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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唐太宗)과 위구르(回紇) 본문

철륵, 돌궐 그리고 튀르크

당태종(唐太宗)과 위구르(回紇)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3. 31. 20:55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철륵(鐵勒)인들의 도움을 받아 돌궐 1제국(The Göktürks)을 멸망시켰다고 말씀드렸다.

또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철륵(鐵勒)인들에게 Tengri Qaghan(天可汗)으로 2회에 걸쳐 추대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아래는 '유기문고' 사이트의 '구당서' 권199 열전 동이, 북적의 철륵 내용이다.

 

舊唐書/卷199下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鐵勒,本匈奴別種。自突厥強盛,鐵勒諸郡分散,衆漸寡弱。至武德初,有薛延陀、契苾、回紇、都播、骨利幹、多覽葛、僕骨、拔野古、同羅、渾部、思結、斛薛、奚結、阿跌、白霫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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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의 구당서 권199 열전 동이, 북적의 철륵 내용 중 일부이다. 원문과 동북아역사넷에서 번역한 내용을 올린다.

鐵勒,本匈奴別種。自突厥強盛,鐵勒諸郡分散,衆漸寡弱。
至武德初,有薛延陀、契苾、回紇、都播、骨利幹、多覽葛、僕骨、拔野古、同羅、渾部、思結、斛薛、奚結、阿跌、白霫等,散在磧北。
薛延陀者,自雲本姓薛氏, 其先擊滅延陀而有其衆,因號爲薛延陀部。
其官方兵器及風俗,大抵與突厥同。
철륵(鐵勒)은 본래 흉노(匈奴)의 다른 갈래[別種]였다.
돌궐(突厥)이 강성한 이래로 철륵의 여러 부락[諸部]은 흩어져 백성들이 점자 줄어들고 약해졌다.
무덕(武德)년간(618~624) 초기에 이르러 설연타(薛延陀),계필(契苾), 회흘(迴紇), 도파(都播), 골리간(骨利幹), 다람갈(多覽葛), 복골(僕骨), 발야고(拔野古),​​ 동라(同羅), 혼부(渾部), 사결(思結), 곡설(斛薛), 해결(奚結), 아질(阿跌), 백습(白霫)[등 대체적으로 열다섯]이 고비 북쪽[磧北]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설연타는 스스로 본래의 성을 설씨(薛氏)라고 했는데, 그 조상이 연타(延陀)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그 백성을 얻었기 때문에 설연타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이 일리질씨(一利咥氏)였다.] 그 관제와 무기, 풍속은 대체적으로 돌궐과 같았다.

철륵(鐵勒)은 흉노(匈奴)와 돌궐(突厥 The Göktürks)에서 피지배층이었다.

철륵(鐵勒)은 대략 15개 부족으로 구성된 세력이라고 한다.

이들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동돌궐을 멸망시켰는데, 철륵(鐵勒)은 매우 전투력이 강했다고 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당나라 최정예의 부대가 바로 철륵(鐵勒)부대였다.

철륵 15개 부족 중에 초기엔 설연타(薛延陀) 부족이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한다.

당태종은 황실의 공주를 설연타 부족의 지도자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설연타(薛延陀) 는 당나라 황제도 달래야하는 세력이었다.

 

설연타는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 중 반란을 일으켰고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중에 철수한 후 다른 철륵(鐵勒) 부족들과 함께 설연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이후 철륵 부족에서 리더 역할을 하던 세력은 위구르(回紇 회흘)이다.

 

 

아래는 유기문고 사이트 신당서 권217 열전 회골(위구르)에 대한 내용이다.

 

新唐書/卷217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回鶻上 回紇,其先匈奴也,俗多乘高輪車,元魏時亦號高車部,或曰敕勒,訛為鐵勒。其部落曰袁紇、薛延陀、契羽、都播、骨利幹、多覽葛、仆骨、拔野古、同羅、渾、思結、斛薛、奚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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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 신당서 권217 열전 회골(위구르)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동북아역사넷사이트에서 번역한 내용이다. 동북아역사넷에서 번역한 내용 그대로 올린다.

