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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태조왕건과 송첸캄포 그리고 보살신앙 본문
아래는 KBS 천상의 컬렉션이라는 프로그램 내용이다.
천상의 컬렉션이라는 KBS프로그램의 내용이다.
개성에서 발견된 고려 태조 왕건 동상에 대한 내용이다.
발굴 이후 한동안 북한의 학자들은 불상인줄 알았는데 서울대학교 노명호 교수에 의해 고려태조 왕건 동상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마치 고려 이전의 삼국시대 때 유행하던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외모가 비슷하다.
의식적으로 왕건의 모습을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유사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우리나라 국보 제78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개하는 국립박물관 사이트의 내용이다.
아래는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소개하는 국립박물관 사이트의 내용이다.
미륵보살은 힘든 세상에서 구원자를 갈구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유행은 바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후삼국시대 때도 역시 이러한 미륵신앙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 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의 궁예 편이다. 궁예 대왕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다. (용건이 궁예를 만났을 때 대왕으로 칭했고 그 사실을 그대로 고려사에 기록한 것을 보면 천복 원유 신유년 궁예의 칭호는 황제나 왕이 아닌 대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위의 삼국사기의 본문 일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青光菩𦸐, 季子爲神光菩𦸐.
선종(궁예)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였다.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다.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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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은 궁예 대왕의 승려시절 법명이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궁예 대왕은 승려 신분이었을 때부터 자신을 미륵부처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선 미륵불을 칭한 시기를 명확히 기술하지 않고 있는데, 아무 기반도 없는 선종 스님이 미륵불을 칭하지 않고 단기간에 사람들을 결집시켜 관직을 만든 후 대왕으로 불리기는 힘들다고 본다).
또한 두 아들에게도 보살이라고 칭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태조왕건의 아들인 고려광종이 조성한 미륵보살을 닮은 태조왕건 동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궁예의 미륵신앙을 이어 받아 그대로 미륵신앙을 이어온 걸까?
아니면 궁예는 폐주이고 진정한 미륵불이 아니며 태조왕건이 진정한 미륵보살이라고 고려광종이 선포한 것일까?
그런데 궁예의 미륵불과 왕건의 미륵보살은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궁예왕이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칭했다고 하지 않고 선종이 미륵불을 스스로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종은 아직 궁예가 대왕이 되기 전인 승려 신분일 때의 법명(승려신분으로서의 이름)이다.
즉, 궁예가 대왕이 되기 전인 승려 때부터 미륵불을 칭했다는 것이다.
(만일, 내 예상과 달리 대왕이 되고 부처를 칭했다면, 석가모니 일대기의 전륜성왕 사상과 어긋난다.)
하지만 태조왕건의 경우엔,
고려사 고려세계에 보면 신라말 풍수지리를 전한 도선스님은 태어날 왕건을 향해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로 칭했다.
또한 왕건의 훈요십조에서도 왕건 스스로가 보살이나 부처로 칭했다는 내용은 없다.
불교를 섬기고 팔관회 등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명했지만,
사원을 함부로 지어서 간신이 불교사원과 결탁해 사적인 세력으로 키우는 것을 경계했으며 신라 말기와 같은 불교의 폐단이 생기지 말 것도 함께 명했다.
즉, 불교에 대한 보호도 명했지만 그 반대로 불교세력의 무제한의 확장 역시 금지케 하고 경계했다.
따라서 태조왕건 당시 왕건 스스로 미륵불은 물론이고
미륵보살을 칭한 내용은 고려사에선 등장하지 않으며
당시의 왕건은 불교의 보호자이자 관리자
그리고 고승으로부터 인정받은 삼한일통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의 아들인 고려광종이 미륵보살을 연상시키는 태조왕건 동상을 조성한 것이다.
즉, 궁예 대왕은 승려 신분일 때부터 스스로 미륵불이었고,
태조왕건은 스스로가 아닌 그 아들인 광종 때에 고려의 황제인 통천관을 착용했지만 동상의 모습은
미륵보살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두 인물은 미륵보살로 칭하거나 칭함을 받을 때 서로 신분상에서 승려와 황제라는 차이가 있었다.
