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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 가짜 동녕부, 기사인테무르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동녕부, 가짜 동녕부, 기사인테무르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8. 21. 15:48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2 세가 공민왕 19년 1월의 내용이다.(1370년 1월 4일(음) 갑오(甲午))

 

고려시대 사료 DB

我太祖以騎兵五千, 步兵一萬, 自東北面, 踰黃草嶺, 行六百餘里, 至雪寒嶺, 又行七百餘里, 甲辰, 渡鴨綠江. 是夕西北方, 紫氣漫空, 影皆南. 書雲觀言, 猛將之氣, 王喜曰, “予遣李【太祖舊諱】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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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2 세가 공민왕 19년 1월의 내용 원문과 번역이다.

太祖以騎兵五千, 步兵一萬, 自東北面, 踰黃草嶺, 行六百餘里, 至雪寒嶺, 又行七百餘里, 甲辰, 渡鴨綠江. 是夕西北方, 紫氣漫空, 影皆南. 書雲觀言, 猛將之氣, 王喜曰, “予遣李【太祖舊諱】必其應也.”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 서북방 쪽에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가득 찼는데, 그 빛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르기를, “맹장(猛將)의 기운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시 거기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음력 1370년 1월 4일의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선 공민왕의 요동정벌로 묘사하는 내용이다. 이 고려사 내용은 후에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기재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2 세가 공민왕 19년 1월의 내용이다. (1370년 1월 미상(음))

 

고려시대 사료 DB

時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兒, 聞太祖來. 移保亏羅山城, 欲據險以拒, 太祖至也頓村, 吾魯帖木兒來挑戰, 俄而棄甲再拜曰, “吾先本高麗人, 願爲臣僕, 率三百餘戶降. 吾魯帖木兒, 後改名原景. 其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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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 42 세가 공민왕 19년 1월의 내용 원문과 번역이다.

時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兒, 聞太祖來. 移保亏羅山城, 欲據險以拒, 太祖至也頓村, 吾魯帖木兒來挑戰, 俄而棄甲再拜曰, “吾先本高麗人, 願爲臣僕, 率三百餘戶降. 吾魯帖木兒, 後改名原景. 其酋高安慰帥麾下, 嬰城拒守, 我師圍之. 太祖適不御弓矢, 取從者之弓, 用片箭射之, 凡七十餘發, 皆正中其面. 城中奪氣, 安慰棄妻孥, 縋城夜遁. 明日頭目二十餘人率其衆出降, 諸城望風皆降, 得戶凡萬餘. 以所獲牛二千餘頭, 馬數百餘匹, 悉還其主, 北人大悅, 歸者如市. 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于海, 南至鴨綠, 爲之一空.
당시 동녕부(東寧府)의 동지(同知)인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 이오로테무르)는 태조(太祖, 이성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이동해 주둔하여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항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하였으나, 조금 뒤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저의 선조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고려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 300여 호(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오로첩목아는 뒤에 이원경(李原景)으로 개명하였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농성하며 항거하였으므로 우리 군대가 이를 포위하였다. 태조가 마침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종자(從者)의 활을 취하여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쏘니, 무릇 70여 발이 모두 적들의 얼굴에 명중하였다. 성 안의 기세가 꺾이자 고안위가 처자식을 버리고 밤에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 도망갔다. 다음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모두 10,000여 호(戶)를 얻게 되었다. 노획한 소 2,000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귀순하는 자들로 저자거리와 같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시 위의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음력 1370년 1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요동정벌을 정확히 표현하면 요동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하기 위해 고려공민왕이 이성계에게 출전을 명한 내용이다.

 

동녕부란 고려 서경을 최탄(崔坦)이 원나라에게 넘긴 후 고려 서경이 원나라의 행정구역이 되면서 원나라가 정한 행정구역명칭이었다.

 

그러다가 1275년 동녕부는 동녕로로 원나라에서 이름을 바꾸었고 1290년 충렬왕 때는 다시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고려사에 보면 1370년 공민왕은 동녕로가 아닌, 옛 명칭인 동녕부를 공격하라며 이성계를 보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중국의 유기백과와 백도백과에선 의문을 제기한다.

 

원사를 보면, 고려서경을 원나라가 동녕부로 만든 후 1275년 동녕로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내용이 있지만, 그 동녕로를 다시 고려에 돌려주었다는 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동녕부가 폐지되었고 고려로 반환되었다는 것은 고려사에만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선 1370년에 동녕로가 아닌 옛 명칭인 동녕부를 공격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이미 고려가 반환 받았으면 동녕부는 고려 서경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려 서경을 공격한다는 것도 이상하며, 고려사를 볼 때 이때 고려에서 공격한 동녕부는 고려 서경이 아닌 요양부근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즉, 중국측 시각에선 동녕로로 명칭이 1275년에 바뀌었고 고려사에 기재된 것처럼 동녕로를 고려에 1290년 반환했다면 이후 동녕로라는 명칭은 사라졌어야 하는데,

