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소호연
- 마영도
- 장권당랑권
- 유운초
- 미종권
- 중앙국술관
- 정무체육회
- 마스다 류지
- 이서문
- 연청권
- 대한쿵후협회
- 나광옥
- 루치아노 파바로티
- 벽괘장
- 칠성당랑권
- 태극당랑권
- 마태복음
- 팔괘장
- 사권
- 담퇴
- 누가복음
- 카를로 베르곤치
- 알프레도 크라우스
- 북소림권
- 당수도
- 이소룡
- 팔극권
- 곽전각
- 황위철
- 쥬세페 디 스테파노
- Today
- Total
濟世安民 bagtur khan
매사냥, 요나라, 금나라, 오국부 2 본문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 중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既而五國蒲聶部節度使拔乙門畔遼,鷹路不通。遼人將討之,先遣同幹來諭旨。景祖曰:「可以計取。若用兵,彼將走保險阻,非歲月可平也。」遼人從之。蓋景祖終畏遼兵之入其境也,故自以為功。於是景祖陽與拔乙門為好,而以妻子為質,襲而擒之,獻於遼主。遼主召見于寢殿,燕賜加等,以為生女直部族節度使。遼人呼節度使為太師,金人稱「都太師」者自此始。遼主將刻印與之。景祖不肯繫遼籍,辭曰:「請俟他日。」遼主終欲與之,遣使來。景祖詭使部人揚言曰:「主公若受印繫籍,部人必殺之。」用是以拒之,遼使乃還。既為節度使,有官屬,紀綱漸立矣。 |
그런 다음 오국부의 하나인 포섭부 절도사 발을문이 요나라에 배반해 응로를 불통시켰다. (포섭부의 절도사 발을문이 요나라를 배반한 후 요나라에 응[매처럼 보이는 수리]을 조공하는 조공길을 막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요나라 장수가 제압하기 위해 먼저 유지(요나라 황제의 지침)와 함께 동간을 보냈다. 경조(완안부 여진의 지도자인 완안오고내)가 "만약 요나라 군대를 사용하면 반란군 장수가 지세의 험함을 이용하여 도주할 것이니 세월이 지나도 평정할 수 없음은 능히 계산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요나라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랐다. 경조는 요나라 병사들이 그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웠기 때문이며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경조(완안오고내)는 외형상 발을문과 좋은 사이가 되어 처자를 인질로 하여 습격해 생포하고는 요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요나라 황제가 침전에서 소견하고 연회를 베풀고 등급을 가해 생여진(요나라의 간접지배를 받는 여진부족들을 가리킨다)의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요나라 사람은 태사(太師)를 절도사(節度使)라 칭했으며 이를 시점으로 금나라 사람은 도태사(都太師)로 칭했다. 요나라 황제가 장차 인을 함께 새기려 하였다. (요나라에서 완안부의 부족장인 완안오고내에게 공식적으로 관직을 주어서 요나라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경조는 요나라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후에 적당한 시기가 되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요나라 황제는 마침내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고 사신을 보냈다. 경조는 사신을 속여 부족민이 "주공(주군)이 인(요나라 절도사의 자격)을 받아들이면 그에 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족 사람들이 죽일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고 그는 거절했으며 요나라 사신은 돌아갔다. (완안오고내는 요나라의 절도사 관직을 받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어 사양하려고 했고, 그의 부하가 눈치를 채곤 "절도사 관직을 수락하는 순간 부족장인 완안오고내는 부족민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고 외쳤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결국 이를 명분으로 자신이 피치못하게 절도사 관직을 받을 수 없다며 요나라 관리를 속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절도사로 인해 관직이 생겼고 기강이 점차 세워졌다. (완안부 여진에 절도사라는 관직이 들어서면서 그에 파생되어 다른 관직들이 생겼고 부족의 기강도 세워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
아래는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이자 후에 금나라에 의해 경조로 추존된 완안오고내(完顏烏古廼)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이다.
완안오고내가 활동한 연대가 1021년에서 1074년으로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 기재된 요나라의 행정구역인 장춘주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내용 중 일부이다. 그대로 올린다.
遼聖宗重熙八年(1039年),設置長春州,建韶陽軍。簡稱春州,
治所在長春縣(今吉林省乾安縣北)
|
장춘주는 요나라 성종 8년(1039년)에 설치한 요나라 행정구역이며,
장춘주를 통치하는 중심부는 장춘현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길림성 건안현 북쪽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인 오고내가 태어난지 18년 후에 요나라에서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019년도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면 이 지역이 요나라 영토로 확정된 것은 1019년도 쯤일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는 거란에서 설치한 장춘주의 중심지 장춘현이 있었던 길림성 건안현을 표시한 구글지도이다.