回紇,其先匈奴也,俗多乘高輪車,元魏時亦號高車部,或曰敕勒,訛為鐵勒。
其部落曰袁紇、薛延陀、契羽、都播、骨利幹、多覽葛、仆骨、拔野古、同羅、渾、思結、斛薛、奚結、阿跌、白霫,凡十有五種,皆散處磧北。
회흘(回紇)은 그 선조가 흉노(匈奴)인데, 습속은 대다수 바퀴가 높은 수레[高輪車]를 타서 원위(元魏)시기에 또한 고차(高車) 부[락]이라고 불렸고, 달리 칙륵(勅勒)이라고도 했는데, 잘못해서 철륵(鐵勒)이 되었다.
그 부락은 원흘(袁紇), 설연타(薛延陀), 계필우(契苾羽), 도파(都播), 골리간(骨利幹), 다람갈(多覽葛), 복골(僕骨), 발야고(拔野古), 동라(同羅), 혼(渾), 사결(思結), 골설(斛薛), 해결(奚結), 아질(阿跌), 백습(白霫), [등] 대저 열다섯 종류였는데, 모두 고비 북쪽[磧北]에 흩어져 살았다.

위의 신당서(新唐書) 내용을 보면,

위구르(回紇 회흘)가 철륵(鐵勒)을 구성하는 15개 부족 중의 하나가 아니라,

회흘(回紇 위구르) 자체가 철륵(鐵勒)과 같은 뜻으로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선 철륵(鐵勒)은 15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재하고 있고,

신당서(新唐書)에선 회흘(回紇)은 15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에선 철륵(鐵勒)을 구성하는 15개 부족 중 위구르에 해당되는 회흘(迴紇)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신당서(新唐書)에선 회흘(回紇)을 구성하는 15개 부족 중 위구르에 해당되는 원흘(袁紇)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위구르(迴紇)가 철륵(鐵勒)의 15개 부족 중의 하나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닌 철륵(鐵勒)의 15개 부족들의 리더 역할을 하는 세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 때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년(661) 봄 정월에 당이 하남·하북·회남의 67주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의 진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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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원문과 번역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내용 그대로 올린다.

又以鴻臚卿蕭嗣業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또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위구르(回紇) 등 여러 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위의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당나라 부대 중에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 소속에 속한 회흘(回紇, 위구르) 부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이라는 명칭은 옛 부여(扶餘) 지역을 공격하고 옛 부여(扶餘) 지역을 장악하는 목적의 군대로 해석한다고 한다.

또한 이 위구르 부대가 부여 외에 평양으로 진격 명령을 받았다(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위구르(回紇) 등 여러 부의 병력을 거느리고(帥回紇等諸部兵)라는 문장을 볼 수 있다.

 

위구르의 명칭이 구당서(舊唐書)에 기재된 한자표기가 아닌,

즉, 구당서(舊唐書)에선 신당서(新唐書)와 달리 회흘(迴紇)이라고 한자표기 되었고,

회흘(迴紇)의 성격도 철륵(鐵勒) 15개 부족 중의 하나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선,

철륵(鐵勒)의 위치를 회흘(回紇)이 대신하고 있어 철륵(鐵勒) 15개 부족이 아닌 회흘(回紇) 15개 부족으로 기재되어 있고,

한자표기도 구당서의 회흘(迴紇)과 달리 회흘(回紇)로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위구르(回紇) 등 여러 부의 병력을(回紇等諸部兵)이라는 삼국사기에 기재된 내용처럼,

위구르(回紇 회흘)를 철륵(鐵勒)의 여러 부족들과 구별시켜 표기함으로서,

삼국사기에서도 철륵(鐵勒)이 아닌 위구르(回紇 회흘)가 철륵(鐵勒)을 대표하는 세력인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때 위구르(回紇 회흘) 외에 다른 철륵(鐵勒) 부족들도 참전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들 철륵(鐵勒)을 대표하는 부족 명칭이 위구르(回紇 회흘)였다고 본다.

 

 

아래는 유기문고 사이트 신당서 권217 열전 회골(위구르)에 대한 내용이다.

 

新唐書/卷217上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回鶻上 回紇,其先匈奴也,俗多乘高輪車,元魏時亦號高車部,或曰敕勒,訛為鐵勒。其部落曰袁紇、薛延陀、契羽、都播、骨利幹、多覽葛、仆骨、拔野古、同羅、渾、思結、斛薛、奚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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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 신당서 권217 열전 회골(위구르)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동북아역사넷사이트에서 번역한 내용이다. 동북아역사넷에서 번역한 내용을 올린다.

