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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 본문

고려 태조 왕건과 청 태조 누르하치

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

박지원( baghatur khan) 2021. 4. 13. 23:43

 

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이다.

2016년 매일경제 기사에 조선 인조 때 도승지(都承旨 현 대통령 비서실장)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건주의 노추(奴酋,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고려 왕건의 후예라는 말이 있다'는 기사를 읽고 내가 중 2때 들었던 우리집안이 고려 왕건의 후손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었다.

그 이유는 누르하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조선 초기 함경북도 회령에서 활동했었다는 글을 예전에 본 적이 있어서이다.

고려 왕건의 후손인 우리 집안 조상님도 조선 초기에 도피한 곳이 함경북도이며,

조선에 돌아오셔선 이 유튜브 동영상에 등장하는 함경북도 명천과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신 것으로 기록에 나와있다.

 

이곳에 정착하기 이전엔 함경북도 어디에 계셨는지는 모른다.

당시 함경북도는 조선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고('이시애[李施愛] 사건' 당시는 함길도라는 명칭이었고 남북도로 갈리지도 않았다)

오랑캐(兀良哈, 몽골이 투르크 계열 중에 숲에 거주하는 부족을 칭하는 용어이다)출신 부족들과 여진(女眞)족들이 혼재해서 살던 지역이었다.

(두만강 주변의 함경북도에 거주하던 여진[女眞]족은 그들의 출신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기 힘들다. 금나라 멸망 후 원나라 때 원나라가 두만강 북쪽을 점령해 테무게 옷치긴[칭기즈칸의 친동생이다]의 영지가 되었을 때 옷치긴 세력의 군인으로서 테무게 옷치긴 영지로 온 옛 금나라 출신 병사들의 후예가 지금의 두만강 남쪽 인근의 함경북도로 이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Partizanskaya River] 주변에 거주한 여진[女眞]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야라[耶懒] 출신들이 두만강[豆滿江] 인근에 거주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왕씨 학살 때 고려 최고위층 고려 왕씨들은 몽골과 내몽골로도 도피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 정부의 통제권 밖인 함경북도나 동북3성, 몽골 지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고려 왕씨들은

당시 고려왕과 밀접한 세력이며 몽골왕족과도 혼맥관계인 왕씨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몽골이나 현재 내몽골 그리고 동북3성 지역에도 인맥이 형성되어 있으며 국내외적으로는 자체 정보망을 가지고 있던 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례로도 심양(瀋陽)과 그 부근은 원나라 말까지 고려 왕씨가 심양(瀋陽)지역에서 심양왕(瀋陽王)으로 있었고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는 고려 충선왕의 조카였으며 원나라 왕족인 양왕 중샨(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증손자이다)의 딸 눌룬공주와 결혼했고 그의 손자인 왕독타불화(王篤朶不花, 몽골식 발음은 옹톡토아부카로 추정된다)도 심양왕(瀋陽王)이었다.

따라서 심양왕(瀋陽王) 재직시 적지 않은 수의 고려 왕씨가 거주했다고 생각되는 지역이다.

 

우리집안과 청나라 황실의 조상인 고려 왕씨는 현재 국내 개성 왕씨에 90%를 이루고 있는 유금필 장군의 딸인 태조 왕건의 제9부인의 후손들이 아니며,

그 밖의 다른 10%의 개성 왕씨들과도 계통이 다른 세력이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단종 즉위 1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발생한 이징옥의 난과 조선 세조 13년에 함경북도 길주(함경북도 명천 인근지역이다)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李施愛 亂)

우리 집안과 청태조 누르하치 집안의 조상이 활동했던 사건이고 그리고 그 배후는 북원(北元, 명나라 때의 몽골을 칭하는 용어이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동안 우리 집안과 청나라 황실은 고려 왕씨의 후예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서로 다른 세력이었고 각각 이징옥의 난(李澄玉 亂), 이시애의 난(李施愛 亂)을 일으켰을 때도 서로 손을 잡은 오랑캐(兀良哈 올량합) 계열 부족들의 출신도 달랐다고 보았다.