내 개인적으론 견해론,
고려태조 왕건을 미륵보살의 형상으로 나타낸 모습은 '궁예 대왕은 미륵불이 아니며 고려태조 왕건이 미륵보살이다.'라는 내용을 선포했다기 보다는
궁예 대왕이 미륵불을 자칭한 것는 별개로,
당태종 이세민의 부마(사위)이자 토번(지금의 티벹이다)의 국왕이었으며 불교의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인정 받았던 송첸캄포의 예에서 보듯,
고려태조 왕건을 전륜성왕으로 선포하면서도 아들 광종에 이르러 태조왕건을 미륵보살의 화신으로서 암시했거나 선포한 거라고 본다.
궁예가 선종 스님이라고 불릴 때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두 아들은 대왕이 된 궁예에 의해 보살이라고 칭해진 것과는 달리,
왕건은 그 제위시엔 나라와 불교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전륜성왕의 모습으로 왕건 사후엔 그 아들에 의해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구현한 차이가 있다.
아래는 토번의 국왕인 송첸캄포에 대한 다음 백과사전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다음 백과사전에 기재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당나라 태종의 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네팔 국왕의 딸 티쓴을 왕비로 맞았는데, 두 왕비는 모두 불교를 믿었다.
이에 라싸에 조칸 불전(佛殿)과 라모체 불전 등을 세우고 석가모니의 불상을 들여와 모셨다.
조칸 불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티베트 불교의 중심이며 국내외에 성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워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숭앙받았으며, 그가 다스리는 국토는 관음의 이상국으로, 두 왕비는 각각 백다라(白多羅)·청다라(靑多羅) 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재상 투미 삼보타 등 16명을 인도에 유학시키고 인도 문자로써 티베트 문자를 만들게 하고 문법도 만들게 하였다.
저서에 《마니가붐[摩尼十萬說活]》 《16조 헌법》이 있는데, 전자는 티베트의 관음의 건국과 국민구제를 설화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고, 후자는 10선(十善)의 법을 풀이한 것이다.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 티베트에 불교를 들여온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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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첸감포 시대 때 토번(티베트)의 국력은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했다고 한다.
지리적 이점 등으로 군사적으로 강해 당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와 싸웠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 설인귀 등이 모두 토번과의 전쟁에서는 졌다고 한다.)
당나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티베트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당나라가 동쪽에 위치한 신라와의 전쟁엔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는 토번의 국왕 송첸감포의 요청으로 당태종 이세민 집안의 여성을 송첸감포에게 출가시킨다.
(당태종 이세민의 친딸인지 종실의 딸인지 확실히는 모른다고 한다.)
송첸캄포에 출가한 딸은 당나라 문성공주로 알려졌으며 독실한 불교신자여서 송첸캄포도 불교신자가 된다.
그리고 이후 송첸캄포는 불교를 장려하면서 토번(티베트)에선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숭상되었다고 한다.
다음 백과사전에도 기재되어 있듯이
송첸캄포는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그의 나라는 관음보살의 이상국으로 여겨졌다고 하며 그의 왕비들은 각각 백다라 보살과 청다라 보살로 여겨졌다고 한다.
백과사전에 보면 십선(十善) 법을 풀이했다고 하는데 마치 전륜성왕을 연상시킨다.
전륜성왕이란 석가모니의 일대기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석가모니가 출가하지 않고 왕이 된다면 통일군주로서 나라 사람들에게 십선을 행하게 하는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한다며 깨달은 사람인 부처가 된다는 내용이다.
전륜성왕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출가를 하지 않고 속세에 남아서 국민들을 통치하는 왕이 된다는 개념이다.
또한 전륜성왕은 신체적으로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은 부처의 신체적 특징과 같다고 한다.
그러한 부처의 신체적 특징은 불상을 제작할 때도 그대로 표현하는데
내 개인적인 견해론, 개성에서 발견된 태조 왕건 동상은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이 부처와 같다는 내용에 따라 전륜성왕의 의미를 담은 왕건의 동상도 불상과 같은 신체적 특징으로 제작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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