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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해모수(解慕漱)와 주몽(朱蒙) 신화 분석 본문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의 명령으로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선 만주(满洲), 숙신(肅愼)과 함께 부여(扶餘)를 다룬다.
그리고 고려 때 저술한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부여(扶餘)는 삼한(三韓)을 구성하는 70개 나라 중에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나라인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청나라(大淸) 황제와 황실은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의 후손이라고 말씀드렸었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로,
고려태조 왕건의(高麗太祖 王建) 선조는 고구려 당나라 전쟁 때 당나라 군대 소속으로 옛 부여(扶餘)지역을 공격한 철륵(鐵勒) 부대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었다.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의 선조는 고구려 멸망 후 옛 부여(扶餘)지역으로 이주했고 후에 숙신(肅愼)지역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말씀드렸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청나라 황제가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부여(扶餘)는 다루지만 고구려는 다루지 않고 있으며 삼한(三韓)으로도 고구려는 다루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다.
하지만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황제이며 이후 고려의 황제나 왕은 그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려 때 저술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근본인 부여(扶餘)를 삼한(三韓)의 하나로 인정했다고 본다.
삼국유사를 보면 부여(扶餘)에 도읍을 세우고 부여국(扶餘國)의 왕으로 불린 인물은 해모수(解慕漱)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校勘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乗五龍車立都, 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東扶餘, 東眀帝継北扶餘而興立都于卒夲州爲卒夲扶餘, 即髙句麗之始(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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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 의주(醫州)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해모수는 이름이지만 해부루는 이름이 부루이고 성은 해씨가 된다고 본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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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북부여(北扶餘)를 보면 전한(前漢)의 선제 신작(宣帝 神爵) 3년에 해모수(解慕漱)라는 인물이 도읍을 세우고(立都) 왕을 칭했으며(稱王) 그 나라의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전한(前漢)의 선제 신작(宣帝 神爵) 3년을 서기로 계산하면 대략 기원전 58~59년이라고 한다.
이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를 보면 해모수(解慕漱)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天帝)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제(天帝)는 하늘(天)의 제왕(帝王)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와는 달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에선 해모수(解慕漱)는 천제(天帝)가 아니라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선,
해모수(解慕漱)가 천제(天帝)라고 저자가 처음부터 명확히 규정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에선,
저자가 해모수(解慕漱)를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라고 명확히 인식하지도 규정하지도 않고 해모수(解慕漱)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라 자칭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시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에선,
해모수(解慕漱)가 천제(天帝)로서 오룡거를 타고 왔으므로 당연히 하늘에서 온 것으로 해석되게 기술하고 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에선,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不知所從來) 인물이 해모수(解慕漱)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선,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 해부루(解夫婁)라고 하나
삼국사기에선,
해모수(解慕漱)와 해부루(解夫婁)의 친족관련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고려 때 저술된 역사를 다룬 서적이지만 해모수(解慕漱)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 다른 것은
삼국사기가 친 신라계 인물인 김부식의 저작이므로 고구려의 근본인 부여(扶餘)의 해모수(解慕漱)에 대해서 낮추어 보는 시각으로 저술한 것이 아닌가 본다.
(즉, 삼국유사와 달리 삼국사기에선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 해모수를 '근본도 모르는 자'이며 '자칭 하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다니던 인물'로 기술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낮추어 보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始祖東明聖王, 姓髙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
先是,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収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濵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冝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大白山南優㴾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渌邊室中私之, 即徃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褁之, 置於暖處, 有一男兒破殼而出, 骨表英竒. 年甫七歳,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戲,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䝉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减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乗,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隂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何徃而不可. 與其遟留而受辱, 不若逺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音述水.” ,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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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小兒]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와(蛙, 개구리)’를 ‘와(蝸, 달팽이)’로 쓰기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후사를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금와는 해부루의 친아들이 아니다. 금와가 기존의 북부여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어쩌면 금와는 해부루가 동쪽으로 이주해 동부여로 불릴 때 해부루의 계승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후에 그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늘[天]이 저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 물가에 땅이 있으니 이름을 가섭원(迦葉原)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五穀)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옛 도읍[舊都]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삼국유사 북부여기에서 해모수는 '천제'였는데 삼국사기에선 '천제의 아들'이라고 칭한다. 이는 유화의 증언에서도 해모수는 자칭 '천제의 아들'이었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이때는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은 때라고 해석된다) 태백산(太白山)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日]가 비추어 〔유화가〕 몸을 끌어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升]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왕이〕 다시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英奇].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음에도 영리함이 범상치 않아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며, 그 사람됨이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세 명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고구려가 등장하는 데엔 두 가지 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그 중 한 가지인데, 주몽은 졸본천 내지는 홀승골성에 이르렀고 이 곳의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으며 이 때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지었고 자신을 성을 고씨로 삼았다는 설이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구려가 등장하는 데엔 두 가지 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앞에서 밝힌 내용과 다른 또 다른 내용인데,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고 그 졸본부여의 왕이 아들이 없자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 당시엔 말갈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았다. 말갈의 조상이 되는 읍루가 있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이 문장은 정확히 기술한 문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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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보면,
해부루(解夫婁)가 부여(扶餘)의 도읍(舊都)에서 부여왕(扶餘王)으로 있었다가 도읍을 이주해(移都) 동부여(東扶餘)를 세웠고
(해부루가 동부여라는 새로운 국호로 세운 것인지 아니면 해모수의 부여와 구별하기 위해 해부루의 부여를 동부여라고 후세에 칭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여기에 대해선 아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다)
해부루(解夫婁)가 떠난 후 원래 부여(扶餘)의 옛 도읍(舊都)에는 어디에서 온 인물인지는 모르지만(不知所從來) 스스로 자기는 천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해모수(自稱天帝子解慕漱)가 원래 부여(扶餘)로 와서 도읍을 세웠다(來都焉).
