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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만주(滿洲)가 형성되는 과정 3 본문
아래는 러시아 블라고베센스크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러시아 블라고베센스크에서 서쪽으로 흑룡강을 넘으면 중국의 흑하시이다.
중국 흑하시에서 러시아 블라고베센스트와 인접한 곳에 전설상의 인물인 부쿠리용숀과 그가 활동하던 부쿠리산 그리고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만주나라(Manju nation)가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중국 흑하시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빨간 점선이 중국 흑하시이며 부쿠리산은 이 점선 안에서 러시아 블라고베센스크에 인접해 있다고 한다.
청나라는 후르카족의 기원 전설인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 전설을 수정해서 새로운 내용을 삽입한 후 원래 전설과 다른 전설로 각색해 청나라 시조 전설이자 새로운 부쿠리용숀 전설을 만들어 낸다.
원래 전설과 달리 부쿠리용숀이 부쿠리산을 떠나 하얼빈시 의란현으로 이주한 후 의란현 원주민들에 의해 지도자로 추대 받았고 그 세력이 만주(滿洲)라고 기록했다.
즉, 하얼빈시 의란현은 각색된 전설을 기반으로 한 기록상의 만주(滿洲)가 있던 장소이다(실제로 존재했던 만주[滿洲]는 아니다).
아래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하지만 후쿠카 부족들에게 전설로 전해지던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는 실제로 존재한 나라였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한 청나라 기록으로만 존재한 하얼빈시 의란현의 만주(滿洲)는 청나라가 원래의 전설을 각색해서 만든 이야기이니 의란현에 만주(滿洲)가 존재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확인된 만주(滿洲)는 바로 누르하치가 지도자로 있던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이다.
청나라의 초기 만주어 기록인 구만주당(舊滿洲檔, 満文原檔)이나 내국사원당(內國史院檔)을 보면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고 한다. 1613년도 기록이라고 한다.
즉, 누르하치에 의해 실제 존재했었고 기록에도 있는 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이다.
아래는 누르하치 세력을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으로 표기할 당시 누르하치 세력의 수도인 허투알라(혁도아랍)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누르하치는 허투알라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다섯개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그 누르하치 세력을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했다.
그러면 왜 명나라에선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의 발언과 달리,
누르하치 세력을 건주여진. 홀라온(훌룬)을 해서여진, 동해나라를 야인여진이라고 칭했는지 그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위키 실록사전에 기재된 건주삼위에 대한 설명내용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고려와 한반도주변의 봉주로 남하한 맹가첩목아의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과 고론아합출의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을 고려와 조선에선 매우 후대했다.
일단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서 고려와 조선의 포용력과 위엄을 높일 수 있고,
이들이 고려와 조선의 국경 부근에 거주함으로서 다른 북방 이민족들과 함경도 주변 이민족들인 올적합과 여진 부족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선 맹가첩목아와 고론아합출에게,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원나라 관리로 재직할 때 직분이였던 두만(Tumen 豆漫 10,000개의 호를 관리하던 관리)과 같은 급의 만호(萬戶 10,000개의 호를 관리하던 관리)라는 직분을 수여해 주었다.
하지만 1403년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황제로 등장하면서 영락제는 조선에서 관직을 받은 맹가첩목아와 고론아합출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즉, 영락제는 조선 내부와 조선 주변에 거주하던 올량합(兀郞哈 오랑캐)과 올적합(兀狄哈 우데개)들에게 명나라의 관직을 받고 그 신분을 보장 받으며 대신 명나라로 귀속하라고 회유했다.
아래는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두만(Tumen 豆漫)이자 조선에선 만호(萬戶)의 직위에 있었던 고론아합출의 손자 이만주(李滿住)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설명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백과 설명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李滿住,又作李瞞咄,(?-1467年),是明朝初年女真首領,首任建州衛首領阿哈出的孫子,
釋迦奴(漢名李顯忠)的兒子。1426年,襲封建州衛都督僉事。
李滿住的舅舅為猛哥帖木兒(猛哥帖木兒或為努爾哈赤的祖先孟特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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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기백과에 보면 이만주(李滿住)는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수장인 아합출(阿哈出)의 손자이며 석가노(釋迦奴)의 아들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의 두만인 맹가첩목아의 누이는 바로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두만인 고론아합출의 부인이다.
따라서 맹가첩목아의 누이는 이만주(李滿住)의 할머니가 된다.
또한 맹가첩목아의 누이와 고론아합출 사이에서 낳은 딸은 명나라 영락제의 세 번째 황후라고 한다.
결국 명나라 황제 영락제와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아합출, 이만주(李滿住)는 사돈 관계가 되고,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만호 아합출과 알타리부(斡朶里, 斡都里)족 만호 맹가첩목아는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조선의 회유에도 불고하고,
맹가첩목아의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과 고론아합출의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은 명나라의 관직을 받고 명나라 관리 신분이 된다.
