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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태조왕건과 삼한 (56)
濟世安民 bagtur khan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8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八 疆域〈一〉 洪惟我 國家肇造大東覆育區宇輿圖之盛厯古所無 始祖建國鄂多理城 zh.wikisource.org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吉林謹按吉林周以前為肅慎地漢以後屬挹婁靺鞨길림조심스럽게 살펴보건대, 길림은 주나라 이전엔 숙신의 땅이었고 한나라 이후로는 읍루와 말갈의 땅이었다.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중국 길림시를 옛 부여국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 중국 길림시에 가면 부여국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청나라 ..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大白山南優㴾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渌邊室中私之, 即徃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 고려시대 사료 DB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아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의 부여(扶餘)와 동명왕(東明王)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의 부여(扶餘)와 동명왕(東明王) 내용과 번역이다.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魏略曰: 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 「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
고려 때 기록된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에 보면 부여국을 세운 인물은 해모수(解慕漱)라 기재되어 있고 역시 고려 때 기록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에 보면 부여국(扶餘國)을 세운 인물은 해부루(解夫婁)라고 기재되어 있다.다만 삼국사기의 행간의 내용을 따로 해석해 볼 때 외부세력인 해모수(解慕漱)가 해부루(解夫婁)를 몰아내고 부여왕(扶餘王)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다.하지만 중국의 문헌인 논형(論衡)과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부여국(扶餘國)을 세운 인물은 동명왕(東明王)으로 기록되어 있다.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면,위의 두 책이 고려 때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앞선 기록들이고 위의 책들이 등장한 연대로 볼 때 한나라(漢) 때 인물인 왕충(王充)이 논형..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db.history.go.kr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餘七十何足徵.稱國者, 馬有四十, 辰有二十, 幷有十二. 於中何者是大國. 先以扶餘檀君本紀曰, “與非西岬河伯之女婚而生男, 名夫婁.” 東明本紀曰, “扶餘..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의 명령으로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선 만주(满洲), 숙신(肅愼)과 함께 부여(扶餘)를 다룬다.그리고 고려 때 저술한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부여(扶餘)는 삼한(三韓)을 구성하는 70개 나라 중에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나라인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내 개인적인 견해론, 청나라(大淸) 황제와 황실은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의 후손이라고 말씀드렸었다.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로,고려태조 왕건의(高麗太祖 王建) 선조는 고구려 당나라 전쟁 때 당나라 군대 소속으로 옛 부여(扶餘)지역을 공격한 철륵(鐵勒) 부대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었다.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의 선조는 고구려 멸망 후 옛 부여(扶餘)지역으로 이주했고 후에 숙신(肅愼)지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