(해모수가 부여왕이 되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해모수가 원래의 부여 지역에서 부여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해모수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삼국유사에서 칭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에선 북부여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에선 북부여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아래는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본 내 개인적인 해석이다.
해부루(解夫婁)는 아직 나라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부족국가급인 부여(扶餘)의 지도자였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보면 구도(舊都)라는 글자가 보이기 때문에,
해부루(解夫婁)가 통치할 때는 부족국가급의 도읍(都)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해모수(解慕漱)가 와서 도읍을 세운 것(來都焉)을 보면,
부족국가급의 도읍(都)을 넘어선 부여국(扶餘國)의 도읍(都)은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선,
해부루(解夫婁)는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고 기술하고
삼국사기에선,
해부루(解夫婁)가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받은 하늘의 계시에 따라 자신이 통치하던 부여(扶餘)를 하늘이 내린 자에게 주기 위해 그 곳을 떠나 동해 물가로 이주해서 동부여(東扶餘)가 등장한 것처럼 기술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부족국가급의 부여(扶餘)를 다스리던 해부루(解夫婁)는 외지에서 온 세력인 해모수(解慕漱)에 밀려나 동쪽으로 이주한 후
망명정부인 부여국(扶餘國)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고 본다.
따라서 해부루(解夫婁) 입장에서는,
원래 자신이 통치했던 부여지역을 차지하여 부여왕(扶餘王)이 된 해모수(解慕漱)는 불법정부인 것이고
해부루(解夫婁)만이 정통성을 가진 부여왕(扶餘王)이 되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선,
해부루(解夫婁)가 아란불(阿蘭弗)의 권유로 인해 동해 물가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고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이 당시 부여(扶餘)는 하나였고
해모수(解慕漱)와 해부루(解夫婁)는 서로 자신이 부여(扶餘)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은 불법단체인 것이고 상대의 부여국(扶餘國)은 정통성을 가진 부여국(扶餘國)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북부여(北扶餘)나 동부여(東扶餘)는,
이 두 세력을 구분하기 위한 명칭일 것으로 보이며 실제 부여(扶餘)는 당시에 하나였다고 본다.
삼국사기에서는,
해부루(解夫婁)가 원래 부여(扶餘)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혈육이 아닌 금와(金蛙)를 발견해 키우고 태자로 삼았고 한다.
그리고 금와(金蛙)는 동부여(東扶餘)의 왕이 되는데,
물론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금와(金蛙)는 해부루(解夫婁)가 망명한 곳의 지도자이며 해부루(解夫婁)의 망명정부를 후원하던 그 곳 지도자라고 본다.
금와(金蛙)가 해부루(解夫婁)에게 그의 왕위를 상속받았으므로 금와(金蛙)는 원래 부여(扶餘)의 지도자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금와(金蛙)는 고토회복이라는 명목으로 해모수의 부여(扶餘)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모수(解慕漱)의 여인인 유화(柳花)와 그의 아들인 주몽(朱蒙)은 금와(金蛙)와 어떤 관계이기 때문에,
금와(金蛙)는 주몽(朱蒙)을 죽이지도 못하고 주몽(朱蒙)을 계속 살려두며 거두고 있었을까?
분명 삼국사기 본문에선,
금와(金蛙)의 맏아들인 대소(帶素)가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제거하십시오!"라면서 주몽(朱蒙)을 죽일 것을 금와(金蛙)에게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와(金蛙)는 주몽(朱蒙)뿐만 아니라 해모수(解慕漱)의 여인인 유화(柳花)도 계속 거두고 있었다.
아마도 유화(柳花)와 주몽(朱蒙)은 해부루(解夫婁)가 해모수(解慕漱)에게 밀려날 때,
밀려난 해부루(解夫婁)가 인질로 확보한 해모수(解慕漱)의 여인과 당시 그녀가 임신했던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고 본다.
삼국사기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이때 주몽(朱蒙)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이 문장은 주몽(朱蒙)이 고구려(髙句麗)를 세웠거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된 때이다.
기원전 37년에 주몽(朱蒙) 나이가 22세이면 주몽(朱蒙)이 태어난 해는 기원전 59~58년이다.
삼국유사에서 해모수(解慕漱)가 등장해 북부여(北扶餘)를 건국한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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