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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滿洲)가 형성되는 과정 2 본문

고려 태조 왕건과 청 태조 누르하치

만주(滿洲)가 형성되는 과정 2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1. 5. 13:59

르카(胡里改) 부족의 묵시커라는 노인이 전해준 구전된 전설이 아닌 청나라에서 새롭게 각색한 전설에 따르면,

부쿠리용숀은 부쿠리산을 떠나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로 이주한 후 그 곳에서 원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의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청나라 사서에선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에 거주하게 된 부쿠리용숀과 그를 지도자로 추대한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의 원주민들을 만주(滿洲)로 칭하고 기술한다.

즉, 청나라 기록에 의하면 만주(滿洲)은 바로 이때 탄생한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각색된 전설이고 천제셴이 저술한 '누르하치[돌베개 출판]'에 따르면 만주구룬[만주국이라는 뜻이다]이라는 명칭이 문서로 확인된 것은 1613년 누르하치의 건주세력[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 때라고 한다.)

그리고 각색된 청나라 기록에 의해 만주(滿洲)가 탄생한 지역은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으로,

이전엔 철륵(鐵勒), 철리(鐵利), 오국성(五國城), 비슈발리크(別失八里)로 불리고 기록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제 구전되던 후르카부(胡里改)족의 전설에 의하면,

만주나라(Manju nation) 사람은 부쿠리용숀의 후손들로만 한정되고 만주나라(Manju nation)가 위치한 지역도 하얼빈시 의란현(일란 할라)이 아닌 부쿠리용숀의 후손이 살던 부쿠리산 주변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원래 구전되던 전설에선 부쿠리용숀이 부쿠리산에서 의란현으로 이주한 적이 없으니,

청나라가 주장하는 의란현(일란 할라)에 세운 만주(滿洲) 보다 더 이른 시기에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가 있었던 것이다.

즉, 전설상의 인물인 부쿠리용숀이 세운 전설상의 만주나라(Manju nation)가 있었고,

청나라가 그 전설을 다시 각색해서 만든 의란현 지역의 만주(滿洲)이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만주나라(Manju nation)는 전설상의 나라여서 정말로 존재한 나라였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고,

의란현(일란 할라)의 만주(滿洲)는 부쿠리용손의 만주나라(Manju nation)전설을 다시 각색해서 만든 것이니 실제론 존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했었던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은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된 건주(建州)뿐이다.

1613년 만주어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의 건주(建州)를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으로 표기했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

그런데 대원(원나라)이 주원장에게 쫓겨 몽골로 밀려난 후인 고려 말기에,

이 일란할라(옛 오국성[五國城]이며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이다)에서 원나라의 관리인 두만(Tumen[만호],10,000개의 가정을 관리하는 관직을 뜻한다)과 그의 부족들이 함경북도 회령, 종성, 흑룡강성 동녕현(흑룡강성 동녕현이 아닌 백두산 서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으로 남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 부족들을 고려사에선 알도리(斡都里, 고려사에선 알타리[斡朶里]로 표기하지 않고 알도리[斡都里]로 표기했다), 오랑캐(올량합[兀郞哈])로 표기했으며,

