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의 구별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의 구별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8. 6. 21:27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권50 우왕 12년에 대한 내용이다.(1388년 5월 13일(음) 병술(丙戌))

 

고려시대 사료 DB

丙戌 左·右都統使上言, “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近日, 條錄不便事, 狀付都評議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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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권50 우왕 12년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丙戌 左·右都統使上言, “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병술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신들이 뗏목을 띄워(乘桴) 압록강(鴨江)을 건너는데(過), 앞에 큰 내가 있어 비가 와 물이 넘치니 첫 번째 여울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고, 두 번째 여울은 더 깊어서 모래톱(洲) 안에 머물러 주둔하며 헛되이 곡식만 소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요동성(遼東城)까지 그 사이에 큰 내가 여럿 있으니, 빨리 건너는 것이 어려울 듯합니다.

고려 우왕의 명령을 받은 고려군인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에 다시 뗏목을 타고 압강(鴨江)을 건너는 상황을 묘사한 고려사 본문이다.

위의 내용은 고려 우왕의 명령을 받은 고려군인들이 왕명에 반하여 고려를 공격하기 전의 상황이다.

위의 고려사 본문에 보면 아래와 같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들이 뗏목을 띄워(乘桴) 압록강(鴨江)을 건너는데(過),..."

그런데 이 번역도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이다.

고려사 원문은 아래와 같다.

"臣等乘桴, 鴨江............"

이 원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려사 원문에는 압강(鴨江)이라고 기재되어 있지 압록강(鴨綠江)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는 않았다.

또한 고려사 원문에는 고려군인들이 뗏목(桴)에 탑승(乘)해서 압강(鴨江)을 지나갔다고 기재했지(乘桴, 過鴨江),

고려군인들이 부교(浮橋, 임시다리) 위를 걸어서 압강(鴨江)을 건너갔다고 기재하진 않았다.

그리고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서로 다른 강이며,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 보인다고 이미 이전에 내가 올려드린 글에서 말씀드렸었다.

따라서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이 서로 합류하는 지점부근에 어떤 지역이 있을 경우엔,

그 지역은 압강(鴨江)부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압록강(鴨綠江)부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계속 갈라져서 확연히 서로 다른 강이 된다.

따라서 압강(鴨江)부근과 압록강(鴨綠江)부근은 다른 위치가 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이튿날 〈왕이〉 최영(崔瑩)의 집에 가서 말을 하사하니 최영이 안마(鞍馬)와 의대(衣襨)를 바쳤고, 그의 딸을 봉하여 영비(寧妃)로 삼았다. 신우(辛禑)가 일찍이 최영의 정직함을 꺼려 그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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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
신우(고려 우왕)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

고려 우왕이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명령한 내용이다.

원문과 번역 모두 鴨綠江(압록강)으로 기재하고 번역했다.

부교(浮橋)는 배나 뗏목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연결한 임시 다리이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한자사전의 부교(浮橋) 설명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hanja.dict.naver.com

래는 위의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한자사전의 부교(浮橋) 설명이다.

배나 뗏목들을 여러 개 잇대어 잡아매고 널빤지를 깔아서 만들거나, 교각이 없이 임시(臨時)로 강 위로 놓은 다리. 교각을 세우지 아니하고 널조각을 걸쳐 놓은 나무다리.

위의 내용에서 보듯,

고려군인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갈 땐 뗏목이 아닌 부교(浮橋)를 이용하면 되었다.

따라서 뗏목(桴)에 승선(乘)해 압강(鴨江)을 건너는 상황과 다르다.

위의 '고려사 열전 50 우왕 12년'의 내용과 '고려사 열전 최영'에 기재된 내용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묘사된다.

고려군인들은 압록강(鴨綠江) 위에 설치된 부교(浮橋, 배나 뗏목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임시 다리)를 건너간(渡) 이후,

압강(鴨江)을 지나가게(過) 되는 데 압강(鴨江)에선 뗏목(桴)을 탔다(乘).

그런데 압강(鴨江) 제1여울(灘 탄), 제2여울(灘 탄) 등 깊이가 얕고 물쌀이 빠른 여울(灘 탄)들이 있어서 고려군인들이 물에 빠진 자가 수백 명이었다.