또한 당시 유파아손의 오랑캐(兀郞哈 올량합)부족은 함경북도 종성과 두만강 부근 그리고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유파아손은 맹가첩목아와 가까운 관계였기에 명나라의 관직을 받고 명나라 관리 신분이 된다.
명나라에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었고 이들 뿐만 아니라 올적합(兀狄哈)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하며,
그들의 영역을 명나라 행정구역에 편제시키고 그들에게 그 구역에 관한 관할권을 인정했다.
이런식으로 등장한 것이 고론아합출의 건주위, 맹가첩목아의 건주좌위, 유파아손의 모련위라는 명나라 행정구역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맹가첩목아와 고론아합출의 손자인 이만주(李滿住)를 적대시한다.
이후 조선과 맹가첩목아 그리고 이만주(李滿住) 간에 여러가지 일이 발생하는데 후에 이에 대해서 다시 언급드리고 오늘은 짧게 말씀드리겠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32년 조선 세종은 조선의 여연과 강계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를 공격한다.
사실 조선의 여연과 강계를 약탈한 것은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가 아니라 홀라온(이 당시 홀라온이라면 아마도 홀라온 4대 부족 중에 울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다)이었다. 조선에서 오인을 한건지 아니면 오인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를 공격한 건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조선 세종은 정벌군의 최윤덕에게 밀명을 내려 맹가첩목아를 오인을 빌미로 암살하라고 지시하지만 때마침 맹가첩목아는 명나라에 있어서 실패한다. (만주족이야기, 이훈 저, 너머북스 출판 페이지 65)
하지만 다음 해인 1433년 맹가첩목아와 그의 아들 권두는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의 지원을 받은 양목답올에게 살해되었고
맹가첩목아가 살해 당한 후 1435년(?) 맹가첩목아의 영역인 오음회(함경북도 회령)는 조선의 '6진'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이 지배하게 된다.
교과서에서 배운 '김종서의 4군6진'에 '6진'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함경북도 회령이다.
또한 오랑캐(兀郞哈 올량합)부족의 지도자 유파아손은 맹가첩목아가 살해되기 전인 1410년 조선에 의해 살해당했다.
유파아손의 영역은 조선의 '6진' 중 하나인 함경북도 종성이다.
그리고 건주위의 이만주(李滿住)와 그의 아들 이고납합 역시 명나라와 조선의 협공에 의해 1467년 조선군에게 참수된다.
또한 맹가첩목아의 아들인 충선(동창, 동산) 역시 비슷한 시기 명나라 장군 조보에게 살해된다.
이후 맹가첩목아 집안의 건주좌위와 건주우위 그리고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건주3위는 여러 부족들로 흩어지게 되지만,
약 120년 후인 1583년 건주세력 내에서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등장 해 흩어진 건주의 다섯 개 부족을 통일하고는,
주변의 홀라온 4개 부족(명나라에선 해서여진 4개 부족이라고 칭한다)과 동해나라(명나라에선 야인여진이라고 칭한다) 일부까지 정복한다.
또한 누르하치 세력은 1613년도엔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이라는 이름을 칭했었고
1619년 사르후 전투에 파병된 조선군 출신인 강홍립은 누르하치의 후금군에 항복한 후 포로생활을 할 때 누르하치의 부하들이 누르하치를 만주(Manju)와 한(Han)이라는 존호로 칭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학자들 중에는 후르카(胡里改, 火兒阿) 출신의 건주위 지도자였던 이만주(李滿住)의 만주(滿住)라는 이름도,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 부쿠리용숀의 후손인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 내에서 지도자를 호칭할 때 만주(Manju)로 호칭하던 것 아닌가 추측한다.
즉, 만주(Manju)는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 내에서 지도자를 뜻하는 칭호인데 명나라와 조선에선 이름으로 잘못 알려져 이만주(李滿住)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것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그다지 결속력이 없었던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과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은 조선과 명나라의 협공을 받고 약화되었다가 120년이 지나 누르하치가 등장하게 되면서,
누르하치가 이들을 결속시킬 때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 내에서 전해지던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전설을 중심으로 건주 내의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과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을 결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왕건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건주 내의 흩어진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과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을 정복한 후
우리나라가 민족의 구심점을 단군 신화에 둔 것처럼 건주의 구심점을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전설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때는 각색된 전설
즉, 부쿠리용숀이 의란현에 세웠다는 만주(滿洲) 이야기가 아닌 구전되던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부족의 조상 신화인 부큐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전설을 건주세력 전체가 수용한 거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의 지시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직접 밝힌 내용을 보면,
만주(滿洲)라는 명칭은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밝힌다.
즉, 만주(滿洲)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건륭제는 밝히고 있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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