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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매사냥, 요나라, 금나라, 오국부 1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검색한 금사 권1 본문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검색한 금사 권1 본문 중 일부이다. 그대로 올린다.
子獻祖,諱綏可。黑水舊俗無室廬,負山水坎地,梁木其上,覆以土, 夏則出隨水草以居,冬則入處其中,遷徙不常。 獻祖乃徙居海古水,耕墾樹藝,始築室,有棟宇之制,人呼其地為納葛里。 「納葛里」者,漢語居室也。自此遂定居于安出虎水之側矣。 天會十四年,追諡定昭皇帝,廟號獻祖。皇統四年,號其藏曰輝陵。 五年,增諡獻祖純烈定昭皇帝。 |
위의 내용은 금나라 헌조(獻祖)인 완안수가(完顏綏可)에 대한 설명이다.
완안수가가 활동할 당시는 아직 금나라가 등장하기 전이니 헌조(獻祖)는 금나라가 등장한 후에 추존된 호칭이고 이 당시엔 완안부 여진부족의 지도자였다.
내용을 보면 '自此遂定居于安出虎水之側矣'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완안수가 때부터 완안부 여진부족이 안출호수(아르춘강)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그 이전엔 어디에서 거주했는지 사료는 없고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그 지역에서 전해지는 구전된 내용이 있는 것 같다.
아래는 중국 중문백과전서에서 설명하는 완안수가(完顏綏可)에 대한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중문백과전서에서 설명하는 완안수가(完顏綏可)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金獻祖, 女真名完顏綏可,金安帝完顏跋海之長子,公元983-1005年在位。 |
완안수가(完顏綏可)가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로 제위하던 시기는 서기 983년도에서 1005년도까지라고 한다.
이 기간 중에 완안부 여진은 안출호수(安出虎水) 부근으로 이주했고 이후부터 안출호수(安出虎水) 부근은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1104년에서 1109년 고려와 완안부 여진의 충돌 그리고 윤관의 9성이 등장하는 시기는 완안부 여진이 안출호수(安出虎水)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때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백과에 기재된 아십하(阿什河)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에 기재된 아십하(阿什河)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阿什河是黑龍江省境內的一條河流,為松花江的支流。
歷史上又稱阿勒楚喀河、按出虎水,
都為滿語[來源請求]「黃金」的意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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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 강(Ash River)은 흑룡강성의 경내에 있는 강으로 송화강의 지류이다.
역사적으로 阿勒楚喀河(아륵초객하, 알추카강), 按出虎水(안출호수, 아르추카강)라고 불렸다.
둘 다 만주어[출처 요청] 발음의 한문 음차표기이며 만주에선 '금(黃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진어 발음인 알추카[阿勒楚喀 아륵초객]나 아르추카[按出虎 안출호]는 완안수가[完顏綏可]가 활동하던 시대에 여진에서 금[黃金]을 의미하는 여진어라는 뜻이다.
이러한 여진어는 600년 후 누르하치가 활동하던 시대엔 여진어 발음이 달라져서 금[黃金]을 의미하는 여진어는 아이신[愛新 애신]이라고 발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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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완안부 여진 때의 안출호수(按出虎水)는 지금의 아십하(阿什河)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아십하(阿什河)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지도에 기재된 이 아십하 부근에 현재 하얼빈시 아성구가 있다. 이 하얼빈시 아성구(하얼빈시 아청구)가 바로 완안부 여진이 발흥한 근거지이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 권1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 권1의 내용 중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子景祖,諱烏古廼。遼太平元年辛酉歲生。自始祖至此,已六世矣。
景祖稍役屬諸部,
自白山、耶悔、統門、耶懶、土骨論之屬,
以至五國之長,皆聽命。
是時,遼之邊民有逃而歸者。
及遼以兵徙鐵勒、烏惹之民,
鐵勒、烏惹多不肯徙,亦逃而來歸。
遼使曷魯林牙將兵來索逋逃之民。
景祖恐遼兵深入,盡得山川道路險易,或將圖之,乃以計止之曰:
「兵若深入,諸部必驚擾,變生不測,逋戶亦不可得,非計也。」
曷魯以為然,遂止其軍,與曷魯自行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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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조, 휘는 오고내이다. 요태평 원년 신유해에 태어났다.
금나라 시조를 기준으로 6대 후손이다.