물살이 빠른 여울(灘 탄)에서 고려군인들이 물에 빠졌다는 것은,

뗏목(桴)을 타고(乘) 지나갈(過) 때 벌어지는 상황이지 부교(浮橋)의 위를 지나갈 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다.

아래는 다음 한자사전에 기재된 한자 灘[탄]에 대한 설명이다.

 

灘 – 다음 한자사전 (Daum 漢韓辭典)

1.여울 2.해

dic.daum.net

래는 위의 다음 한자사전에 기재된 한자 灘[탄]에 대한 설명 내용이다.

여울. 물이 얕고 빠르며 돌이 많아 배가 다니기에 위험한 곳.

결국, 위의 '고려사 열전 권50 우왕 12년'과 '고려사 열전 최영'에 기재된 내용을 종합해서 보면,

고려군인들은 부교(浮橋)를 이용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었고(渡),

고려군인들은 뗏목(桴)을 타고(乘) 압강(鴨江)을 지났었다(過).

즉, 고려사의 내용을 보면,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분명 다르게 기술하고 묘사하고 있는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똑같이 압록강이라고 한글번역을 하고 있다.

또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북쪽에 압강(鴨江)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五月, 大軍渡鴨綠江, 次威化島, 亡卒絡繹於道。 禑命所在斬之, 不能止。 左、右軍都統使上言: "臣等乘桴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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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의 원문과 번역이다.

五月, 大軍鴨綠江, 次威化島, 亡卒絡繹於道。 禑命所在斬之, 不能止。 左、右軍都統使上言:
"臣等乘桴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近日條錄不便事狀以聞, 未蒙兪允, 誠惶誠懼。 然當大事, 有可言者而不言, 是不忠也。 安敢避鈇鉞而默默乎?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玄陵於洪武二年, 服事大明, 其表云: ‘子孫萬世, 永爲臣妾。’ 其誠至矣。 殿下繼志, 歲貢之物, 一依詔旨, 於是特降誥命, 賜玄陵之諡, 冊殿下之爵。 此宗社之福, 而殿下之盛德也。 今聞劉指揮領兵立衛之言, 使密直提學朴宜中奉表計稟, 策甚善也。 今不俟命, 遽犯大邦, 非宗社生民之福也。 況今暑雨, 弓解甲重, 士馬俱憊, 驅而赴之堅城之下, 戰不可必勝, 攻不可必取? 當此之時, 糧餉不給, 進退維谷, 將何以處之? 伏惟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禑與瑩不聽, 遣宦者金完, 督令進兵。 左右軍都統使留完不遣, 又遣人詣瑩, 請速許班師, 瑩不以爲意。 軍中訛言: "太祖率麾下親兵, 向東北面, 已上馬矣," 軍中洶洶。 敏修罔知所措, 單騎馳詣太祖, 涕泣曰: "公去矣, 吾儕安往?" 太祖曰: "予何去矣? 公勿如是。" 太祖乃諭諸將曰: "若犯上國之境, 獲罪天子, 宗社生民之禍, 立至矣。 予以順逆上書, 請還師, 王亦不省, 瑩又老耄不聽。 盍與卿等見王, 親陳禍福, 除君側之惡, 以安生靈乎?" 諸將皆曰: "吾東方社稷安危, 在公一身, 敢不唯命是從!"
於是回軍到鴨綠江, 乘白馬御彤弓白羽箭, 立岸上遲軍畢渡。 軍中望見相謂曰: "自古以來, 未有如此人, 自今以後, 豈復有如此人?" 時霖潦數日, 水不漲, 師旣渡, 大水驟至, 全島墊溺, 人皆神之。
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渡)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우왕이 소재(所在)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鴨江)을 건넜으나(過),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事狀]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어찌 감히 죽음[鈇鉞]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 지금 유 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군중(軍中)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민수(敏修)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하였다. 태조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생민(生民)의 재화(災禍)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禍)되고 복(福)되는 일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到) 흰 말을 타고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軍中)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하였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위의 내용은 고려사가 아닌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다.

