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매사냥, 원나라, 맹가첩목아 본문

누르하치의 만주구룬 등장 전후

매사냥, 원나라, 맹가첩목아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4. 25. 16:30

아래는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이다.

 

猛哥帖木儿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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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 중 원문 일부와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해서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其部落原來是元朝在牡丹江西岸斡朵里(依蘭附近)設立的五萬戶之一斡朵里萬戶。
據史書記載,努爾哈赤的先人可追溯到元朝的童揮厚。
他是元末斡朵里萬戶府的萬戶,兼管鷹事參與鎮壓「吾者野人」發動的叛亂
正因如此,他與「吾者野人」結下深仇大恨,在「吾者野人」強大的攻勢下,其子率部遷至圖們江外居住,洪武五年(1372年),宿敵兀狄哈達乙麻赤再次進襲,迫使斡朵里部部眾逃到圖們江南岸的阿木河地區。
1388年,明太祖與原元代遼陽行省五個女真萬戶府中的三部(胡里改部、托溫部、斡朵里部)取得聯繫,建立對付蒙古(北元)的同盟。
三部女真從今黑龍江依蘭縣沿松花江和牡丹江遷居到圖們江流域,即琿春一帶到朝鮮慶源、鏡城一帶。這地方元代屬奚關總管府。
明洪武二十五年(1392年)三月,接受朝鮮授予他的「上萬戶」。
明成祖永樂元年(1403年),以胡里改部屬地設置建州衛,位於今綏芬河流域,以胡里改部首領阿哈出(賜名李承善)為指揮使。
孟特穆以機敏著稱,永樂四年(1406年),在阿哈出的推薦下,授孟特穆為建州衛都指揮使(被朝鮮稱建州衛斡朵里),賜姓童,由此逐漸形成建州女真。
(맹가첩목아, 맹특목으로도 불린다) 부족은 원래 원나라 때 무단강 서안에 있는 알타리(지금의 하얼빈시 의란 근처)에 위치했으며 5개 만호(五萬戶) 중의 하나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조상은 원나라 때의 인물인 동휘후(童揮厚)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사서엔 누르하치의 조상이 '맹가첩목[猛哥帖木兒]'라고 기록되어 있고, 맹가첩목아의[猛哥帖木兒] 아버지는 동휘후[童揮厚]라고 하니 청나라 사서의 내용과 연결하면 동휘후는 누르하치의 선조가 된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생전 자신의 조상을 밝힐 때 자신의 할아버지인 각창안[覺昌安 기오창가]만 이야기 했지 그 이상의 조상은 밝힌 적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누르하치의 조상이라는 것은 누르하치 사후 청나라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나는 누르하치는 칭기즈칸 혈통이 섞인 고려 왕건의 후손이라고 계속 말씀드렸다)
(맹가첩목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원나라 말기에 알타리 만호부(斡朵里萬戶府)의 만호(萬戶, Tumen)였으며 (鷹)을 관리하는 관리였었고 '오자야인(吾者野人)'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맹가첩목아는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10,000개의 집안을 담당하는 관리였으며, 또한 주변의 오자야인[吾者野人]이나 수달달[水達達]인들에게 鷹[응, 수리, Hawk, Eagle]을 잡아오도록 시킨 것으로 보이고, 그 鷹[응]을 관리해서 원나라에게 조공으로 바치는 사무를 하는 관리였다. 이 시기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인들은 원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원나라 만호[萬戶, Tumen]라는 직분에 따라 이들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인들을 진압하게 된다. 다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백과사전에서는 鷹[응]에 대해 사무하는 관리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원사[元史]의 내용을 보면 鷹[응]이 아니라 鶻[골]의 일종인 해동청[海東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에 따라 鷹[응]이라는 전제로 설명을 드리겠다)
이로 인해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와 오자야인(吾者野人)은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강력한 공세 아래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의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372년 숙적인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부족인 달을마적(達乙麻赤)이 다시 공격하자 알타리(斡朵里)부족은 두만강 남쪽 기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 지역으로 도망쳤다.
1388년 명태조(太祖)는 원나라(년대로 볼 때 북원 시기로 보인다) 때 요양행성의 5개 만호 중 3개 만호(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托溫部], 알타리[斡朵里部])와 교섭하여 동맹을 맺었다. 몽골(북원)에 대항하기 위하여.
3부 여진(三部女真, 이 백과사전에 '3부 여진[三部女真]'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여진인이 아닌 옛 오국성과 오국성 주위의 오국부 세력의 후예들이다)은 지금의 이란현 흑룡강성에서 송화강과 무단강을 따라 두만강 유역으로, 즉 훈춘에서 조선의 경원(慶源)과 경성(鏡城) 일대로 이동했다. 이곳은 원나라 때 혜관총관부에 속해 있었다.
명나라 홍무 25년(1392년) 3월 조선에서 '상만호(上萬戶)'라는 관직을 받았다.
명나라 성조 영락원년(1403년), 지금의 수분하(綏芬河) 유역에 거주하던 후르카부(胡里改部)의 영역에 건주위(建州衛)가 설치되었고, 후르카부(胡里改部)의 수장인 아하추(阿哈出 아합출, 명나라에서 이승선[李承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는 건주위도지휘사(建州衛都指揮使)라는 관직을 명나라로부터 받았다.
맹특목(孟特穆, 맹가첩목아를 뜻한다)은 기민하고 영민함으로 유명했다.영락 4년(1406) 아하추(阿哈出 아합출, 후르카부족의 만호이다)의 추천으로 맹특목(孟特穆, 맹가첩목아를 뜻한다)은 건주위 (조선에서는 '건주위 알타리'라고 칭한다)의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되었고 그는 '동(童)'씨 성(姓)을 받았다. 그 결과 건주여진이 점차 형성되었다.

