건은 지적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2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919년 10월 미상)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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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2년에 대한 원문과 일부이다.

十月 城平壤.
겨울 10월 평양(平壤)에 성을 쌓았다.

왕건의 평양 건설 지시 일년 후 고려에선 평양에 성을 쌓는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이다.(921년 10월 20일(음) 임신(壬申))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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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4년에 대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壬申 幸西京.
임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건이 평양개척 명령을 내린 지 3년 후 '고려사'에 고려 서경이 등장한다. 발해가 멸망하기 5년 전이다. 발해는 5경(五京) 중 서경압록부(西京鴨緑府)가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볼 때,

고려는 압록강(鴨緑) 부근의 옛 고구려 평양에 성을 쌓아 고려의 평양으로 만든 후 압록강 부근의 고려 평양을 기반으로 압록강 부근에 있는 발해의 서경압록부와 그 주변을 획득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5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922년 미상)

 

고려시대 사료 DB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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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5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왕이〉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의 거주지를 정하였다.
921년 서경(西京)이 고려사 기록에 등장한 다음해 922년 성을 쌓고 고려인들을 서경으로 이주시킨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9년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926년 12월 미상)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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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1 태조 9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冬十二月 癸未 幸西京, 親行齋祭, 巡歷州鎭. 是歲, 遣張彬如唐.
겨울 12월 계미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고 주진(州鎭)을 두루 둘러보았다. 이 해에 장빈(張彬)을 당(唐, 후당)에 파견하였다.

조 왕건이 고려 서경에서 초제(별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한 내용이다.

 

926년이면 발해가 멸망한 해이고 12월이면 발해가 멸망한 후라고 추정된다.

발해 멸망 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이자 발해의 영역이었고 발해의 서경에서 멀지 않던

고려 서경에서 고려태조 왕건이 초제를 지낸 것이니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고려태조 왕건은 장빈이라는 인물을 당나라(후당)로 파견했다.

발해 멸망 후 서둘러 고구려 계승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본다.

 

또한 발해(고려세조 용건의 삼한론을 해석하면 숙신의 지역적 후예인 발해도 삼한에 포함된다)를 포함한 삼한의 통일도 후당(고려는 후당을 당나라의 계승국으로 봤다고 본다)에게 인정받으려 했다고 본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지역을 왕건이 확보했다는 정통성과 멸망한 발해지역이자 발해의 서경압록부와 그 인접지역까지 얻었다는 상징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 16년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933년 3월 5일 신사(辛巳))

 

고려시대 사료 DB

(癸巳)十六年 春三月 辛巳 唐遣王瓊·楊昭業來冊王, 詔曰 “王者法天而育兆庶, 體地而安八紘, 允執大中, 式彰無外. 斗極正而衆星咸拱, 溟渤廣而百谷皆宗. 所以居戴履之倫, 窮照臨之境, 弘道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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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권 제2 태조 16년에 대한 내용 중 일부 원문과 번역이다.

其有地, 稱平壤, 師擅兼材. 統五族之强宗, 控三韓之奧壤, 務權鎭靜, 志奉聲明, 爰協彛章, 是加寵數. 咨! 爾權知高麗國王事建! 身資雄勇, 智達機鈴, 冠邊城以挺生, 負壯圖而閒出. 山河有授, 基址克豊.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그대는 차지한 땅을 평양(平壤)이라 일컬었으며 군사를 장악하고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족(五族)의 강한 우두머리를 통합하고 삼한(三韓)의 비옥한 땅을 지배하여, 〈혼란한 판국을〉 진정시키는 데 힘쓰고 〈상국의〉 성명(聲明)을 받들고자 뜻하였으니 이에 상례[彛章]를 따라 은총의 예를 더한다.
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王建)은 자질이 웅대하고 용맹하며 지혜는 기략[機鈴]에 통달하였고, 변방에서 으뜸으로 빼어나게 태어났고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드러내었다. 산하(山河)가 내려준 바, 터전이 지극히 풍요하다. 주몽(朱蒙)이 건국한 상서로움을 계승하여 저들의 왕이 되고, 기자(箕子)가 번국(蕃國)을 이룬 자취를 밟아서 은혜와 조화를 펼치고 있다.

933년 고려태조 왕건은 후당으로부터 고려국왕으로 책봉을 받는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당에 장빈이라는 인물을 파견한지 7년 만에 왕건은 고려의 국왕으로 후당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위의 내용은 후당의 황제가 왕건에게 고려 국왕으로 인정한 내용이다.

신생국이 아니라 옛 고구려의 계승국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요건을 왕건이 획득했음을 책봉 내용에서 밝힌다.

 

후당의 황제가 고려 왕건에게 고려국왕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보면 후당 황제는 왕건이 확보한 평양(平壤)을 언급한다(其有地, 稱平壤).

 

또한 왕건은 평양(마진과 고려에서 옛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인식하고 정한 곳이다) 이외에 서경(고려 왕건은 고려 서경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던 곳으로 정했다고 본다)까지 얻었으니 고구려 계승국의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踵朱蒙啓土之禎).

 

또한 발해의 5경 중 하나인 서경을 얻었으니 삼한을 장악했다.

후당 황제도 삼한을 지배했다고 인정한다(控三韓之奧壤).