다시 조선왕조실록에선 알타리(斡朶里)와 오랑캐(올량합[兀郞哈]) 외에 후르카(화아아[火兒阿]), 타온(탁온[托溫])을 더 추가해서 표기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공양왕 4년(1392년) 3월에 알도리(斡都里, 고려사에선 알타리[斡朶里]로 표기하지 않고 알도리[斡都里]로 표기했다)와 오랑캐(올량합[兀郞哈])를 후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庚子 斡都里·兀良哈, 諸酋長, 皆授萬戶·千戶·百戶等職有差, 且賜米穀·衣服·馬匹, 諸酋感泣, 皆內徙爲藩屛. 又牓諭諸部落曰, “洪武二十四年七月, 差李必等賫牓文, 前去女眞地面, 豆萬等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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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공양왕 4년(1392년) 3월 기사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庚子 斡都里·兀良哈, 諸酋長, 皆授萬戶·千戶·百戶等職有差, 且賜米穀·衣服·馬匹, 諸酋感泣, 皆內徙爲藩屛. 又牓諭諸部落曰, “洪武二十四年七月, 差李必等賫牓文, 前去女眞地面, 豆萬等處, 招諭. 當年, 斡都里·兀良哈·萬戶·千戶·頭目等, 卽便歸附, 已行賞賜名分, 俱各復業. 所有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地面, 原係本國公嶮鎭境內, 旣已曾經招諭, 至今未見歸附, 於理不順. 爲此, 再差李必等賫牓文, 前去招諭, 牓文到日, 各各來歸, 賞賜名分, 及凡所欲, 一如先附斡都里·兀良哈例.
경자 알도리(斡都里)·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들에게 모두 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또한 미곡(米穀)·의복(衣服)·마필(馬匹)을 하사하니, 여러 추장들이 감읍하여 모두 〈우리〉 경내로 옮겨와서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붙여 초유하기를,
“홍무(洪武) 24년(1391) 7월, 이필(李必) 등을 차출하여 방문을 가지고 여진 지역인 두만(豆萬) 등처에 가서 초유하였다. 올해에 알도리·올량합·만호·천호·두목 등이 바로 귀부하니, 상을 내리고 명분을 하사하여, 모두 각각 본업에 복귀하게 하였다. 소유하고 있는 속빈(速頻)·실적멱(失的覓)·몽골(蒙骨)·개양(改陽)·실련(實憐)·팔린(八隣)·안둔(安頓)·압란(押蘭)·희랄올(喜剌兀)·올리인(兀里因)·고리한(古里罕)·노별(魯別)·올적개(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公嶮鎭)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이 때문에 다시 이필을 차출하여 방문을 가지고 가서 초유하게 하니, 방문이 이르는 날에 각각 내귀(來歸)한다면, 상과 명분을 하사하는 것이 모두 바라는 바에 미치게 할 것이며, 먼저 귀부한 알도리와 올량합의 예와 똑같이 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조선 태조실록 4년(1395년) 12월에 알타리(斡朶里), 오랑캐(올량합[兀郞哈]), 후르카(화아아[火兒阿]), 탁온(탁온[托溫]) 등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吾郞哈 水吾狄介等四人來。 三國之末, 平壤以北, 悉爲野人游獵之所。 高麗時, 徙南民以實之, 自義州至陽德, 徑築長城, 以固封疆。 然不安其居, 數爲畔亂, 至於用兵以討之。 義州土豪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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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조선 태조실록 4년(1395년) 12월 기사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여진(女眞)이라고 표기했지만 여진으로 보긴 힘든 세력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
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
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
합란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
여진으로 표기했고
옛 금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세력
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
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
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
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
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
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
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
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
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
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
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
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
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 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
아목라(阿木刺)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
올량합(오랑캐)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
올적합(우디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
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중에 오랑캐(올량합[兀郞哈])는 정확히 일란할라 출신으로 기재되진 않았다.

하지만 1410년 이후 조선의 기록에선 후르카(화아아[火兒阿])도 오랑캐(올량합[兀郞哈])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오랑캐(올량합[兀郞哈]) 역시 일란할라(옛 오국성이며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이다) 출신이라고 본다.

또한 청나라는 홍타이지 때부터 후르카(중국에선 호리개[胡里改]로 표기한다)와 와르카(와이객[瓦爾喀])를 구별하지 않고 후르카(胡里改)를 와르카(瓦爾喀)로도 칭했다고 한다.

따라서 후르카(중국에선 호리개[胡里改]로 표기했고 조선에선 화아아[火兒阿]로 표기했다), 와르카(와이객[瓦爾喀]), 오랑캐(올량합[兀郞哈])는 근본이 같은 계열로 보이며,

옛 오국성(五國城)인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 출신이거나 그 부근의 출신으로 보인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각각 조선 내 함경북도와 백두산 서쪽 봉주라는 곳에 거주하게 된다.

(봉주를 백두산 서쪽으로 보는 국내의 학설과는 달리 현재 중국에선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으로 추정하는 것 같다)

이들 중 세 부족의 지도자를 나열하면 알타리(斡朶里)의 두만(豆漫 Tumen)은 맹가첩목아이고 당시 오음회(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에 거주하게 되며,

후르카(화아아[火兒阿])의 두만(豆漫 Tumen)은 고론아합출이고 당시 백두산 서쪽의 봉주라는 곳에 거주하게 된다. (봉주를 백두산 서쪽으로 보는 국내의 학설과는 달리 현재 중국에선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으로 추정하는 것 같다)

아래는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둥닝 현 · 중국 헤이룽장 성 무단장 시

중국 헤이룽장 성 무단장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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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랑캐(올량합[兀郞哈])의 추장은 유파아손(괄아아팔아속)이며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과 두만강 주변의 지금 중국 일부 지역에 거주하게 된다.

두만강 주변에 거주하던 유파아손의 오랑캐(올량합[兀郞哈]) 영역을 조선실록에선 토문(土門)이라고 표기한다.