중국유기백과에 기재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내용이 길어 이번 회에선 위의 유기백과 내용 중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그의 부족인 알타리부가 현재 북한의 함경북도 회령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까지만 말씀드리겠다.

중국유기백과사전에선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조상이라고 보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맹가첩목아가 누르하치의 조상은 아니라고 계속 말씀드렸었고 이 글에서도 그러한 관점으로 중국유기백과의 내용에 대해 설명드리겠다.

원나라는 요양행성(遼陽行省)에 예속된 지역에 5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었다.

만호부(萬戶府)란 만호(萬戶, Tumen)가 다스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만호(萬戶, Tumen)는 10,000개의 가구(가정)를 다스리는 관리를 뜻한다.

따라서 한 가정에 4명이 거주한다고 가정하면 40,000명을 담당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중국유기백과에선 여진만호부(女真萬戶府)라고 기재하고 있지만, 원나라에서 만호(萬戶, Tumen)라는 관리는 상당한 고위직이기에 내 개인적인 견해로 이들 만호(萬戶, Tumen)는 여진족이 아니라고 본다.

고려사에 보면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원나라 관직도 등장하는 데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직급도 만호(萬戶) 보다는 아래급의 직급이라고 한다.(명나라와 지금의 중국은 당시 이곳의 지역민들이 여진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을 여진족으로 인식한 후 여진족이라고 칭하지만, 청태종 홍타이지의 발언처럼 이들은 여진족이 아니다. 그리고 이 당시 이 지역엔 여진족은 많지 않았다고 본다)

이 5개의 만호부(萬戶府) 중에 2개의 만호부(萬戶府)는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에 위치하고 있었고,1개의 만호부(萬戶府)는 지금의 가목사시 탕원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설명드리면, 의란현에 위치한 두 개의 만호부(萬戶府)는 후르카부(胡里改部)와 알타리부(斡朵里部)이며, 가목사시 탕원현에 위치한 만호부는 탁온부(托溫部)였다.

아래의 구글지도는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 지도이다. 이곳에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아하추(阿哈出)는 각각 알타리부(斡朵里部)와 후르카부(胡里改部)의 만호(萬戶)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란 현 ·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

www.google.co.kr

 

 

래의 구글지도는 지금의 가목사시(佳木斯市) 탕원현(汤原县) 구글지도이다.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송화강을 따라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탁온만호부(托溫萬戶部)가 위치했었던 곳이라고 본다.

 

탕위안 현 · 중국 헤이룽장 성 자무쓰 시

중국 헤이룽장 성 자무쓰 시

www.google.co.kr

이 지역은 요나라 때 오국부(五國部)의 하나인 분노리(盆奴裏)가 있던 곳이라고 본다.

분노리(盆奴裏)는 금나라 땐 포섭부(蒲聶部)로 개칭했었다고 말씀드렸었다.