(만일 발해의 서경이 지금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견해처럼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멀지 않은 임강시라고 한다면, 고려는 921년 당시 지금의 임강시인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획득했지만 그 지역이 아닌 임강시 서쪽 환인만주족자치현을 고려의 서경으로 인정한 것이다. 발해와 차별된 주몽의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워 발해와 차별화 한 것이라고 본다)

 

후당에서 고려태조 왕건을 책봉한 문장에 보면,

'주몽이 건국한 상서러움(踵朱蒙啓土之禎)'과 '기자가 번국을 이룬 자취를 밟아서(履箕子作蕃之跡)'가 보인다.(履箕子作蕃之跡의 직역은 '기자가 이룬 번국의 업적에 올랐다'이다)

 

즉, 태조 왕건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태조 왕건이 확보한 고려의 영토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과 기자의 번국인 기자조선을 포함한다고 후당에서 인정했다.(기자조선의 영역을 요동[遼東]으로 정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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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謹按新羅始附庸於百濟後兼加羅任那諸國與百濟為鄰考其疆土東南並有今朝鮮之慶尚江原二道西北直至今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嶺唐顯慶以後又得百濟故地及髙麗南境於是東西增九百里南北増千餘里開元以後渤海盛强其西北諸境盡為所併新羅所有僅鴨渌江以南
唐末髙麗復起割其南境暨渤海為契丹所侵於是新羅西與契丹以海州巖淵縣為界西北與契丹以鴨渌江東八里黄土嶺為界矣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하다가 뒤에 가라와 임나의 여러 나라를 아우르면서 백제와 이웃하게 되었다. 그 강토를 고찰해 보면, 동남쪽은 조선의 경상과 강원 2도를 차지하고, 북서쪽은 곧바로 지금의 길림오랍(吉林烏拉, 길림시)에 이르고, 또 서쪽은 개원과 철령에 가까웠다. 당나라 현경 연간(656~661) 이후 또 엣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얻음으로써, 이때에 동서가 9백 리, 남북이 1천여 리로 늘어났다. 개원 연간(713~741) 이후 또 발해가 강성하면서 신라의 서북쪽 지경을 모두 병합하게 됨에 따라, 신라는 겨우 압록강(鴨渌江, 한자가 지금의 압록강[鴨綠江]과는 다르다. 삼국사기에서 이 압록강[鴨渌江]으로 표기한 경우가 있는 데, 이 압록강[鴨渌江]일 경우는 지금의 요하[遼河]로 해석된다) 이남의 땅만 갖게 되었다.
당나라 말기에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가 다시 일어나면서 그 남쪽 지경을 떼어 가고, 발해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패망하였다. 이때에 신라는 서쪽으로 거란과 해주 암연현을 경계로 하였으며, 서북쪽은 압록강(鴨渌江)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을 경계로 하였다.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거란과 신라의 경계는 압록강[鴨渌江]과 압록강[鴨綠江] 사이에 있는 황토령[黄土嶺]으로 해석된다. 즉, 지금의 요하[遼河]와 압록강[鴨綠江] 사이에 있는 옛 황토령 지역이다)

의 내용은 청나라 황제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만주원류고의 내용이다.

나는 청나라태조 누르하치는 고려 왕건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내용은 역대 중국의 사서를 검토한 청나라 한림원의 학자들이 거란과 통일신라의 경계에 대해 결론을 내린 내용이다.(거란과 통일신라의 경계라고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 시기는 후삼국시대이다. 따라서 이 당시 거란과 경계를 이루는 상대는 궁예대왕의 마진에서 태조왕건의 고려이다.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은 이 당시 양국의 경계를 해석한 거라고 본다)

 

통일신라 말기 서북쪽 영토는 압록강(鴨渌江) 동쪽 8리의 황토령까지라고 한다.

이 문장의 압록강(鴨渌江)은 현재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鴨綠江)과 한자가 다르다.

삼국사기 저자는 압록강(鴨渌江)을 요하(遼河)로 인식했다고 해석된다.

또한 삼국유사 저자는 압록강(鴨渌江)遼水(요수, [遼河] 요하)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압록강(鴨渌江) 동쪽이자 압록강(鴨綠江) 서북쪽에 위치한 황토령을 경계로 황토령 동쪽은 발해와 통일신라(통일신라말기이기 때문에 마진이나 고려로 해석된다)의 영토라고 해석된다.

황토령 동쪽 지역에서 발해와 통일신라(통일신라말기이기 때문에 마진과 고려로 해석된다)가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었다고 본다.(통일신라 말기 요동[遼東]은 거란, 발해, 신라[통일신라말기이기 때문에 마진과 고려로 해석된다]로 삼분[三分]되었다고 본다)

 

신당서와 고려사의 내용을 함께 검토하면,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며 발해말기 발해의 서경으로 추정되는 곳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집안시의 압록강 부근은 고려의 평양이며 그 이전엔 마진의 궁예대왕 때 마진의 영역이 된 지역이었다.

 

만주원류고에서 역대 중국의 사서를 보고 검토한 내용이나 신당서와 고려사 내용을 함께 검토한 내용을 대조해 보면 통일신라말기 통일신라(통일신라로 기재했지만 정확히는 마진과 고려이다)의 영토는 압록강 북쪽 어느 지역까지라는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지금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기재된 북한 평양까지가 통일신라의 영토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