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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의 백두산과 청나라의 장백산, 황룡의 후예 본문
고려 왕씨와 청나라 황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조상을 백두산(白頭山) 출신이라고 자국의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고려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懿祖, 作帝建)의 외가쪽 선조는 호경이라고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호경은 백두산(白頭山)에서 개성 부소산(扶蘇山)으로 왔다고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호경은 대략 발해 때 인물로 계산되고 당시 발해에서 활동하던 호경은 백두산(白頭山)을 거쳐서 개성 부소산(扶蘇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발해에서 활동을 했지 발해인은 아니라고 본다(물론 내가 이야기하는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편년통록[編年通錄]에서 밝힌 외가쪽 조상 호경이 아닌 친가쪽 조상을 말한다).
사실 호경은 신천강씨 인물이다. 따라서 부계의 조상은 아니다. 태조왕건의 친가 쪽 조상(고려 의조 작제건[懿祖, 作帝建]의 부계를 뜻한다)은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이 발해에 병합돼서거나 발해의 병합을 피해서 한반도로 이주한 외국인이라고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올린 고려사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고려사 내용의 일부이다. 원문과 번역 그대로 올린다.
金寬毅編年通錄云,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이르기를,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
위의 '고려사' 내용을 보면 고려 왕건의 선조 호경이 백두산(白頭山)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비교해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의 조상을 포고리 옹순과 맹가첩목아라고 주장하면서 포고리 옹순을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과 연결시킨 후
자신들 청나라 황실은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발상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강희제 때엔 그 장백산(長白山)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은 포고리 옹순과 맹가첩목아 모두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아니라고 본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의 조상을 숨기고 있다고 보며 실제로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의 조상을 언급 할 때 맹가첩목아나 그의 아들 동산 등을 언급한 적이 없었고,
다만 누르하치 자신의 할아버지인 각창안과 아버지 탑극세만 언급했다고 한다.
즉,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의 할아버지까지 이야기 했지 더 이상의 윗대에 대해선 이야기하지도 밝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대만의 역사학자 '천제셴'의 저서 '누르하치'[출판산: 돌베게]의 페이지 28~29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포고리 옹순은 후르카 부족 공통의 조상이지 누르하치 집안이라는 특정 집안의 조상은 아니다.
즉, "누르하치가 포고리 옹순의 후손이다!"라는 말은 "내가 단군의 후손이다"라는 말과 비슷한 구체적이지 않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다.
아이신기오로(àixīnjuéluó)라는 단어가 누르하치가 활동하던 시대인 1612년 기록에 등장한다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누르하치 사후 그의 아들 홍타이지 때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꾼 후이며,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포고리 옹순도 청나라 태조 홍타이지 때부터 후르카 부족내지는 오랑캐 계열의 공동의 조상이라기 보다는 청나라 황실 집안의 조상인 것으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청실록에선 청나라 황실이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에서 발상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후르카 부족인 묵시커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포고리옹손 설화에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역시 후에 청나라 황실이 원래 포고리옹손전설에다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을 삽입한 것이다.
아래는 실제 구전으로 전해지는 부쿠리용숀의 전설을 기록한 구만주당(舊滿洲檔, 満文原檔) 천총 9년(1635년) 5월 6일조의 기록이다.
이훈 교수의 저서인 '만주족이야기(너머북스 출판)'에서 발췌한 내용 그대로 올린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대로 부쿠리산 아래 불후리 호수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지방에는 글과 문서가 없고 옛날에 살았던 것을 차례대로 말하여 전해온 것에 의하면
그 불후리 호수에 하늘의 세 처녀 엉굴런, 정굴런, 퍼쿨런이 목욕하러 왔는데, 까치가 준 붉은 과일을 막내 처녀 퍼쿨런이 얻어 입에 머금자 목구멍으로 들어가서 임신하여 부쿠리 용숀을 낳았습니다.
그 일족이 만주 나라 사람입니다.
그 불후리 호수의 둘레는 100리, 사햘리얀 울라(흑룡강)로부터 120~130리입니다.
나에게 두 아들이 태어난 후, 그 불후리 호수로부터 이주하여 가서 사할리얀 울라의 나르훈이라는 곳에서 살았었습니다.
(원래 후르카 부족의 노인 묵시커의 증언 만주족이야기(이훈 저, 너머북스) 페이지 194의 내용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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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후르카 부족에게 전해지던 원래의 부쿠리용숀의 전설이다.
여기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원래 후르카 부족의 부쿠리용숀 설화엔 부쿠리산만 등장하지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포고리옹순(부쿠리용숀)의 성씨도 아이신기오로(àixīnjuéluó)씨도 아니며 성씨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태조고황제실록 내용이다.
아래는 청태조고황제실록의 일부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太祖承天广运圣德神功肇纪立极仁孝睿武端毅钦安弘文定业
高皇帝姓爱新觉罗氏讳先世发祥于长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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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청태조고황제실록의 내용을 보면,
청나라 황실의 성을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氏 àixīnjuéluó)씨라고 밝히면서,
청나라 황실의 조상인 부쿠리 용손은 장백산에서 발상했다고 기재한다(先世发祥于长白山).
즉, 실제 부쿠리 용손 전설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부쿠리 용손의 성씨와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등장한다.
실제 부쿠리 용손 전설에는 부쿠리 용손의 성씨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씨가 아이신기오로( àixīnjuéluó)라는 내용은 더더욱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전설엔 부쿠리산만 등장하지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은 등장하지 않는다.
종합하면, 고려사와 청나라 태조무황제실록 내용을 보면,
고려 왕건의 조상과 청나라 황실의 조상은 모두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에서 발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더해서 고려사에선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해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懿祖, 作帝建)이 서해바다 용왕(西海龍王)의 딸(龍女)과 결혼했고 서해바다 용왕(西海龍王)의 딸(龍女)은 황룡(黃龍)으로 변신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편년통록(編年通錄)의 내용과 부합된 기록과 행동을 하는 고려왕씨는 우리 집안과 청나라 황실이다.
그래서 우리집안은 고려 왕건의 당나라 황제 후손설과 백두산, 부소산 전설을 가지고 있고,
청나라 황실은 백두산, 황룡의 후예, 고려세조 용건의 역사관을 가진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올린 고려사내용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懿祖, 作帝建)이 서해 용왕(西海龍王)을 구해주고 용왕의 딸인 용녀(龍女)와 결혼하는 내용이다.
이와 비교해서 청나라는 황룡기(黃龍旗)를 공식 국기로 사용했었다.
또한 청나라 태조 때부터 여덟개의 용깃발인 팔기(八旗)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보면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건주(建州)의 추장으로 있을 때부터 용(龍)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유튜브에 올라온 청나라 국기와 국가이다. 국기 공식 명칭이 황룡기(黃龍旗)임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고려 광종을 다룬 드라마 '제국의 아침' 오프닝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편년통록(編年通錄)의 내용에 따라 고려태조 왕건의 상징인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과 황룡(黃龍)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고려왕씨 중 우리집안과 청나라 황실은 모두 조상이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출신이고 황룡(黃龍)의 후예라는 자의식이 있다.
또한 고려 국왕은 충선왕과 심양왕 왕고 이래로 칭기즈칸 혈통이 되며 칭기즈칸의 후손들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 황실, 왕족 역시 칭기즈칸의 동생인 주치 카사르 집안과 청나라가 존속하는 기간 동안 대를 이어서 총 597차례 결혼하게 된다.
#백두산 #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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