두만강과 토문강은 모두 투르크어 tümen(두만)의 한문 음차표기이다

그리고 위의 세 부족들은 고려와 조선의 시각으로 보면,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에서 함경북도와 백두산 서쪽이거나 아니면 흑룡강성 동녕현으로 이주한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 사람이지만,

사실 이 부족들 중에 순전히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의 원주민인 옛 철리(鐵利)와 옛 오국성(五國城)의 후예는 오랑캐(올량합[兀郞哈]) 정도라고 본다.

후르카(호리개[胡里改], 화아아[火兒阿])부족은 부쿠리용숀을 시조라고 주장하는 만주나라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들은 부쿠리산에서 의란현(옛 오국성이자 당시 일란 할라)으로 이주해온 이주민이었다.

즉, 후르카는 하얼빈시 의란현(옛 철리국이자 옛 오국성이다)의 원주민이 아니다.

알타리(斡朶里)부족 역시 의란현(옛 오국성이자 옛 철륵이다) 원주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알타리(斡朶里)부족도 외지인 출신으로 의란현으로 이주해 원주민과 함께 거주하던 세력으로 보인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를 오국성(하얼빈시 의란현)에서 같이 함께 거주하던 후르카(胡里改, 火兒阿), 탁온(托溫), 오랑캐(兀郞哈)와는 달리 동여진(東女眞) 계통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공양왕 3년(1391년)의 기록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世家 卷第四十六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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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공양왕 3년 원문과 번역이다.

遣前祥原郡事李龍華, 宣慰斡都里兀良哈. 斡都里卽東女眞也.
전 상원군사(祥原郡事) 이용화(李龍華)를 보내어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을 선위(宣慰)하게 하였다. 알도리는 곧 동여진(東女眞)이다.

하지만 이 알타리(斡朶里, 斡都里) 출신 중에 맹가첩목아라는 원나라 고위 관리인 두만(Tumen, 만호[萬戶], 10,000개의 호[戶]를 관리하는 관직을 뜻한다)이 배출된 것을 보면,

이 알타리(斡朶里, 斡都里)부족도 이미 의란현 원주민과 피가 섞여서 여진의 혼혈이라는 정체성 보다는 오국성(五國城, 원래 동여진과는 별개의 세력이었다)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세력이라고 본다.

결국 알타리(斡朶里, 斡都里)와 후르카(胡里改, 火兒阿)를 제외하면,

조선의 두만강 부근과 함경북도 종성으로 이주한 하얼빈시 의란현 출신의 부족으로 오랑캐(兀郞哈)라는 세력이 있다.

고려사와 조선 기록에 이들을 오랑캐(兀郞哈, 몽골인들이 투르크인 중에 숲에 거주하는 부족을 칭하는 용어이다)

즉, 올량합(兀郞哈)으로 기재한 것을 봐서 이들이 바로 일란할라(하얼빈시 의란현)의 원주민인 옛 철륵(鐵勒, 투르크 15개 부족이다)내지는 옛 오국성(원나라 때 제작한 지도엔 투르크어 비슈발릭의 음차표기인 별실팔리라는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출처: 만주족이야기, 이훈 저, 너머북스)의 후예로 보인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투르크 언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몽골에선 투르크(鐵勒) 일부 부족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사용하던 Wuliangha(오랑캐[兀郞哈])라는 단어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게 된 거라고 본다.

즉, 고려 후기에 옛 오국성(五國城) 지역을 점령한 몽골제국의 몽골인들이 점령 당시 오국성(五國城, 옛 철륵[鐵勒]내지 철리[鐵利]가 위치한 곳이다)에 거주하던 철륵인(鐵勒人)들을 보고,

그들이 철륵(鐵勒, 투르크 15개 부족이다) 부족 중 하나인 Wuliangha(오랑캐)라는 것을 인식한 후,

몽골인들이 이들을 지칭할 때 Wuliangha(오랑캐[兀郞哈])로 부르고 표기하던 것이,

兀郞哈(올량합 Wuliangha[오랑캐])라는 용어가 고려 말기 고려사 기록에도 등장하게 된 원인이라고 본다.

몽골인들은 몽골지역과 지금의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투르크인(철륵인[鐵勒人])들 중에 Wuliangha(오랑캐)를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에,

의란현에 거주하던 오국성(五國城)사람들이 원래 투르크인(철륵인[鐵勒人]) 출신인 것을 알고 이들을 투르크 부족 명칭인 Wuliangha(몽골인들이 투르크인 중에 숲에 거주하는 부족을 칭하는 용어이다)로 칭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