고려사에 기재된 내용들을 다시 종합해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된 각각의 고려사 내용을 종합해 조선왕조실록에서 기술한 내용이기 때문에,

압록강(鴨綠江) 압강(鴨江) 한 단원에서 함께 등장한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보면,

첫 번째 문장에선 압록강(鴨綠江)으로 기재했고 두 번째 문장에선 압강(鴨江)으로 기재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은,

별개의 강으로 인식했고 서로 구별해서 기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 원문에 반하여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두 문장 모두를 압록강으로 번역한 것은 원문과 일치하지 않은 번역이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통설처럼 위화도가 압록강 중간에 있는 섬이라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즉, 우리나라 한강 중간에 있는 선유도, 밤섬, 노들섬과 같은 섬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에선 고려군인들이 압록강(鴨綠江)을 완전히 건너간(渡) 후,

뗏목(桴)에 탑승해(乘) 압강(鴨江)을 지나 주(모래와 흙의 퇴적층)에서 둔(屯)을 친 것으로 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留屯洲中).

아래는 다음중국어사전에 기재된 洲[zhōu]에 대한 설명이다.

 

洲 – 다음 중국어사전 (Daum 汉语词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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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다음중국어사전에 기재된 洲[zhōu]에 대한 설명이다.

주. [흙이나 모래가 수중에 퇴적하여 수면에 나타난 땅]

위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보면 위화도는 洲(주)에 해당되는 강이나 하천 옆의 백사장과 같은 땅인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원문과 번역을 보면,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到)'로 번역했다.

이 번역의 원문은 '於是回軍到鴨綠江'이다.

위 기록의 내용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 압강(鴨江)을 지나 압강(鴨江)주변의 백사장()에서 둔을 치고 있다가(留屯),

말머리를 돌려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돌아오는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묘사할 때,

'於是回軍到鴨綠江(어시회군도압록강)'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회군(回軍)을 해서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했다(到)'고 기재하고 있다(回軍到鴨綠江).

아래는 다음 중국어사전에 기재된 到[dào]에 대한 설명이다.

 

到 – 다음 중국어사전 (Daum 汉语词典)

1.도착하다 2.…에 3.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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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다음 중국어사전에 기재된 到[dào]에 대한 설명 내용이다.

도착하다. 도달하다. …에 이르다[미치다]. (시간·기간·날짜가) 되다.

즉, '回軍到鴨綠江'이란,

'회군하면서 오다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다'내지는 '회군하면서 오다가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결국, 압록강(鴨綠江) 중간에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위화도라는 주(洲, 백사장과 같은 퇴적층이 쌓인 땅)가 있다는 문장은 아니다.

또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뗏목을 이용해 압강(鴨江)을 지나다가 압강(鴨江)주변의 주(洲, 백사장과 같은 퇴적층이 쌓인 땅)에서 둔(屯)을 친 후,

다시 고려를 공격하려고 돌아오다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기 때문에,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도 아니며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에 위치한 강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라고 본다.

아래는 지금의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라는 섬의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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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기재된 압록강(鴨綠江)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라는 섬은 위화도로 추정되는 곳이지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위화도는 아니라고 본다.

고려사 열전 우왕 12년과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압강(鴨江)을 지나 압강(鴨江)주변의 백사장(洲)에 고려부대가 둔(屯)을 친 것으로 기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압강(鴨江)은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義州) 위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며 요동(遼東)지역인 북쪽으로 이어지는 강(江)이라고 본다.

즉,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은 서로 별개의 강(江)이고 고려부대가 둔(屯)을 친 백사장(洲)은 압록강(鴨綠江)이 아닌 압강(鴨江)주변에 있었다고 본다.

현재 Aihe River(璦河 애하), Hunjiang(渾江 혼강), Pushi River(蒲石河 포석하)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서 요동(遼東)지역인 북쪽으로 흐르는 형태의 강(江)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사 구절을 검토해 볼 때,

압록강(鴨綠江)의 북쪽 지류인 지금의 Aihe River(璦河 애하)가 고려 때의 압강(鴨江)이며 Aihe River(璦河)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려부대가 주둔했었던 주(洲)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