고려사에선 동녕로가 아닌 동녕부라는 옛 명칭으로 80년 후인 1370년 기사에 다시 등장한 것이고 위치도 고려 서경이 아닌 요양 부근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선 1370년 기록에 다시 등장한 동녕부는 원나라가 다른 지역에 다시 동녕부를 설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북한 평양에 있던 서경을 원나라가 동녕부로 만든 후 1290년 충렬왕 때 고려에게 반환을 했는데 이후 공민왕 시기에 원나라는 요동지역에 동녕부를 다시 만들었다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해석한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1370년 고려 공민왕이 공격을 명한 동녕부는 원나라의 정식적인 동녕부가 아니라고 본다. 이미 1290년 원나라 동녕로는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1370년 고려공민왕이 공격을 명한 동녕부는 원나라 기황후의 일족인 기사인테무르가 이미 없어진 동녕로를 옛 명칭인 동녕부라는 이름으로 요양(遼陽)부근에 만든 모칭(冒稱)부서 아닐까 생각된다.

 

삼국사기와 제왕운기를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은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에선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거란 동경의 서쪽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거란 동경 서쪽의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는 주몽이 졸본부여를 세우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고구려현으로서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고구려)와는 별개의 집단이다.

 

우리나라학자들 중에 현도군에서 소속된 고구려현을 원고구려(元高句驪or 고고구려[故高句驪])로 칭하기 한다.

김부식은 주몽이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졸본부여를 세웠다고 본 것이다. 즉, 김부식의 주장에 의하면 주몽은 한사군 지역인 현도군 고구려현에 고구려(졸본부여)를 세운 것이 된다.

 

하지만 현재 남북한과 중국의 통설은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고 본다.

고려 역시 압록강(鴨綠江) 부근인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인식해서 서경이란 명칭으로 정했다고 내 개인적으론 보고 있다.

 

결국, 당시 요양(遼陽)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기사인테무르가 요양(遼陽) 부근에 가짜 동녕부를 만든 후,

이 곳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라며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흔들고 이곳 동녕부를 장악한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고려와 공민왕을 압박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공민왕은 기사인테무르를 처단하기 위해 이성계에게 모칭(冒稱)부서인 동녕부를 공격하도록 지시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42 세가 공민왕(恭愍王) 19년 12월의 내용이다. (1370년 12월 2일(음) 정사(丁巳))

 

고려시대 사료 DB

丁巳 都評議使司移咨東寧府曰, “奇賽因帖木兒, 自伊父謀亂伏誅之後, 挾讎懷怨, 常畜異謀. 近因車駕北遷, 不肯扈從, 竄身東寧·遼陽等處, 結構分省分院官, 志在假威. 大行訃音, 亦不通報, 專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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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42 세가 공민왕(恭愍王) 19년 12월의 내용 원문과 번역이다.

丁巳 都評議使司移咨東寧府曰,
“奇賽因帖木兒, 自伊父謀亂伏誅之後, 挾讎懷怨, 常畜異謀. 近因車駕北遷, 不肯扈從, 竄身東寧·遼陽等處, 結構分省分院官, 志在假威. 大行訃音, 亦不通報, 專逞己私, 肯恤公義?
又慮遼·瀋, 元係本國舊界, 事大以來, 結親甥舅, 任爲行省管轄, 賽因帖木兒占作巢穴, 上不爲朝廷効忠, 下則爲本國生事, 以此去歲遣軍追襲, 緣彼姦回, 累及良善, 尙不悛過, 復圖前計. 玆復調兵問罪, 彼乃稔惡, 捍拒力戰, 勢難中止, 遂進攻破, 本人逃去, 未卽捕獲. 本人旣是忘本, 好生釁端, 省院官吏, 他日恐爲所誤. 除惡務本, 兵非得已, 前日之事, 唯爲賽因帖木兒一人而已. 蒙古漢人, 並無干涉, 本人如或透漏在彼, 卽便捕送.”
정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동녕부(東寧府)에 자문(咨文)을 보내 말하기를,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는 자기 아버지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당한 뒤부터 복수심과 깊은 원한을 가지고 항상 반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황제가 북쪽으로 옮겨갔는데도 호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동녕부와 요양(遼陽) 등지에 몸을 숨기고 분성(分省)과 분원(分院)의 관리들과 결탁하였는데, 그 뜻은 〈원의〉 위세를 빌리려는 데 있습니다. 〈원 황제가〉 돌아가셨는데도 통보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만족시켰으니, 공의(公義)를 옳게 여긴 것입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요심(遼瀋) 지역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국경 경계 지역인데, 사대를 한 이래로 인척관계를 맺고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어 행성(行省)이 관할하도록 맡겼는데, 기새인첩목아가 차지하여 소굴로 삼고는 위로는 조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아래로는 우리나라에 사단을 낳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하여 쫓아가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교함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고, 도리어 그는 고치지 않으면서 다시 전과 같은 계획을 꾸몄습니다. 이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죄를 묻고자 하였는데, 그놈이 악(惡)에 빠져 있어 항거하며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그 형세가 중지하기 곤란하였기에 드디어 나아가 공격하여 파괴하였으며, 본인은 도주하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본인이 이미 이와 같이 근본을 잊고 싸움의 원인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니, 성(省)과 원(院)의 관리들이 뒷날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악을 제거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근본에 힘써야 하므로 군대 파견은 불가피하며, 전날의 일은 오직 기새인첩목아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것일 뿐입니다. 몽고와 한인(漢人)들은 모두 관련이 없는 일이며, 그가 만약 혹시 몰래 도망쳐 그곳에 있다면 즉시 체포해서 보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의 고려사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竄身東寧·遼陽等處, 結構分省分院官, 志在假威(찬신 동녕요양 등처, 결구 분성 분원관, 지 재가위)

