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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1 본문
그 수달달로(水達達路) 행정구역 안에는 5개의 만호부(萬戶府)가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원나라 수달달로에 소속된 만호부(萬戶府)의 관리 만호(萬戶, Tumen)는 자신의 관할 영역 안에서
원나라에게 반란을 일으킨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인들을 진압했었다고 말씀드렸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원나라가 주원장 세력에게 쫓겨 몽골지역으로 달아나게 되자 예전에 알타리만호(斡朵里萬戶), 후르카만호(胡里改萬戶), 탁온만호(托溫萬戶)에게 반란진압을 당했던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은 예전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이들 만호(萬戶, Tumen)들을 공격했었다고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수달달로(水達達路)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수달달로(水達達路)'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 중 원문 일부와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해서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水達達路,元朝時設置的路。
大德年間,劃開元路部分區域設置水達達路,隸屬於遼陽行省。
水達達路,土地曠闊,人民散居。
元朝初年設五個軍民萬戶府,分領混同江(今松花江)南北之地。
相當於今松花江依蘭縣以下黑龍江沿岸直至庫頁島,
還有烏蘇里江流域,齊齊哈爾市以東和肇東市肇源以北。
其居民都是水達達、女直。元朝並在黑龍江下游設置征東元帥府。
行政區劃
........................................
桃溫軍民萬戶府(治所遺址在今黑龍江省湯原縣香蘭鎮),距上都四千里。
胡里改軍民萬戶府(在今黑龍江省依蘭縣喇嘛廟),
距上都四千二百里、大都三千八百里。 有胡里改江(今牡丹江)並混同江,
又有合蘭河(今圖們江)流入於海。
斡朵憐軍民萬戶府(在今黑龍江省依蘭縣牡丹江對岸馬大屯)。
脫斡憐軍民萬戶府(即今黑龍江省樺川縣東北宛里古城)。
孛苦江軍民萬戶府(即今黑龍江省富錦市西南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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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달로, 원나라 때에 만들어진 구역이다.
대덕년간(大德年間, 1297~1307년)에 개원로 부분에 설치를 계획했고, 요양행성에 예속되었다.
수달달로, 땅은 넓고 사람들은 흩어져 산다.
원나라 초기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가 설치되었다.
5개 만호부는 혼동강(지금의 송화강) 남북에 분포되어있다.
(수달달로[水達達路]라는 원나라 행정구역 안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가 설치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금의 송화강 의란현에서 흑룡강 연안의 사할린섬에 이른다,
그리고 또한 오소리강 유역, 치치하얼시의 동쪽과 자오동시(肇東市) 자오위안(肇源)의 북쪽에 이른다.
그곳의 거주민들은 수달달인과 여직인이다.
원나라 때 정동원사부가 흑룡강 하류에 설치되었다.
행정구역
................................................
도원군민만호부(桃溫軍民萬戶府)(만호[萬戶]가 사무를 보는 관청[治所]은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현 향란진에 있다)는 상도(上都)에서 4천리 떨어져 있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이 백과사전에서 기재한 도원군민만호부[桃溫軍民萬戶府]는 탁온만호부[托溫萬戶部]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후르카군민만호부(胡里改軍民萬戶府) (오늘날 흑룡강성 의란현)는 상도에서 4천2백리 떨어져있고, 대도에서 3천8백리 떨어져있다.
후르카강(胡里改江) (지금의 모단강)과 혼돈강(混同江, 지금의 송화강이다)이 있으며 합란하(현재의 두만강)는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중국 유기백과에선 합란하를 현재의 두만강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다)
알타련군민만호부(斡朵憐軍民萬戶府는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알타리만호부[斡朵里萬戶部]를 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흑룡강성 의란현).
탈알련군민만호부(脫斡憐軍民萬戶府) (즉, 흑룡강성 화천현 북동쪽에있는 완리고성[宛里古城]).
패고강군민만호부(孛苦江軍民萬戶府) (현재 흑룡강성 부금시 남서쪽에있는 고성[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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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달로(水達達路)에 대한 전체 영역과 5개 만호부가 있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다섯 개의 만호부(萬戶府)가 있던 위치이다.
아래는 탁온만호부(托溫萬戶部)가 있던 지금의 가목사시 탕원현의 구글지도이다.
옛 오국부의 구성원인 분노리(盆奴裏)가 있었던 곳이다.