요나라 때 오국부(五國部) 중의 하나인 분노리(盆奴裏, 포섭부[蒲聶部])가 응로를 막고(鷹路不通) 요나라에게 반란을 일으킨 곳은 이 지역이라고 보고 있다.

 

 

의 중국유기백과에 보면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원나라 만호(萬戶, Tumen)로서 응(鷹, 수리, Hawk, Eagle)을 관리하던 관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즉, 이들 만호(萬戶, Tumen)는 원나라의 고위관리로서 원나라 때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과 가목사시 탕원현에 거주하면서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던 오자야인(吾者野人)들에게 원나라에게 바칠 응(鷹, 수리, Hawk, Eagle)을 잡아오라고 지시를 내리던 관리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내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요나라 때도 요나라에 응(鷹, 수리, Hawk, Eagle)을 조공으로 바치던 지역이었다. 또한 요나라와 완안부여진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은 골(鶻, 매, Falcon)로 추정되는 해동청(海東靑)이었고, 당시 요나라 사신이 해동청(海東靑)을 얻기 위해 완안부여진의 영역을 지나 바다로 간 것을 볼 때 해동청(海東靑)은 응(鷹, 수리, Hawk, Eagle)이 아니라 바닷가에 주로 서식하는 골(鶻, 매, Falcon)로 추정된다고 말씀드렸었다.

 

결국, 이 지역에서 해동청(海東靑)으로 인해 또 다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은 원나라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오자야인(吾者野人)들의 반란에는 그 주변에서 함께 거주하는 수달달(水達達)인들도 합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반란을 원나라 만호(萬戶, Tumen)들이 진압했다고 한다.

 

즉, 알타리부(斡朵里部)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후르카부(胡里改部)의 아하추(阿哈出)는 원나라 만호(萬戶, Tumen)라는 직분에 따라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원나라 역사인 원사(元史)의 내용이다.

 

元史/卷04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三年春正月丙子,中書左丞許有壬辭職。丁丑,享于太廟。乙酉,中書平章政事納麟辭職。庚寅,沙汰怯薛丹名數。 二月戊戌,祭社稷。甲辰,太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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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원사(元史)의 일부 내용과 내가 번역한 내용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아래의 본문은 지정3년, 1343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二月戊戌,祭社稷................... 遼陽吾者野人叛
2월 무술(戊戌) 오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요양(遼陽) 오자야인(吾者野人)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래의 본문은 지정4년, 1346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夏四月壬子,
遼陽為捕海東青煩擾
吾者野人水達達皆叛
여름 4월 임자(壬子),
요양은 해동청을 포획하는 것으로 혼란하고 시끄럽게 되었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은 수달달(水達達, 수달달은 원나라에서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지점에 거주하는 세력을 칭하는 용어이다. 대략 지금의 동강시[同江市]일대이다)과 함께 반란에 연루되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요양(遼陽)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해석되지만 이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 요양행성(遼陽行省) 관할인 수달달로(水達達路)이기 때문에 요양(遼陽)에서 일어난 반란은 아니다.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우데개(兀狄哈 올적합)인을 설명하는 중국유기백과 내용이다.

 

乌德盖人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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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발해의 유민인 오야(烏惹, 올야[兀惹])이며 원나라 때는 오자야인(吾者野人)으로 불렸다. 그리고 후에 조선에선 이들을 혐진올적합(嫌真兀狄哈)으로 칭했다.

또한 조선 때 이들은 모단강 중상류인 지금의 영안시 주변과 우수리강 주변 그리고 두만강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래는 수달달(水達達)에 대한 중국백도백과의 설명이다.

 

水達達_百度百科

金代東北地區的女真猛安謀克,大約不下二三十萬户(《金史·食貨志》載明昌四年上京、蒲與、速頻、易懶、胡裏改等路猛安、謀克户有十七萬六千餘户。此外尚有鹹平、東京等路之女真人户