위의 오국부 중에 포섭부가 배반을 한 것은 완안여진의 오고내(烏古廼)가 생존하던 시기이다.
완안오고내는 1021년에서 1074년까지 활동한 인물이며 요나라에서 장춘주를 설치한 것은 1039년 이후이다.
지도를 보면 요나라 장춘주가 지금의 중국 길림성 건안현이고 그 동쪽엔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의 구글지도이다.
위의 두 지도에 나타난 요나라의 영토인 길림성 건안현과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의 위치를 대조해 보면,
길림성 건안현의 동쪽에 송원시 그리고 송원시 동쪽에 하얼빈시 아청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금사 내용을 보면 요나라 군대가 포섭부의 배반을 제압하러 갈 때에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인 완안오고내가 요나라 군대에게 조언하는 모습이 보인다.
완안부 여진의 하얼빈시 아청구가 길림성 건안현의 동쪽으로서 멀지가 않았고, 완안부 여진은 요나라의 직접지배를 받던 숙여진이 아닌 생여진이지만, 완안부 여진은 생존의 차원에서 요나라에 굴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 동쪽엔 다섯 개 부족국가 연맹체인 오국부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요나라와 가까운 완안부 여진이 요나라에 협조하며 오국부 출신들이 요나라에게 반항하거나 배반할 때엔 완안부 여진은 요나라를 돕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보아도 완안부 여진과 오국부는 별개의 세력이었고 이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고 본다.
또한 완안부 여진의 금나라는 오국부의 수도인 오국성(월리길, 철륵의 거주지)을 병합한 역사가 있었고,
그 반대로 오국성의 후예가 주 구성원인 만주국이 청나라가 된 후엔 여진이라는 명칭은 금지어가 되었으며 이후 청나라에서 여진이라는 명칭은 '노예' 내지는 '종속민'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즉, 여진과 오국성을 포함한 오국부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국부의 후예인 알타리와 후르카, 오랑캐를 여진족으로 칭하면서 여진족의 한 부류라고 보는 것은,
이후 만주국의 주 구성원인 알타리와 후르카가 왜 '여진'이라는 명칭을 '노예'나 '종속민'이라는 뜻으로 비하하면서 사용했었는지 설명하질 못하는 원인이 된다.
아래는 오국부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오국부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내용 중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盆奴裏:今黑龍江省湯原縣西南固木納古城。金改蒲聶部(포섭부),元置桃温軍民萬户府。 |
오국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부족국가 중 분노리(盆奴裏)에 대한 설명이다.
요나라 때의 명칭은 분노리(盆奴裏)였지만 금나라 때 포섭부(蒲聶部)로 개칭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금사는 아직 금나라가 세워지기 전의 일을 기록한 거니 당시의 명칭대로 분노리(盆奴裏)라고 기재해야 하겠지만, 금사에선 용어를 소급해서 금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의 사건도 분노리(盆奴裏)라고 기재하지 않고 포섭부(蒲聶部)로 기재한 거라 본다.
아래는 금나라 때 포섭부였던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현의 구글지도이다.
포섭부가 위치한 탕원현은 하얼빈시 아청이나 의란보다도 더 동쪽인데 이 탕원현 지역에 鷹(응, 매처럼 생긴 수리)을 조공하던 길이 있었다면,
鷹(응, 매처럼 생긴 수리)은 이 지역보다도 더 동쪽 지역에서 포획해서 포섭부 영역을 지나 서쪽의 하얼빈시 의란현과 아청구를 지난 후 더 서쪽인 요나라 지역으로 가지고 갔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太祖〉二年甲午六月, 太祖至江西, 遼使使來致襲節度之命. 初, 遼每歲遣使市名鷹海東靑于海上, 道出境內, 使者貪縱, 徵索無藝, 公私厭苦之. … 至是, 復遣宗室習古迺·完顔銀朮可往索阿疏. 習古迺等還, 具言遼主驕肆廢弛之狀. 於是召官僚耆舊, 以伐遼告之, 使備衝要, 建城堡, 修戎器, 以聽後命. … |
〈태조(太祖)〉 2년(1114) 갑오 6월에 태조가 강서(江西)에 이르자 요(遼)가 사신을 시켜 절도사(節度使)를 계승하라는 명을 보내왔다. 처음에 요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바다 위에서 유명한 매 해동청(海東靑)을 샀는데, 가는 길에 영내를 벗어나면 사신들이 마구 탐욕스러워져서 긁어모으는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공사간(公私間)에 〈사람들이〉 괴로워하였다. … 이때에 다시 종실 습고내(習古迺)와 완안은출가(完顔銀朮可)를 보내어 아소(阿疏)에게 가서 징색(徵索)하게 하였다. 습고내 등이 돌아와서 요 임금이 교만방자하며 경계가 느슨한 모습을 두루 말하였다. 이에 관료와 옛 원로[耆舊]들을 소집하여 요를 정벌한다고 알리고, 요충지를 방비하고 성보(城堡)를 세우며, 무기를 수리하여 뒤에 있을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 |
위의 내용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본격적이 충돌이 시작되는 내용이다.