아래는 알타리만호부(斡朵里萬戶部)와 후르카만호부(胡里改萬戶部)가 있던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 구글지도이다.
옛 오국부의 구성원인 월리길(越裏吉)이 있었던 곳이다.
아래는 탈알련만호부(脫斡憐萬戶府)가 있던 지금의 흑룡강성 화천현의 구글지도이다.
옛 오국부의 구성원인 월리독(越裏篤)이 있었던 곳이다.
아래는 패고강만호부(孛苦江萬戶府)가 있던 지금의 흑룡강성 부금시 지도이다.
옛 오국부의 구성원인 오리미(奧裏米)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흑룡강성 수빈현과 크게 멀지가 않다.
위의 다섯 개 만호부 중에서 원나라 말기엔 알타리만호부(斡朵里萬戶部), 후르카만호부(胡里改萬戶部), 탁온만호부(托溫萬戶部) 이렇게 3개 만호부(萬戶部)만 남게 되었는지
고려사와 조선의 사료를 보면 위의 3개의 만호부(萬戶部) 세력들만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으로 이주한 내용이 보인다.
위에서 기재한 알타리만호부(斡朵里萬戶部)의 만호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인데 그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을 보면 나도 모르는 내용이 등장한다.
아래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 중 원문 일부와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해서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正因如此,他與「吾者野人」結下深仇大恨,在「吾者野人」強大的攻勢下,
其子率部遷至圖們江外居住,洪武五年(1372年),宿敵兀狄哈達乙麻赤再次進襲,
迫使斡朵里部部眾逃到圖們江南岸的阿木河地區.
이로 인해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와 오자야인(吾者野人)과는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강력한 공세 아래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의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圖們江) 밖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372년 숙적인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부족인 달을마적(達乙麻赤)이 다시 공격하자 알타리(斡朵里)부족은 두만강(圖們江) 남쪽 기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 지역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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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공세로 인해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圖們江) 밖에서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372년 우데개(兀狄哈 올적합, 오자야인을 조선과 명나라에서 무르던 명칭이다)의 달을마적(達乙麻赤)이 공격하자 두만강(圖們江) 남쪽 기슭에 위치한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로 도피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이 청나라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위의 유기백과에서 인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고려사에 보면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만호(萬戶)로 있는 알타리부(斡朵里部)가 고려사에 등장한 것은 1392년도부터이며 따라서 대략 계산해보면 1380년 대 중반에 알타리부(斡朵里部)는 고려(高麗)에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372년에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로 도피했다는 내용은 고려사에선 볼 수 없었다.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실제론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조상이 아닌데 청나라에서 누르하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것을 참작해 청나라에서 기록했거나
아니면 위의 백과사전 설명처럼 이미 1372년에 알타리부(斡朵里部)와 알타리부(斡朵里部)의 만호(萬戶)인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로 남하해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고려사엔 기재되어 있지 않다가
1392년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자신의 두만강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에 거주하던 알타리부(斡朵里部)와 만호(萬戶)가 고려사에 기재된 것 아닌가 추정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 중 일부의 원문과 번역이다.
庚子 斡都里·兀良哈, 諸酋長, 皆授萬戶·千戶·百戶等職有差, 且賜米穀·衣服·馬匹, 諸酋感泣, 皆內徙爲藩屛. 경자 알도리(斡都里)·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들에게 모두 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또한 미곡(米穀)·의복(衣服)·마필(馬匹)을 하사하니, 여러 추장들이 감읍하여 모두 〈우리〉 경내로 옮겨와서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
위의 내용을 보면 알타리(斡朵里를 고려사에선 斡都里로 한문 음차표기 했다)는 만호(萬戶)와 함께 1392년 고려사 기록에 등장한다.
위의 중국유기백과의 기록에 보면 圖們江(도문강 Túménjiāng)이 등장한다. 이 강은 우리나라에선 두만강(豆滿江 Tuman River)이라고 한다.
아래는 圖們江(도문강 Túménjiāng)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설명이다. 圖們江(도문강 Túménjiāng)이 豆滿江(두만강 Tuman River)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알타리부(斡朵里部)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하얼빈시 의란현에 거주하다가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인의 보복을 피해 고려에 와서 거주하기 시작한 아목하(阿木河) 즉,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 구글지도이다.
(유기백과에선 오자야인[吾者野人]이 만호부[萬戶府]를 공격한 것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지리를 볼 때 수달달[水達達]인들과 합세해 보복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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