baike.baidu.hk

래는 위의 수달달(水達達)인에 대한 중국백도백과의 일부 내용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를 사용하고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元遼陽行省的女真人,基本上可以分為三大部分。
基本概況
一是從遼陽(今遼寧瀋陽)地區以南直到達遼東半島南端的女真人,其中一部分是遼初被耶律阿保機強迫遷去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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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哈思罕萬户府、千户所之名,即得諸合蘇款。在遼河兩岸,金鹹平、東京、北京,包括半島地區的“系遼籍”熟女真,受漢文化影響較深,文明程度是比較高的。
其次,在“熟女真”的東北方向,散佈在長白山西麓北至松花江上游和中游,以及牡丹、綏芬二水流域的女真諸部,元代屬開元路境。遼金之際,他們被稱為生女真,以與系遼籍女真相區別,或謂其“非熟女真、亦非生女真也”(《三朝北盟會編》政宣上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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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三,由此繼續往北、東北,在東北松花江、混同江的兩岸及其周圍的深山茂林中生活的通古斯語族諸部,構成了元代稱為女直水達達(或水達達女直)和兀者諸部的主體。
원나라 요양성의 여진족은 기본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기본개황
하나는 요양 (현재 요령성의 심양) 지역 , 그중 일부는 요나라 초기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강제이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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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합사한만호부, 천호소의 명칭, 모두 합소관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요하(遼河)의 주변에있는 금함평(금나라 때 함평으로 해석하면 지금의 요령성 개원시이다), 동경, 북경, 포괄적으로 반도 지역의 '계요적'숙여진은 한족문화(漢文化)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계요적숙여진'이란 요나라에 그들의 기록이 올라간 여진족을 말한다. 즉, 요나라에 그들의 기록이 올라가 있으므로 요나라의 직접 통제를 받던 여진인이란 뜻이다. 이에 반해 '생여진'은 요나라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고 간접통제를 받던 여진족을 말하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여진은 바로 생여진이다)
둘째, "숙여진"의 북동쪽 방향은 장백산 서쪽 산기슭과 북쪽에서 송화강 상류 및 중류까지, 목단강, 수분하가 있는 지역에 분포한 부족들이 있었으며 원나라의 행정구역으론 개원로 부근 지역이다.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이어지던 시기에 그들은 생여진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요나라에 직접 지배를 받으며 요나라의 관할명부에 속한 '계요적여진(숙여진)'과는 다른 집단들이었다. 또는 그 곳을 "숙여진도 아니고 생여진도 아닌 세력이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3조북맹회편'의 성선 상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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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여기에서 북쪽과 북동쪽으로 계속가면 동북쪽 송화강과 혼동강 양쪽 주변과 그 주위의 깊은 산과 울창한 숲에 사는 퉁구스어를 말하는 부족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원나라 때 이들을 여직수달달(혹은 수달달여직)이라고 칭했고 여러 올자야인 부족과 함께 구성되어 있었다.

의 내용은 원나라 때 당시 중국 동북3성에 거주하던 세력들을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다.

 

요나라에선 여진족을 숙여진(熟女真)과 생여진(生女真)으로 나눈 후 생여진(生女真)에는 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여진을 포함시켰다.

 

위의 중국백도백과에선 금나라 멸망 후 원나라 때를 기준으로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세력들을 3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중국백도백과에선 송나라 때 저술한 '삼조북맹회편'을 인용해서 생여진(生女真)이 거주하던 지역에는'생여진(生女真)도 아니고 숙여진(熟女真)도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원나라 때 반란을 일으킨 오자야인(吾者野人)과 수달달(水達達)은 위의 중국백도백과에선 세번 째 분류로 포함해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달달(水達達)인들은 당시 혼동강(混同江)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한다.

당시의 혼동강(混同江)은 대략 지금의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동강시(同江市 퉁강시)일대로 해석된다.

 

 

아래는 수달달(水達達)인들이 거주했었던 것으로 보는 지금의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퉁강시) 구글지도이다.

곳에 거주하는 수달달(水達達)이 오자야인(吾者野人)과 함께 알타리부(斡朵里部), 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부(托溫部) 만호(萬戶, Tumen)에게 원나라 때의 노역과 반란진압에 대한 보복 공격했었다고 본다.

 

즉, 이들 수달달(水達達)과 오자야인(吾者野人)은 원나라 때 원나라 관리인 만호(萬戶, Tumen)들로부터 반란에 대한 진압을 받았다가,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기게 되면서 원나라라는 뒷 배경이 위축되자 원나라 관리였던 만호(萬戶, Tumen)들을 상대로 그 때의 노역과 반란진압에 대해 보복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알타리(斡朵里), 후르카(胡里改), 탁온(托溫) 만호부(萬戶府)의 만호(萬戶, Tumen)들이 지금의 두만강(豆滿江, 만주어발음 Tumen Bira, 圖們江, 중국어발음 Túmenjiāng) 주변으로 도피해 거주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