경조는 여러부족을 복속시켰다.
복속된 백산, 야회, 통문, 야라, 토골론 5개 나라(五國)의 지도자들은 모두 그의 명령에 따랐다.
당시 요나라 주변 사람들이 도망쳐 귀부해왔다.
(요나라 주변에 거주하던 부족민들이 요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쳐 완안부 여진 영역으로 귀부해왔다는 뜻으로 보인다)
요나라 병사는 철륵(鐵勒)과 오야(烏惹) 사람들의 거주지역을 옮기려 하였으나 철륵(鐵勒)과 오야(烏惹)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망갔다가 다시 귀부했다.
(철륵과 오야 사람들도 요나라 병사들로부터 탈출해 완안부 영역으로 귀부한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는 갈로 림아(요나라의 관직명칭이다)가 도망한 사람들을 잡기 위해 군대를 보내도록 시켰다.
경조(景祖, 이 책에선 경조라고 표기했지만 이 당시는 금나라가 세워지기 전이니 완안부족장 오고내이다)는 요나라 병사들이 깊숙이 들어와 산과 강과 도로의 험하고 평탄함을 숙지하고 후에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일을 도모할까봐 계책을 내어 그들을 막았다.
(요나라 병사들이 여진영역으로 도망쳐 온 철륵과 올야인을 체포한다는 구실로 여진영역으로 들어와 여진영역의 지형을 숙지하고는 후에 이를 이용해 공격할까봐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인 '완안오고내'가 요나라 병사들을 막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오고내는 갈로에게 말하길 "깊숙히 들어오면 여러 부족들이 동요하고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며,
도망자도 찾지 못할 것이니 좋은 계획이 아닙니다."
갈로도 당연하다고 여겨 군사들의 행동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갈로는 함께 수색을 했다.
(요나라 관리 갈로가 요나라 병사들을 물리고 '오고내'와 함께 완안부 여진 영역을 수색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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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을 보면 오국(五國)이 등장한다.
이 금사에 등장하는 오국(五國)이 요나라 성종 때의 오국부(五國部)일까 생각했었는데 요나라 성종 때의 오국부(五國部)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가 활동할 당시는 아직 금나라가 등장하기 전이고 요나라 때 오국부(五國部)가 활동하던 시기는 요나라(遼) 성종(聖宗) 때이다.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가 활동하던 연대와 요나라 성종이 활동한 연대를 비교해 보면,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가 주변의 다섯개 부족국가를 정복했다는 의미의 오국(五國)과 요나라 성종 때 연명체 국가를 뜻하는 다섯개 나라 오국부(五國部)는 서로 다른 나라들로 보인다.
즉, 요나라의 오국부(五國部)는 특정 부족국가들인 월리길, 오리미, 월리독, 부아리, 분노리가 서로 연맹을 결성해 오국부(五國部)라는 연맹체 국가를 만든 것이고,
결국, 오국부(五國部)는 특정한 나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위의 금사에 기재된 오국(五國)은 백산, 야회, 통문, 야라, 토골론을 지칭하는 '다섯개의 나라'라는 의미이고, 오국부(五國部)라는 연맹국가 명칭인 고유명사는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위의 금사 내용은 금나라 경조(景祖)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에 대한 내용이다.
금나라 경조(景祖) 역시 금나라가 등장하기 전의 완안부 여진부족의 지도자였다.
따라서 경조(景祖)는 금나라가 등장한 이후에 추존된 호칭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고려사에 기재된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 소속으로 후백제와 전투를 한 철륵(鐵勒)을 볼 수 있다.
위의 금사 내용을 보면 철륵(鐵勒)은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인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 부근에 거주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철륵(鐵勒)은 철리국이나 철리말갈로도 불린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들은 말갈족이나 흑수말갈 계통이 아니며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때 당나라 군대 소속으로 출전한 철륵부대와 관련된 세력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
철륵부대와 관련된 철륵인들 일부가 당나라에서 독립해 고구려 멸망이후 옛 부여와 옛 숙신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고 그동안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오국부(五國部)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백도백과에 기재된 오국부(五國部)에 대한 설명내용 중 일부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五國部是遼代契丹人對剖阿里、盆奴裏、奧裏米、越裏篤、越裏吉等五國(即五部)的統稱。 |
오국부(五國部)는 요나라 때 5개 부족으로 구성된 연맹체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며 부아리, 분노리, 오리미, 월리독, 월리길 5개 부족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륭서(耶律隆緒)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요나라 성종 야율륭서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설명중 일부이다.