요나라 사신이 바닷가 지역으로 가서 응(鷹)과 해동청(海東靑)을 구입하곤 했는데,
응(鷹)과 해동청(海東靑)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경로를 벗어나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약탈을 했었고 이에 완안부 여진이 요나라에 반기를 들어 요나라를 공격하는 내용이다.
위의 금사 본문을 보면 '鷹海東靑'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해동청(海東靑)이 응(鷹)이라는 뜻인지 응(鷹)과 해동청(海東靑) 두 종류의 새를 기재한 것인지내가 한문실력이 모자라서 정확한 해석을 못 하겠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선 해동청(海東靑)이 응(鷹)인 것처럼 '매 해동청'으로 번역했지만,
해동청(海東靑)은 골(鶻)의 일종인 맹금류로서 응(鷹) 외에 골(鶻)의 일종인 해동청(海東靑)도 구입한 거라고 해석된다.
그 이유는 골(鶻)은 바닷가 절벽 위에 둥지를 튼다고 하기 때문이다.
응(鷹)만 구입한다면 바닷가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바다는 아마도 지금의 타타르 해협이거나 고려와 가까운 바다였을 것으로 보이며,
위의 포섭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요나라 사신은 배를 타고 송화강과 흑룡강을 이용해 타타르 해협이나 우수리강을 이용해 고려 부근까지 가서 해동청을 구입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는 타타르 해협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天會二年五月乙巳〉 曷懶路軍帥完顔忽剌古等言, “往者歲捕海狗·海東靑·鴉·鶻於高麗之境, 近以二舟往, 彼乃以戰艦十四要而擊之, 盡殺二舟之人, 奪其兵仗.” 上曰, “以小故起戰爭, 甚非所宜. 今後非奉命, 毋輒往.” |
〈천회(天會) 2년(1124) 5월 을사일에〉 갈라로(曷懶路) 군수(軍帥)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말하기를, “이전에는 해마다 물개[海狗]·해동청(海東靑)·숫새매[鴉鶻]를 고려 땅에서 잡았습니다. 얼마 전에 배 두 척으로 〈잡으로〉 갔는데 그들이 전함 14척으로 요격하여 두 척에 타고 있던 사람을 전부 죽이고 병장기를 탈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작은 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심하게 마땅한 것이 아니다. 이후로는 명을 받든 것이 아니면 쉽게 가지 말라.”라고 하였다. |
위의 금사의 내용을 보면 고려 땅에서 海狗(물개), 海東靑(해동청), 鴉鶻(아골, 숫매)를 잡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금나라가 고려 땅에서 해동청(海東靑)을 포획한 것이다.
이 문장에서 보듯 海狗(물개)와 鴉鶻(아골, 숫매) 등 바닷가에서 서식하는 동물을 포획한 것으로 보아 해동청(海東靑)은 해안가에 둥지를 트는 鶻(골, 매)로 추정된다.
금나라에선 고려와 사소한 일로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고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킨다.
(고려군이 전함 14척으로 금나라를 요격하고 두 척의 배에 타고 있던 사람과 병장기를 탈취했다는 문장을 볼 때 금나라인이 고려의 영역 중 고려의 바다에 침범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위의 분노리(盆奴裏 금나라에선 포섭부라고 칭한다) 외에 오국부가 있었던 장소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오국부는 분노리 외에 월리길, 부아리, 오리미, 월리독 등 총 다섯 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연맹체국가이다.
이 중에 부아리의 위치는 지금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이다. 지도를 보면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월리길은 송화강과 무단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월리독과 오리미는 모두 송화강을 따라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부아리(剖阿里)가 있었던 지금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월리길(越裏吉)이 있었더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오리미(奧裏米)가 있었던 지금의 흑룡강성 수빈현 구글지도이다.
'누르하치의 만주구룬 등장 전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1 (0) | 2023.04.29 |
---|---|
매사냥, 원나라, 맹가첩목아 (2) | 2023.04.25 |
매사냥, 요나라, 금나라, 오국부 1 (0) | 2023.04.13 |
서몽골 검독수리사냥, 한반도 매사냥 (2) | 2023.04.11 |
오저개(烏底改), 올적개(兀的改), 올적합(兀狄哈) 그리고 와집(窩集) (0) | 202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