 

위의 고려사 문장을 직역하면 "(기사인테무르가) 동녕과 요양(遼陽) 등지에서 몸을 숨기며 분성과 분원의 관리와 결탁을 해서 가짜 위세를 존재하게 지향했다"로 번역된다.

 

아래는 네이버한자사전에 기재된 分省(분성)에 대한 설명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hanja.dict.naver.com

래는 네이버한자사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1. 원(元)나라가 중국을 점령하고 요동 지방에 분설하였던 여러 관아를 이르는 말.'

즉, 분성은 원나라의 지방 관아인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전후 내용을 봤을 때,

기황후의 일족인 기사인테무르가 거짓을 바탕으로 원나라 지방관리들과 결탁해서 가짜위세를 만들었다고 해석된다.

 

내가 위에서 내 개인적인 견해라고 말씀드렸던,

'기사인테무르가 모칭(冒稱)부서로서의 동녕부를 만들어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과 뉘앙스가 같은 문장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위의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요심(遼瀋) 지역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국경 경계 지역인데, 사대를 한 이래로 인척관계를 맺고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어 행성(行省)이 관할하도록 맡겼는데, 기새인첩목아가 차지하여 소굴로 삼고는 위로는 조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아래로는 우리나라에 사단을 낳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하여 쫓아가 공격하게 하였습니다(遼·瀋, 元係本國舊界, 事大以來, 結親甥舅, 任爲行省管轄, 賽因帖木兒占作巢穴, 上不爲朝廷効忠, 下則爲本國生事, 以此去歲遣軍追襲).'

 

위의 내용을 보면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지역을 기사인테무르가 차지하여 자신의 소굴로 삼고 고려에 사단을 낳고 있다'고 기재한 후 '이 때문에 군대를 파견하여 쫓아가 공격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 고려사 본문을 보면 기사인테무르의 동녕부는 바로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부근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42 세가 공민왕(恭愍王) 19년 12월의 내용이다. (1370년 12월 2일(음) 정사(丁巳))

 

고려시대 사료 DB

丁巳 都評議使司移咨東寧府曰, “奇賽因帖木兒, 自伊父謀亂伏誅之後, 挾讎懷怨, 常畜異謀. 近因車駕北遷, 不肯扈從, 竄身東寧·遼陽等處, 結構分省分院官, 志在假威. 大行訃音, 亦不通報, 專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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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42 세가 공민왕(恭愍王) 19년 12월의 내용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令江界萬戶府, 牓諭遼·瀋人曰, “遼陽元是國界, 大軍又出, 恐害及良善. 其願渡江爲民者, 官給粮種, 各令安業.”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에 명령하여 요심(遼瀋) 지역의 사람들에게 방을 붙여 타이르게 하였는데, 그 방에 이르기를, “요양(遼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국경이고, 대군이 또한 출동하였으니 선량한 사람들까지 피해가 갈까 두렵다. 압록강(원문과 다른 번역이다. 원문엔 압록강이라는 문장이 없다)을 건너와 우리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여 각기 생업이 안정될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의 고려사엔 아래와 같은 문장과 번역이 등장한다.

'遼陽元是國界, 大軍又出, 恐害及良善(요양[遼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국경이고, 대군이 또한 출동하였으니 선량한 사람들까지 피해가 갈까 두렵다).'

 

이 문장을 보면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으로 포괄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요양(遼陽)을 목표로 고려의 군대가 출동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기사인테무르의 동녕부는 원래 동녕부가 있었던 고려서경(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된다)이 아닌 요양(遼陽)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고려사엔 아래와 같은 문장도 등장한다.

其願渡江爲民者(기원도강위민자)

 

위의 문장을 직역하면 "만약에 강을 건너 고려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으로 번역된다. 이 문장에 압록강(鴨綠江)이라고 기재된 내용은 없다.

 

고려사를 읽어보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와 고려가 서로 경계를 이루는 국경은 압강(鴨江)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 보다 북쪽에 위치한 강으로서 압강(鴨江)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 일정구간에선 서로 겹친다. 하지만 압강(鴨江)이 압록강(鴨綠江)은 아니다.

 

결국 위의 문장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과 일치하지 않은 번역을 한 것이고

고려사를 해석해보아도 이 문장에서 가리키는 강이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해석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