遼聖宗耶律隆緒(公元972年1月16日 ~1031年6月25日 ), 契丹名耶律文殊奴,上京臨潢府(今內蒙古巴林左旗)人, 遼朝第六位皇帝(983年—1031年)。遼景宗耶律賢長子,母承天皇太后蕭綽。 |
요성종 야율륭서(耶律隆緒)는 972년도에서 1031년까지 활동한 인물이며 제위한 기간은 983년에서 1031년까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오국부(五國部)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완안부 여진부족의 지도자인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는 1021년도에서 1074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가 완안부 여진의 지도자가 되어 주변의 다섯개 나라(五國)를 정복했다면 10세 이후였을 것이고 이 때는 이미 오국부(五國部)라는 연명체 나라가 존재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오국(五國)을 구성하는 개별 부족국가들의 명칭도 오국부(五國部)와 다르다.
아래는 중국 백도백과에 기재된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 백도백과에 기재된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에 대한 내용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金景祖完颜乌古乃(1021年—1074年),又名胡来,
女真族,金昭祖完颜石鲁的长子,生女真完颜部的首领,............
继任部长
完颜乌古乃继位部长后,
征服白山、耶悔、统门、耶懒、土骨论五个部落,
力量更为强大,五个部落都听命于完颜乌古乃。
当时,辽朝边境有很多边民逃亡到女真族的部落。
辽朝派兵迁移铁勒、乌惹的民众,
铁勒、乌惹的人们大多不肯迁徙,也都逃亡到了女真部族。
辽朝的使臣曷鲁林牙率领军队前来索回逃到女真部族的边民。
完颜乌古乃害怕辽军深入女真的腹地,
将部落的山川道路的形势全都摸清,以后会图谋进兵,所以阻止使臣说:
“大军一旦深入林中,诸部一定会受到惊扰,如果他们不明情况发生了激变,
那么逃跑的边民就捉不到了,这不是一条好计策。”
曷鲁认为完颜乌古乃说的很对,所以没有派兵进入部族搜捕逃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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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경조(景祖)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1021-1074), 한문 명칭은 여진에서 유래되었다,
여진족, 금나라 소조(昭祖) 완안석노(完颜石鲁)의 장남, 생여진 완안부족의 지도자..........
계임부장(후임 지도자)
완안오고내가 후임 지도자가 된 후 백산, 야회, 통문, 야라, 토골론의 다섯 부락을 정복하고 그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섯 부락은 모두 완안오고내에게 순종했다.
당시 많은 변방 주민들이 요나라인 변방의 여진부족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요나라는 철륵과 오야의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철륵과 오야사람들은 대부분 이주를 거부하고 모두 여진부족 지역으로 도망쳤다.
요나라의 사신 갈로(曷鲁) 임아(林牙, 요나라의 관직명칭이다)는 군대를 이끌고 여진 부족으로 도망친 변방 주민들을 체포했다.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는 요나라 군대가 여진의 배후로 깊숙이 들어가 부족의 산, 강, 도로의 상황을 알아 낸 후 미래에 침략을 도모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사신의 행위를 제지한 후 말했다.
"요나라의 대군이 여진영역 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부족은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현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러면 도망간 변방 주민들이 잡히지 않을 것이므로 이는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갈로(曷鲁)는 완안오고내(完颜乌古乃)의 말이 옳다고 여겨 도망자를 체포하기 위해 여진부족 영역에 요나라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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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도백과에서는 요나라 성종시기의 오국부(五國部)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금사에 기재된 오국(五國)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오개부락(五个部落)이라고 백도백과에서 오국(五國)의 의미를 직접 해석해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백도백과에서도 요나라 성종 때의 오국부(五國部)와 금사의 오국(五國)은 서로 다른 대상이라는 것을 정의한 거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현재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이 지역이 위의 금사에 기록된 요나라의 이주정책을 피해 도망간 철륵(鐵勒)인들의 거주지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요나라 성종 때엔 오국부(五國部)의 구성국가인 월리길(越裏吉)이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송화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이동하면 지금의 아십하(阿什河 Ash River) 부근에 옛 완안부 여진족의 근거지인 하얼빈시 아청구(하얼빈시 아성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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