 

우리 집안이 건주세력의 양대 지도자 중에 하나인 후르카(胡里改)족 추장 이만주(李滿住)와 손을 잡고 이시애의 난(李施愛 亂)의 배후로 활동했다면

누르하치(努爾哈赤) 집안은 건주세력의 양대 지도자 중 하나인 오도리(斡朶里 알타리)족 추장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후손 내지는 후예들과 손을 잡고 이징옥의 난(李澄玉 亂)을 배후에서 주동했다고 보았었다.

 

다만 이만주(李滿住)는 명나라 영락제(明成祖 永樂帝)와 서로 사돈관계였으므로 그러한 이만주(李滿住)와 손을 잡은 우리집안이 고려 내에선 누르하치(努爾哈赤) 집안보다는 고려왕과 더 가까웠던 친척 아니었을까 추정했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건주세력을 명나라에선 여진(女眞)족이라고 칭하지만,

실제로 건주세력을 구성하는 양대 세력인 후르카(胡里改)와 오도리(斡朶里 알타리)는 여진(女眞)족이 아니라 오랑캐(兀良哈 올량합)계열로 분류된다.('오도리'를 고려사에선 후르카나 오랑캐와 달리 '동여진'으로 분류하지만 동여진인이 오랑캐 계열 지역으로 이주한 후 오랑캐화 된 부족 정도라고 본다).

오랑캐(兀良哈 올량합)는 여진(女眞)족이 아니라, 철륵(鐵勒 투르크) 계열의 부족을 뜻한다.

Wulianghai, Wuliangha(우량하이, 우량하)라고 불리는데 한자로는 烏梁海(오량해 Wulianghai)내지는 兀良哈(올량합 Wuliangha)으로 표기한다.

현재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투바 공화국(청나라에선 이들을 唐努烏梁海 [당노오량해 탕노우량하이]로 칭했다)의 투바인(구당서에 기재된 철륵[鐵勒] 15개 부족 중 도파 부족에 해당된다)과,

역시 러시아에 거주하는 사하 공화국의 사하인(야쿠트인) 그리고 위구르인(구당서에 기재된 철륵 15개 부족 중 회흘 부족에 해당된다)과 함께 거주하던 투르크인들을 칭하는 용어이다.

철륵(鐵勒 투르크)계인 투바인과 사하인은 스스로를 오랑캐(우량카이)라고 부르며 그 뜻은 전쟁터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용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몽골인들은 이들 투바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Wulianghai(우량하이, 오랑캐)를 '용사'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숲속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사용한다고 한다.

(다른 투르크인들이나 몽골인들은 바가투르, 바투르, 바타르를 '용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아마도 '숲속의 사람'이란 예전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두메산골 촌놈'이라는 뉘앙스를 지닌 상대를 비하하는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兀良哈(올량합 Wuliangha 오랑캐)이라는 명칭은 몽골 제국 시대부터 고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부터 '고려사'에 兀良哈(올량합 Wuliangha 오랑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다시 이야기를 이징옥의 난(李澄玉 亂)과 이시애의 난(李施愛 亂)으로 돌아와서,

우리집안과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오랑캐(올량합 兀良哈) 계열인 후르카(胡里改) 부족, 오도리(斡朶里 알타리) 부족과 각각 손을 잡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으킨 사건이 이시애의 난(李施愛 亂)과 이징옥의 난(李澄玉 亂)이라고 봤었는데

당시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읽어 보고 같은 시기의 북원(北元, 고려에서 명나라 때 몽골을 칭하는 용어였다)과 홀라온(명나라에선 해서여진으로 칭한다) 그리고 건주(명나라에선 건주여진이라고 칭한다)의 정세를 봤을 때

이 두 사건은 모두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행동했고 그 배후로 북원(北元, 명나라 때의 몽골을 칭하는 용어이다)이 주도하였던 사건이라고 본다.

따라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생전에 지도자로 있었고 이징옥의 난(李澄玉 亂) 사건 당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후예가 이끌던 오도리(斡朶里, 알타리) 세력이나 후르카의 이만주(李滿住)세력은 이 사건을 계획 및 주도했던 주체적인 세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