渠領共言:
「生荒陋地,歸身聖化,天至尊賜官爵,與為百姓,依唐若父母然。
請於回紇、突厥部治大塗,號『參天至尊道』,世為唐臣。」
乃詔磧南鵜泉之陽置過郵六十八所,具群馬、湩、肉待使客,歲內貂皮為賦。
乃拜吐迷度為懷化大將軍、瀚海都督;
然私自號可汗,署官吏,壹似突厥,
有外宰相六、內宰相三,又有都督、將軍、司馬之號。
[회흘을 비롯한 철륵의] 우두머리[渠領]들이 모두 말했다.
“[저희가] 황량하고 누추한 땅에서 태어났으나 [지금] 몸을 황제의 교화에 귀의하자 천지존(天至尊)께서 관작(官爵)을 내려주시면서 백성으로 삼아주셨으니 당나라에 의지하는 것을 부모와 같게 [대]할 것입니다.
청컨대 회흘과 돌궐 부락까지 큰 도로를 닦아 “참천지존도(參天至尊道)”라 부르며 대대로 당나라의 신하[唐臣]이 되고자 합니다.”
이에 [황제가] 조문을 내려 고비 남쪽 벽제천(鷿鵜泉)의 남쪽에 68곳의 우정(郵亭)을 두고 말과 젖, 그리고 고기 등을 갖춰 사신을 접대하게 하고 [회흘에게] 매년 모피와 가죽[貂皮]으로 부(賦)를 내게 했다.
그리고 토미도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한해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토미도가] 마음대로 가한(可汗)을 자칭하고 관리를 설치한 것이 돌궐의 [그것과] 같아 외재상(外宰相)이 여섯, 내재상(內宰相)이 셋이었고, 또한 도독, 장군(將軍), 사마 등의 칭호도 있었다.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 중 철륵(鐵勒) 부족 중 하나인 설연타(薛延陀)의 반란과 군사적인 피해와 손실로 인해 당태종(唐太宗)과 철륵(鐵勒)부대는 회군을 한 후 당나라(唐)는 철륵 부족들과 함께 설연타(薛延陀)의 반란을 제압한다.

그리고 646년 당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은 630년에 이어 두번 째로 철륵(鐵勒) 부족들에게 Tengri Khagan(天可汗, 天至尊)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647년도의 일을 신당서(新唐書)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위의 신당서(新唐書) 번역한 내용을 보면

 

'[회흘을 비롯한 철륵의] 우두머리[渠領]들이 모두 말했다. “[저희가] 황량하고 누추한 땅에서 태어났으나(渠領共言 生荒陋地)

[지금] 몸을 황제의 교화에 귀의하자 천지존(天至尊)께서 관작(官爵)을 내려주시면서 백성으로 삼아주셨으니 당나라에 의지하는 것을 부모와 같게 [대]할 것입니다(歸身聖化,天至尊賜官爵,與為百姓,依唐若父母然).라고 회흘(回紇)과 철륵(鐵勒) 부족들이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발언한 내용이 보인다.

회흘(回紇)을 비롯한 철륵(鐵勒) 부족들이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천지존(天至尊), 즉 Tengri Khagan(天可汗)으로 칭하면서 "당나라에 의지하는 것을 부모와 같게 [대]할 것입니다(依唐若父母然)."라고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나라[唐]에 의지하는 것을 부모와 같게 [대]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지만 이 문장에서 당나라[唐]는 Tengri Khagan[天至尊]인 당태종[唐太宗]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이후의 당나라 황제들도 Tengri Khagan[天至尊]의 계승자로서 포함된다고 본다)

고구려를 공격한 당나라 소속의 회흘(回紇)과 철륵(鐵勒) 부대가,

사적으론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은 관계임을 볼 수 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이후의 당나라 황제들도 Tengri Khagan[天至尊]의 계승자로서 Tengri Khagan 이세민[李世民] 후손인 당나라 황제들과 회흘을 포함한 철륵인들의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은 관계는 이후의 역사를 볼 때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고구려를 공격하던 철륵의 계필(契苾) 부족 지도자인 계필하력(契苾何力)은 당나라 황제의 사위였고,

이후 '위구르 제국'의 카간(可汗) 중에서도 당나라 황제의 사위들이 등장한다.

 

아래는 투르크인들의 전투를 묘사한 유튜브 동영상이다.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 때 당나라 소속의 철륵(鐵勒)부대는 아마도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연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